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사 극락전 주련과 아미타불
지난 주 길따라절따라 답사로 부여 무량사에 다녀왔습니다. 아름다운 극락보전으로 유명한 무량사 극락전에 이런 주련이 있습니다.
極樂堂前滿月容 극락당전만월용
극락당 앞 둥근달과 같은 부처님 모습玉毫金色照虛空 옥호금색조허공
옥호의 금색 광명 허공을 비추네若人一念稱名號 약인일념칭명호
만약 사람들이 일념으로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頃刻圓成無量功 경각원성무량공
눈 깜빡할 사이에 깨달아 무량한 공을 이루리라
아미타부처님의 미간에서 금색 광명이 비춰서 온 허공을 환하게 비출 때, 만약 사람들이 아미터부처님의 명호를 일념으로 부른다면 아주 짧은 순간에 무량한 공덕을 원만하게 이룬다는 말입니다.
서방정토 아미타부처님에 관한 경전에서 언제나 하는 말이 이겁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이라도 지성으로 염불하면서방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아미타 정토사상의 핵심입니다.
증심사 비로전 주련과 법신불
우리 절 증심사 비로전에도 주련이 있습니다.
報化非眞了妄緣 보화비진료망연
보신과 화신은 참되지 않으니 결국 허망한 인연일 뿐이요,法身淸淨廣無邊 법신청정광무변
법신은 맑고 깨끗하니 넓고 끝이 없구나.千江流水千江月 천강류수천강월
천 개의 강에 강물이 흐르니 천 개의 강에 달빛이 비치며,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만 리에 구름이 없으니 만 리가 하늘일 뿐이로세.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입니다. 위 주련에 나오는 ‘법신’이 바로 비로자나불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법신, 보신, 화신을 통틀어 삼신불이라 칭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 각각 법신, 보신, 화신입니다. 보신은 노사나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불도 포함됩니다. 화신 역시 석가모니불만 있는 게 아니라 중생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응해서 나타난 모든 부처님을 말합니다. 다만 법신은 오직 비로자나불만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법당에 부처님만 세 분 있는 경우에는 삼존불이거나 삼세불일 경우가 많은데요. 간혹 삼신불이 모셔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양 장곡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가운데 비로자나불이 있고, 왼쪽에 약사여래불이,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이 있었습니다.
삼신불: 법신, 보신, 화신
법신은 형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청정법신이라 합니다. 보신은 원만하게구족한, 완전무결한 부처님입니다. 화신은 천백억 화신입니다. 화신이란 형태가 없는 법신의 모습이 변화해서 중생 앞에 나타난것입니다.
법신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소리로 들을 수도 없는 것인데 중생들이 자꾸 찾으니까 그들이 보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해 나타난 부처님이 바로 화신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화신이 나온다고 하는데요. 사람 몸의 땀구멍은 셀 수도 없이 많겠지요. 때문에 천백억이나 되는 화신으로 타나날 수 있는 겁니다.
초기불교에는 법신과 화신(색신) 두 가지만 있었습니다. 색신이란 육신이 있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실존했으며 육신을 가지고 40년 넘게 법을 설했던, 우리가 알고 있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바로 색신입니다. 부처님이 자기 자신을표현할 때는 ‘여래’라는 말을 썼습니다. 초기불교 아함경에서 “여래는 무량하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왜냐하면 “색신은 죽을지라도 법신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육신을 가진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떻게 법신 즉 진리 그 자체로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났고, 이것이 초기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삼신불이라는 개념으로 승화됩니다. 여기에서 보신불이 등장합니다.
원과 행과 방편을 지닌 보신불
보신불은 원만하게 구족했고 완전무결한 부처님입니다. 법신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어 중생의 입장에서는 참 답답합니다. 그래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부처님을 상상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부처님을 상상하고 이 형태에 보신불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렇게 삼신불의 구조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신불이라고 해서 우리의 상상속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대상이되어야 하지요. 신앙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나 보신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가 보신불이 될 수 있는가? 공덕을지어야 합니다.
보신불의 다른 이름은 공덕불입니다. 공덕을 어마어마하게 쌓아야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형태의 부처님의 될수 있습니다. 공덕을 쌓으려면, 즉 행을 하려면 먼저 원을 세워야 합니다. 원을 세우고 공덕을 쌓은 과보로 보신이 되는 것이니세워야 하는 원이 조그마한 원이어서는 안 됩니다. 대원을 세워야 하는 것이지요.
아미타부처님은 48가지 대원을 세웠습니다. 마흔 여덟 가지나 되는 큰 원을 세웠으므로 그 원을 다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행을 해야 합니다. 이 행에는 개인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중생 구제도 포함되어 있으며, 중생을 구제하는 다양한 방편역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신불은 원이 있어야 하고 원에 상응하는 행이 있어야 하고 행에 상응하는 방편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을 충족하는 부처님이 예를 들면 아미타부처님인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서방정토를 만들어서 그곳에 오는 모든 중생들을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원을 세우고 행했기에 보신불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보신불인 약사여래불은 십이대원을 세웠습니다. 열두 가지 원을 세우고 그 원을 이루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덕을 쌓는 겁니다.
흔히 삼계불이라는 말을 씁니다. 가운데에 법신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 왼쪽에 동방을 다스리는 약사여래불이, 오른쪽에는서방을 다스리는 아미타부처님이 있습니다. 이것을 삼세불이라고도 하는데, 동명이인처럼 또 다른 삼세불인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여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법신과 화신의 매개체, 보신불
보신불은 초기 대승불교에서 화신과 법신 사이에 매개하는 역할을 만들기 위하여 처음 등장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신불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현실에서는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수행의 측면에서 보자면 중생들을 보신불을 친견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어느 정도 이른 수행자들만 보신불을 친견할 수있지요. 그렇다면 중생들은 누구를 친견할 수 있습니까? 바로 보살들입니다. 예를 들어 화엄경에서 표현되는 장엄세계를 우리중생들을 볼 수가 없으나 보살들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보신불의 개념이 적용된 것이지요.
중생들은 영영 보신불을 보지 못할까요? 아닙니다. 중생이 수행을 열심히 해서 삼매에 들어서면 법신 보신 화신의 구별이 다사라지고 하나가 됩니다. 삼매에 들면 중생도 보신불을 친견할 수 있다고 경전에는 말합니다.
법신불과 천강에 비친 달
앞서 말씀드린 비로전 주련의 구절을 다시 살펴볼까요?
‘보신과 화신은 진실되지 않아서 허망한 인연임을 깨달으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이 다 인연입니다. 보신불과 화신불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것들 역시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신과 화신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설령 누군가 그들을 봤다고 한들 그것은 진짜가아닌 허망한 인연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짜는 무엇인가? 법신불입니다. 법신은 청정하여 공간적으로는 한정지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으며 시간적으로는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합니다. 법신은 청정하기 때문에 ‘이것이 법신이야’, ‘내가 전에 봤던 그것이 법신이야’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법신은 광무변하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법신입니다.
강이 흐르는 데에 달이 뜨면 온 강에 달 그림자가 비칩니다. 천 개의 강이 흐르면 천 개의 강 위에 천 개의 달 그림자가 비치지요. 강의 모양에 따라 물결에 따라 달 그림자의 모양은 각기 다를 것입니다. 이렇게 강의 모양에 따라 모두 다른 달 그림자는 화신을 의미합니다. 만리나 되는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다면 만리의 강은 어떨까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질 것입니다.
잘 생각해봅시다. 하늘에 떠있는 달이 법신이고 물 위에 비친 달 그림자가 화신입니까? 아닙니다. 만약 달 하나만이 유일한법신이라면 ‘만리나 되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면 만리의 강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휘영청 달 하나만 떠 있더라.’라고 표현하는게 맞을 겁니다.
그러나 법신은 가없이 넓다고 했습니다. 달 하나만 법신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법신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가 법신이라고 앞서 말씀드렸는데요.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연기실상입니다. 이것 저것으로 나누고 분별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나눌 수 없습니다. 서로 얽히고설켜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부처님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법신이기에, 하늘 위에 휘영청 떠있는 달 하나만을 법신이라고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법신은 하늘에 떠있는 달이고 화신은 물 위에 비친 달 그림자이고 보신은 달빛의 세기이다’라는 비유를 들기도합니다. 잘못된 비유입니다. 보신이라 함은 원과 행과 방편을 완전히 구족해서 완전무결한 형태의 부처님을 상상한 것입니다. 달빛이 세기도 했다가 약하기도 했다가 하는 것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므로 보신을 달빛에 비유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온 세계에 상주하는 광무변 법신불
칠정례에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법신불에게 예를 올린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시방삼세’에서 시방이란 열 가지 방향을 말합니다. 동서남북 상하좌우 위 아래. 모든 장소를 말합니다.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시간적 개념을 말합니다. ‘제망찰해’에서 제망이란 제석천이라는 신을 뒤덮고 있는 그물을 말합니다.
그물이 얼기설기 교차하는 지점마다 구슬이 있고 이 구슬은 서로서로를 비춥니다. 이것을 중중무진법계라 합니다. 구슬이 구슬을 비추고 또 구슬이 구슬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세계에 상주하는 부처님의 무리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린다는것입니다. 청정하여 모든 세계에 가없이 넓은 법신불,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에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련을 가지고 오늘은 삼신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법신 보신 화신의 개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