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열반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죽음이나 큰스님의 죽음을 두고 “열반했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열반이라는 말은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말하기에 엄밀히 말하면 성인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반열반’ 또는 ‘입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
부처님은 돌아가시면서 세 가지 유언을 남겼다. 부처님 당신이 아닌 스스로를 의지하고 부처님이 설한 법을 의지하라는 의미를 담은 ‘자등명 법등명’.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사념처’. 사념처 수행을 대하는 자세로써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정진할 것’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으로 하여금 현재의 불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과 공부해야 할 과제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깨달음, 사념처, 열반, 자등명법등명, 해탈

열반과 반열반

오늘은 칠성재일이고 내일은 출가재일, 다음주 주말은 열반재일입니다. 출가재일에 관련해서는 지난 번에 한 번 짧게 법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열반재일을 앞두고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열반재일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입니다. 열반(涅槃)은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이야기하는데 왜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을 열반했다고 이야기할까요? 부처님에게만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 아니고 큰스님이 입적하신 경우에도 열반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구분해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쓰는 표현인 ‘열반’, 그리고 스님들이 돌아가셨을 때 쓰는 표현인 ‘열반’은 굳이 표현하자면 ‘반열반(半涅槃)’입니다. 인도말로는 빠리닙빠나(Pari-nibbāna)라고 합니다. 이 말을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표현한[음차] 것이 반열반입니다. 원래는 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맞는데요. 시간이 지나다 보니 ‘반’자를 떼고 열반이라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처님께서 육신의 몸을 버리고 입적하신 것은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는 이 세계에 오지 않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열반이라는 것을 세분화하다 보면 끝도 없습니다. 굳이 개념을 정교하게 만들다보니까 나온 것입니다. 육신을 버리고 더이상 이 세계에 오지 않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것도 실은 우리에게 열반의 개념에 혼돈을 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열반이라는 표현보다는 입적하셨다,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명확할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룬 열반과돌아가셨을 때의 반열반은 구분해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처님의 입적에 관련한 경전, 부처님이 입적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다룬 경전의 이름이 <대반열반경>입니다. 띄어쓰기를 하면 ‘대 반열반경’이 될 것입니다. 그냥 열반경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반과 해탈

우리가 혼용하는 용어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열반, 해탈, 깨달음 등입니다. 이 용어들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고 지낼 필요가 있습니다. 열반(涅槃)이라는 말은 인도말로 니르바나(Nirvana)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불씨가 완전히 꺼진 상태’입니다. 해탈(解脫)이라는 말은 얼핏 듣기에 우리 일상과는 전혀 다른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본 뜻은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태, 즉 번뇌나 집착의 구속에 얽매인 상태에서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해탈이라는 것은 내가 현재 구속되어 있는 얽매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상태 혹은 과정을 뜻하고, 열반이라는 것은 번뇌나 집착의 불길이 완전히 꺼져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깨달음은 말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병원에 가보아도 원인을 알 수가없습니다. 이 사람이 이 생을 정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양복 한 벌을 맞추는데, 재단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셔츠의 목을 그렇게 꽉 조이고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숨이 차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목 사이즈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말에 이 사람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이유를 알게 된 겁니다. 몰랐을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알게 된 이상 넥타이만 풀면, 셔츠 사이즈만 맞추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때 ‘아는 것’이 단순히 ‘서울에 가면 한강이 있다’는 차원의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번뇌이고 무엇이 연기인지,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몸으로 완전히 체화시킨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같은 깨달음이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어느정도 깨달았을 수도 있고 철두철미하게 깨달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마다 뉘앙스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유언 세 가지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하셨습니다. 흔히 ‘자등법 법등명’이라고만 알고 있는데요. 경전을 보면 그보다 더 길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유언은 세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이전의 책들을 보면 대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부처님의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번역했는데요. 요즘은 좀 다릅니다. ‘등불’을 ‘섬’으로 번역해서 ‘나 자신을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살라.’고 합니다. 등불 또는 섬으로 번역되는 단어인데섬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본 것입니다. 

인도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평야지대입니다. 평야에 홍수가 나면 저 멀리서 물이 몰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물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피난갈 곳이 없어서 수해를 입기도 합니다. 홍수가 나면 게중에 조금 지대가 높은 곳에 사람들이 몰려가서 피해로부터 도망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홍수에서 발 디딜 곳이 되어주는 섬이 인도에서는 ‘피난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등명 법등명은 나자신을 피난처로 삼고 법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지 부처님 당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어떻게 하는 것이 나 자신을 피난처로 삼고 법을 피난처로 삼는 것인가? 그것은 사념처를 수행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사념처 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하셨고요. 

세 번째는 “게으르지 마라. 열심히 정진하라.”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가신 부처님

크게 보면 이 세 가지가 부처님의 유언입니다. 이 내용을 볼 때 우리가 무엇을 느낄 것인가? 첫 번째, 부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경전에서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에서 예수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기는 해도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던가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날을 기리는데 죽은 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예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므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시에 어떤 말을 하셨는가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법당에 가면 32상호를 갖추고 금색 옷을 입은 부처님이 계시니까 나도 모르게 부처님을 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존경할 대상임은 분명하나, 여호와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신은 아닙니다. 이러한 점을 경전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만 무지몽매한 중생들은 자꾸 그것을 잊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하듯 소원을 빕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는 말처럼 빌기보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움직여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부처님이 신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부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숱한 경전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등명 법등명의 방법 : 사념처 수행

내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을 의지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요?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하는 걸까요?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실천할 수있습니다. 때문에 부처님은 두 번째 유언을 통해 그 구체적은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바로 사념처 수행입니다. 사념처 수행이라 하면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간단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겁니다. 신수심법(身受心法) 이라는 네 가지의 나라는 것을 념합니다. 신은 몸입니다. 앉아있을 때 엉덩이, 무릎 같은 것을 관찰하는 것이 신을 관찰하는 겁니다. 수는 느낌입니다. 엉덩이가 뻐근한 느낌, 무릎이 아픈 느낌을 말합니다. 심은 마음입니다. 짜증난다 슬프다 기쁘다 같은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심입니다. 

이렇게 나의 몸과 마음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다 보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고, 고요한 상태에 이른 그 상태에서 부처님이 말한오온, 육입처, 십이연기 등 공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공성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법을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의 내용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법이 대한 수행입니다. 

이 네 가지가 항상 매 순간 자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마음챙김으로 번역하기도하고, 주의집중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깨어있음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만은 핵심은 이것입니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의 일거수일투족과 마음이 작용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수행법이고 초기불교부터 이어진 수행법이고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오면서 화두참선 수행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고 한 말씀은 부처님 법대로 수행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역으로 말하면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빌기만 하고 스스로 수행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이 결코 원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어디나가서 스스로 불자라고 이야기하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행동은 부처님이 알려준 대로 하지 않고 말로만 불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 : 억지로라도 수행하라

마지막으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아보니 아신 겁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우리의 DNA에 들어있는 본성이 아닙니다. 하기 싫어도 일부러 억지로 노력해야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생각하시되, 중생들의 본성 안에는 열반을 갈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일부러라도노력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님들이 매일 하루 세 번 예불을 하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깨달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억지로라도 습관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실제 습관이 되고 내 삶의 일부가 되고 체질이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안에 있는 번뇌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부처님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부하신 겁니다.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수행하는 것을 게으르지 말고, 하기 싫어도, 짜증이 나도, 그냥 하는 겁니다. 

댁에 돌아가셔서 가지고 계신 불교입문 책이나 부처님의 생애를 다룬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하신 말이 달리보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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