백중맞이 <영가전에> 특강 6
돌고도는 생사윤회 자기업을 따르오니
오고감을 슬퍼말고 환희로서 발심하여
무명업장 밝히시면 무거운짐 모두벗고
삼악도를 뛰어넘어 극락세계 가오리다
영가시여 어디에서 이세상에 오셨다가
가신다니 가시는곳 어디인줄 아시는가
이세상에 처음올때 영가님은 누구셨고
사바일생 마치시고 가시는이 누구신가
물이얼어 얼음되고 얼음녹아 물이되듯
이세상의 삶과죽음 물과얼음 같사오니
육친으로 맺은정을 가벼웁게 거두시고
청정해진 업식으로 극락왕생 하옵소서
미혹한 마음이 윤회한다
무엇이 윤회합니까? 육신이 윤회합니까? 아닙니다. 미혹한 마음이 윤회합니다. 육신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기에 육신에 집착하지 말고 육신을 버리고 가는 것에 대해서 마음아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헷갈려서 헤매는 마음을 미혹한 마음이라 합니다. 미혹한 마음을 무명이라고 표현합니다. 무명으로 인해서 이런 저런 행동을 하고, 그런 행동들이 장애가 되는 것을 무명업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업장이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합니다.
미혹한 마음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면 무거운 짐을 모두 벗을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이란 번뇌입니다. 번뇌라는 짐을 지고 있기에 중생의 인생이 괴롭고 고달픕니다. 잘 되면 잘 돼서, 안 되면 안 돼서, 기쁘면 기뻐서, 슬프면 슬퍼서 힘듭니다. 그것이 다 짐이고 번뇌인데 짐인 줄 모르고 지고 삽니다.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으면 정말 좋아야 하는데 걱정이 없으면 혹시나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오히려 불안해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번뇌란 짐은 훌훌 털어버리면 그뿐입니다.
중생들은 육도윤회를 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의 여섯 가지 세계를 오가며 윤회하는데, 앞의 세 곳은 악업을 지으면 가는 지옥 같은 세상 즉 악도(惡道)입니다. 번뇌라는 짐을 벗으면 삼악도를 뛰어 넘어 극락으로 바로 갑니다. 미혹한 마음을 털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극락으로 가는 급행티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존재 근원에 대한 두 대답
다음은 영가님에게 묻습니다. ‘영가님은 어디에서 오셨다가 어디로 가시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질문을 바꿔서 또 묻는다. ‘올 때 영가님은 어떤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가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은 영가님에게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이것을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현대에 여러 문명이 있지만 우리가 피부로 접하는 상당히 다른 성격의 두 문명은 불교가 탄생한 인더스문명과 기독교가 탄생한 유대문명입니다. 이 두 문명은 이 질문에 대해서 각각 어떻게 답할까요?
불교는 인도의 인더스문명을 세계화 시킨 가장 혁혁한 공을 가진 철학입니다. 불교라는 종교의 옷을 입고 있지만 인도사상의 많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도사상에서는 ‘우리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합니다.
‘우리는 윤회하는 존재다’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며 아득한 먼 옛날 시작도 없는 곳에서 와서 끝도 없는 곳으로 가는 무시무종의 존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윤회할까요? 힌두사상에서는 창조신인 브라흐만과 합일하기 위해서 끝없이 윤회한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무명 때문에 윤회하며 윤회의 원인은 무명이므로 무명을 밝혀 윤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처럼 인도사상에서는 인간은 윤회하는 존재이며 이 윤회를 빨리 끝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이렇다 답합니다. ‘신이 창조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여호와의 품에 있다’ 어디로 가는가? ‘여호와에게 다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신에게서 시작해 신으로 끝납니다. 주예수와 여호와를 믿고 따르면 항상 행복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하나의 종교는 신 중심이고 인도의 철학과 불교는 인간 중심입니다. 문제의 원인과 출발이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얼음이 물이 되는 자연스런 이치,
왜 인간은 슬퍼하는가?
다음 구절은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물과 얼음으로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이 물과 얼음과 같다는 것을 명심하여 집착과 번뇌를 거두고, 온갖 과보를 담고 있는 업식을 청정하게 하여 극락으로 가라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요.
조사스님의 말씀에 ‘평상심이 도(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밥하고 불 때는 것, 먹고 자고 걷고 뛰고 말하는 것이 도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불안해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과연 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은 평상심이 아니라 중생심입니다.
물이 바다에서 기화될 때 기쁜 감정을 가질까요? 비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질 때는 불안함과 괴로움을 느낄까요? 그렇지 않죠. 그런데 인간은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이 따릅니다. 물은 그렇지 않은데 인간은 왜 그러는 걸까요?
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는 것은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같고, 인연이 다해 얼음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물과 같이 담담하지 않고 아프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절망하는가?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분의 70%는 물입니다. 우리도 따지고 보면 물이에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칠정(七情)에 휘둘리거나 끌려다니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물이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봐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머리로, 가슴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 우리는 물처럼 산처럼 바다처럼 살지 못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