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는 불교의 처음과 중간과 끝
오늘부터 49일간 인연 있는 영가님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백중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공덕을 영가들에게 보다 잘 돌리기위해 이 기간 동안에는 먹는 것, 보는 것, 생각하는 것들을 가능한 청정하게 유지하면서 기도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백중 법회에서는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의 핵심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제대로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고집멸도의 사성제는 불자가 아니어도 상식으로써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다시 사성제를 이야기하는가?
팔정도의 시작이 정견이기 때문입니다. 팔정도가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라는 것은 신도님들이 다알고 있지만, 정작 ‘정견이 무엇이오?’ 물으면 제대로 아는 이가 없습니다. 혹은 주위 사람이 나에게 “불교가 뭐에요?” 물었을 때한 마디로 똑부러지게 정의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정견이 무엇인가? 불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하자면 그것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불교는 사성제입니다. 때문에 사성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팔정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며, 팔정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자깨달음을 얻는 일입니다. 사성제가 불교의 시작이고 중간이고 끝입니다. 고성제가 불교의 시작이고 도성제가 불교의 마지막입니다.
부처님의 첫 법문, 사성제
대승경전은 부처님 사후에 숱한 사람들을 통해서 정리된 경전입니다. 누가 썼는지, 언제 쓰였는지를 알 수 없지만 다만 대승경전의 내용이 부처님의 법문 내용과 일치하므로 경전으로 인정합니다.
반면 사성제는 부처님이 직접 설한 법입니다. 언제 설했는가?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본인이 깨달은 바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설했습니다.
부처님이 새벽 별을 보고 얻은 깨달음의 내용을 경전에서는 연기법이라 이야기합니다. 더 정확히는 ‘부처님이 연기법이라는진리를 관찰했다’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란 겁니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개발해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계시건 계시지 않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는 진리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뛰어난 수행자가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가장 먼저 법을 설할 때 연기법을 말하지 않고 사성제를 이야기했을까요?
부처님은 깨달은 후에 당신이 발견한 깨달음의 내용이 너무 심오하고 어려워서 일반 중생들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깨달았으니 굳이 더 육신을 가지고 살 필요가 없이 육신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때 천신들이 와서 간청합니다.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피듯 중생들 중에도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의 내용일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생각을 바꿔서 중생들에게 법을 전하기로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바로 법을 설하지 않았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7주 동안 자리를 바꿔가면서 법의 기쁨을 누렸고, 동시에 당신이 깨달은 연기법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할까 고민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해서 나온 것이 사성제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바를 누구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당신이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들을찾아갑니다. 그런데 두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비구 수행자들을 찾아갑니다.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녹야원으로 말입니다.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부처님께서 설한 최초의 법문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그 내용이 <초전법륜경>이라는 경전에 그대로 담겨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요.
사성제의 핵심, 고성제
우리가 흔히 줄여서 고집멸도라고 하는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는 내가 있거나 없거나 세상이 바뀌거나 안 바뀌거나 언제나 진실인 것입니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고성제입니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자 일체가 모두 괴로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집성제입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세 번째 멸성제는 괴로움을 멸하는 성스러운 진리, 마지막인 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사성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세계는 괴로움이며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에 있다.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사성제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일러줄 뿐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 세계의 모든 존재 물질은 몇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가,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따위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문과 생각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잘못된 생각이고 웃기는 이야기라는 뜻에서 희론이라고표현합니다. 부처님은 단지 이 세계가 고통이라고 선언하고, 이것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고성제의 핵심, 오온
흔히 불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깨달음이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열반, 해탈이 아니라 고(苦)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보통 중요한 내용은 첫 번째나 마지막에 나오는데, 열반에 대해서는 세 번째에 언급합니다. 어중간하죠. 마지막에 나오는 멸성제도 따지고 보면 별 내용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멸성제에 대해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인 멸성제 그것은 갈애가 남김없이 떠나 소멸해버림, 포기, 해탈, 집착 없음이다.”이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사성제 안에서 왜 열반을 강조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성제는 사고팔고입니다. 사고(四苦)란 생노병사의 네 가지 고통입니다. 팔고(八苦)란 생노병사의 네가지 고통에 또 다른 네 가지 고통을 더한 말입니다. 싫은데 봐야만 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좋은데 헤어져야만 하는 애별리고(哀別離苦), 가지고 싶은데 가지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에 집착하는 오취온고(五取蘊苦) 등이지요.
팔고에서 앞의 일곱 가지 항목은 모두 마지막인 오취온고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왜 생로병사가 고통인가? 몸뚱이가 있으므로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고 늙는 것이 고통이고 병드는 것이 고통이고 죽는 것이 고통입니다. 내가 사라지니까 고통스럽다 못해두려운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괴롭고 내 욕심대로 안 되니까 괴롭습니다. 결국은 괴로움의 중심에 ‘나’라고 하는 것이있습니다. 이것이 오온입니다.
나를 해체하니 나는 없고 오온만 있더라
오온은 색수상행식의 집합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면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그런데 이쯤 되면 일반 불자들의 경우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합니다. 교리 공부를 하다가 포기하는 지점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핵심을 봅시다. 사성제의 핵심은 고인데, 고는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굳이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근원적인 존재(나)에 대한 불만족을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온에 집착하고 있는데 그것이 항상하지 않고 변화하므로[무상] 괴롭고, 제법무아, 일체개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오비구에게 사성제에 대해 법문을 할 때입니다. 이 비구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한 번에 알아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부처님처럼 총명한 분도 목숨을 걸고 수행하여 발견한 진리인데 어떻게말 몇 마디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비구들이 잘 못 알아들으니까 부처님께서 두 번째 법문을 합니다. 바로 오온에 대한 법문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 당시의 오온은 가령 이런 것입니다. ‘이 몸은 내가 아니다’, ‘내가 느끼는 느낌은 내가 아니다’, ‘생각은내가 아니다’, ‘느낌이나 생각 의도들이 임시로 모여있는 것들을 나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더라’ ‘나라고생각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몸이 있고 두 번째는 느낌이 있고 세 번째는 마음속에 생기는상(像, 이미지)가 있고, 네 번째는 거기에 대한 판단이 있더라’는 것이지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분석해보려고 하니 그 안에 ‘나’라는 것이 없더라.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괴로움이 발생했는데사실 알고 보니 내가 없기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오온은 마음이 그리는 그림
그런데 불교가 발전하고 후대에 전해지면서 오온에 대한 개념이 확장됩니다. 단지 나를 구성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이러한 토대로 설명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등장한 유식 사상이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킨 사상 체계입니다.
우리나라 심리학자 서은국 씨가 쓴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이 불자는 아닌데요. 이 책에서 그는 행복이란인간의 모든 경험은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마법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빨간 사과가 있다고 하면, 빨간색은 사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에 반사된 빛의 파장이 우리의 시각 세포를 흥분시키고, 그 신경 반응을 내 안에서 합성하여 ‘빨갛다’는 경험을 만들어낸다고 말입니다.
만약 빨간색이 사과 자체이 묻어 있다면 사과는 항상 빨갛게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색맹인 누군가에게 사과는 빨갛게 보이지않습니다. 즉 사과의 빨간색의 사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 사람의 머릿속에서 생겨나는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모든 경험은, 즉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는 이 세계는 나의 뇌가 만들어내는 쇼입니다. 뇌의 경험입니다.
불교에서 색(色)이라고 표현하는 내 밖에 존재하는 물질들은 내 머릿속에서 만든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유식무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머리속의 상만 있지 바깥에 객관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온에 집착하는 데에서 오는 괴로움
오온을 낱낱이 해체해서 생각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라고 하는 놈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고 하셨고요. 나를 해체하면 결국 다섯 가지 정도로 나뉘어 있을 뿐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오온을 말씀하셨습니다. 훗날 불교가 발전하면서 오온이 모든 물질세계와 현상세계, 정신세계를 설명하는 기본 바탕이 되었고요.
어쨌든 고성제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괴롭거나 자식이 말을 안 들어서 괴로운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병이 들어서 괴롭고 늙어서 괴로운 것만이 고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는 그 자체에 괴로움이 내재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나’라는 존재를 상정하고 나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괴로움의 참뜻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데 현실은 이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라는 말은 이 순간이 지나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말과 같습니다. 행복이 영원하지 않으므로 괴롭습니다. 만일 행복이 일정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괴고(壞苦), 변화에서 오는 고통이라 합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괴로움에 이런 것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