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성지순례기 (1)
‘종교는 문화다’ 요약
미얀마 성지순례 이야기를 세 편에 걸쳐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첫 편으로는 ‘종교는 문화다’를 주제로 이야기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미얀마는 불교국가이며 불교가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불교국가인 미얀마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를 결정하는 것은 불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자연스럽게 사원에 가서 참배하고 공양 올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인구의 절반을 넘고, 광주 인구 대비 불교를 믿는 사람은 10%밖에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미얀마나 이슬람 국가들처럼 종교가 문화가 되지 못하고 오로지 신앙만 남았습니다. 기복신앙 혹은 개인의 영적인 체험이나 수행만 남은 것입니다.
미얀마 성지순례기 (2)
‘개팔자가 상팔자’ 요약
2탄으로는 ‘미얀마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얀마에 가면 길거리에, 사원 마당에, 카페에 주인 없는 개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개들이 자유롭게 걷고 눕는데 사람들은 개들을 채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소유로 길들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개들을 배려하고 존중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를 이번 생이 끝나면 다음 생에는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날 동물로 여긴다 합니다. 그래서 인간과 동급으로 취급하고 사람과 똑같이 대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반려동물이 어리고 예쁠 때는 엄청나게 좋아하다가도 새끼를 낳거나 아파서 싫어지면 쉽게 버립니다. 그 중생을 나의 욕심의 대상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소유하는 겁니다. 내가 개나 고양이라는 대상을 소유하다가 싫어지면 버리는 것입니다.
왜 반려동물에 대한 양상이 이처럼 다른 것일까요? 돈이 최고라는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문화 때문입니다. 돈은 내 안에 있는 욕심을 현실로 바꾸어줍니다. 돈과 물건의 교환을 통해서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돈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돈이 우리로 하여금 주입시키는 생각은 내 욕심을 소유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많은 감정들이 돈을 통해서 소유의 관계로 바뀝니다. 사랑의 감정 역시도 소유의 관계로 나도 모르게 바뀌어버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보자는 이야기를 두 번째 시간에 드렸습니다.
미얀마 성지순례기 (3)
‘복은 비는 것인가? 복은 짓는 것인가?’
오늘은 미얀마 성지순례기 3탄으로 ‘복은 비는 것인가, 짓는 것인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미얀마에서 본 불상들은 우리나라하고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부처님들은 몇 십 년 지나면 금이 낡아서 떨어져 초라해집니다. 그러면 개금불사를 통해 새 옷을 입고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미얀마 부처님들은 알아서 스스로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미얀마 불자들에게는 불상에 금박공양을 올리는 풍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멀리 있는 부처님이면 몰라도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의 부처님이면 닿는 곳마다 금박이 붙어있습니다.
미얀마에는 3대 성지가 있습니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는 워낙에 유명하니까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다음은 만달레이의 마하무니사원입니다. 마하무니 사원의 부처님은 일반적인 남방불교의 여성스러운 불상과는 달리 좀 불경스럽지만 강호동과 체격이 비슷합니다. 하도 사람들이 금박을 붙여서 덩치가 커진 겁니다. 세 번째 인레호수에 있는 파웅도우 사원에 가면 오뚜기를 닮은 다섯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 부처님들은 원래 5센티 정도였는데 몇 백 년 이상 사람들이 금박을 붙이다보니 지금은 키가 30센티 쯤 된다고 합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금박이 붙어서 오뚜기 같은 형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사람이 보기에는 낯선 금박공양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이런 문화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기복적으로, 복을 빌기 위해 금박을 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종무소에 가서 기도를 접수하고 법당에 간단하게 참배하고 말 텐데, 미얀마 사람들은 절도 하다가 가끔씩 부처님과 눈도 마주치고 나름대로 소원하는 바를 읊조리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기복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참 무덤덤합니다. 이 사람들이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의 믿음은 귀의에 있다
이 지점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믿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식당에 가서 짬뽕을 달라고 했을 때 짬뽕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송정역에서 용산 가는 기차를 타면 서울에 도착한다는 믿음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 사이의 믿음입니다. 자식이 자라면 학교도 가고 졸업을 하고 취직 준비를 하고 결혼을 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믿음 말입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인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믿어야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믿음이며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입니다.
같은 종교적 믿음이지만 불교적 믿음은 기독교와는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불교적인 믿음은 귀의하는 것입니다. 귀의한다는 것은 불법승 삼보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생사의 괴로움이라는 거대한 홍수로부터 우리가 피난할 수 있는 의지처가 불법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은 안수정등의 비유로 이를 쉽게 설명했습니다.
무명으로 어두운 이 세상에 코끼리의 형상을 한 세월의 무상함에 쫓기다가 나무뿌리를 타고 우물에 들어가는데 아래에 네 마리의 독사가 있더라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네 마리 독사는 지수화풍을 의미하니 내 수명이 다하면 사대에 먹힌다는 뜻이고, 그 아래에서 불을 뿜는 독룡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무뿌리를 갉아먹는 두 마리 쥐는 낮과 밤 즉 세월을 의미하고, 머리 위에 달린 벌집에서는 다섯 마리 벌이 내려와서 나를 괴롭힙니다. 재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오욕락입니다. 그 와중에 벌집에서 꿀이 똑똑 떨어지니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꿀을 탐하게 됩니다.
귀의, 삼보로 돌아가 의지처로 삼는 것
여러분.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난을 가야겠다고 했을 때 그 피난처가 바로 불법승 삼보입니다.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은 피난처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부처님이 살아계신다면 부처님을 쫓아가 그 옷자락 뒤에 숨으면 될 텐데, 부처님은 2,50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부처님께 어떻게 귀의합니까? 부처님의 삶을 알고 당신이 사신 대로 나도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법에 귀의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승에 귀의하는 것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니 등 사부대중의 무리인 상가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나 혼자 수행하는 것이 힘드니까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수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중 속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합해야 합니다. 상가에 의지한다는 말은 수행자들 무리 속에서 화합하며 살겠다는 뜻이며, 이를 종합하면 결국 삼귀의 불법승에 귀의한다는 말은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복을 비는 것, 누군가 나에게 주는 것
여러분. 복은 비는 것입니까? 짓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아이가 부모와 마트에 갔습니다.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데, 이것은 복을 비는 것입니다. 저것을 내게 달라고 애걸복걸 손이 발이 되도록 빕니다. 반면 복을 짓는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마트에 갔는데 새로 나온 무선청소기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나는 사달라고 떼를 부릴 부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조금씩 저금을 합니다. 그렇게 돈이 모이면 그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을 짓는 것입니다.
복을 비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든 초자연적인 절대자이든 누군가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짓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능성을, 힘을 내 안에 쌓는 것입니다.
복을 짓는 것, 나의 공덕을 스스로 만드는 것
불교에서는 복을 짓는다는 말과 함께 공덕을 짓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따지고 보면 둘은 같은 것이지만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릅니다. 공덕은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내 안에 뭔가를 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성이 되고 힘이 되는 겁니다. 이 쌓은 것을 밖으로 드러내면 덕행이라고 합니다. 덕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공덕이 쌓여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복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이 많은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 힘이 쌓여있고 그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공덕을 쌓는 것은 불법승으로 돌아가 귀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보이면 열심히 노력해서 가야 하는데 저기에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힘을 길러야 합니다. 결국은 불법승에 귀의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것은 참회하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아가면서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지은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탐진치로 인해서 한 행동이 다름 아닌 죄입니다. 생사의 바다에서 중생으로서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행동들입니다. 이런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참회는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기도를 하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귀의, 참회하고 수행하는 일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삼귀의이고, 이것은 공덕을 쌓는 것이고, 이것은 참회하는 것이고, 이것은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하려면 방향이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공덕을 많이 쌓아서 어마어마한 가능성과 힘을 쌓아놓아도 이것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티벳불교에 덕행은 말과 같고 서원은 말고삐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고삐란 말을 달리게도 하고 서게도 하고 방향을 지시합니다. 자동차로 치면 브레이크와 핸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통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공덕을 쌓아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복덕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서원을 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불교의 모든 의식은 사홍서원으로 끝납니다. 아무리 많은 중생들이 있어도 모두 다 제도할 것이며, 내 안에 아무리 많은 번뇌가 들끓어도 끊어내고, 아무리 부처님 법문이 많아도 다 공부하겠으며,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높고 높아도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져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서원입니다. 서원을 세우는 것은 어디로 가겠다고 하는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복을 짓고 수행을 짓고 공덕을 쌓고 참회를 해도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미얀마 뚱뚱이 부처님은 서원 공덕의 방증
미얀마 사원의 금박으로 뚱뚱해진 부처님을 보면서, 또 우리나라 신도들에 비해 무덤덤하게 참배하는 미얀마 불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서원이 일상화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미얀마 불자들이 금박공양을 올리는 것은 공덕을 쌓기 위함인데, 그 공덕은 그것이 나 자신이나 내 가족만을 위한 발원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하기를 바라는 서원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도덕이고 윤리고 문화이고 일상생활인 미얀마. 때문에 그곳 불자들의 모습이 이방인이 보기에는 뭔가 무심하고 무던하게 보인 것입니다. 우리같이 내 욕심에 애가 닳아서 안달복달 기도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미얀마 성지순례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간절한 신앙도 좋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오계를 일상에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미얀마 불자들과 나의 어떤 점이 통하고 어떤 점이 다른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나의 신행생활의 방향을 점검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