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로 알아야 제대로 믿는다
종교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면, 우선 종교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하면 대개 종교적인 신앙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신념(信念), 신뢰(信賴), 자신감(自信感), 확신(確信), 맹신(盲信), 미신(迷信) … ‘믿음이 간다.’, ‘나를 믿어봐’ 등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많이 쓰이는 말이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등산을 한다고 할 때, 초행길을 혼자서 간다면, 누구 할 것도 없이 마음 한구석이 불안합니다. 표지판이 나올 때마다 멈춰서서 확인하고, 또 맞은 편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리로 가면 정상이 나와요?” 라고 물어봅니다. 길이라고는 이 길 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동행인이 있으면 덜 불안합니다. 만약 그 동행인에게 이 길이 초행길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러가지 믿음들
자신감이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믿음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뭘 하더라도 불안하고 남이 눈치를 보게 되지만, 자신감이 있으면 나의 행동이 만들어 낼 결과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불안하지도 않고 남의 눈치도 덜 보게 됩니다.
자신감은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려면 우선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관, 정치적 신념, 자신의 성격, 식생활의 기호 같은 것은 자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 자신은 글이나 말의 형태로 나의 바깥에 박제화된 정보가 아닙니다. 이러한 지식은 나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정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나 자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감정, 생각 그리고 행입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매 순간의 자신을 놓치지 않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곧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어야 자신을 알 수 있고, 자신을 알아야 자신에 대한 믿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가지는 자신감은 말 그대로 맹목적인 자만심에 불과합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자기성찰에서 나옵니다.
신뢰라는 단어에서 ‘뢰(賴)’는 의지한다는 뜻으로, 신뢰한다는 말은 곧 믿어서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당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도 그 사람과 같이 한다면 마음이 든든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 믿음을 주기 때문에 의지할 만한 사람입니다.
확신은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는 것입니다. 맹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턱대고 믿고 보는 것입니다. 믿음에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습니다. 남들이 믿으니까,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신은 미혹해서 헤매다가 그릇된 길로 갈 수도 있는 믿음입니다. 미신과 맹신은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신념은 자신이 무엇을 왜 믿는지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조목조목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리된 믿음입니다. 이렇듯 일상에서 흔히 쓰는 단어 속에 믿음은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믿음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밥을 떠서,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행동은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런 문제없이 잘 할 수 있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식사하기 힘든 환자라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 환자는 최소한 식사하는 자신 만큼은 믿을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믿음은 확인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지식 그 자체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확인한다는 것은 지식이 가리키는 실체를 경험이나 과학적 검증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보에 있지 않고 정보가 가리키는 실체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첩첩산중에 작은 산골마을이 있다고 합시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 사람이 서울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갔다 온 그는 서울에는 산만큼 큰 집이 있는데 그 이름을 경복궁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본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다른 마을 사람을 데리고 서울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직접 눈으로 보고 온 사람에게 정말 경복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있다고 했을 것이고,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에 가면 경복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되었고, 이 사실은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4대 요소;
첫 번째, 욕망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확인하기 쉬울수록 믿음의 필요성은 줄어듭니다. 그 반대일수록 믿음의 필요성은 강해질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행동하는 힘도 강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어떤 행동이든 시작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지금 여기에 결핍된 것,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행동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을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금 여기서 확인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해내려는 의지입니다.
당연히 욕망이 강할수록 행동의 의지도 강할 것입니다. 때문에 욕망이 없다면 혹은 아주 약하다면 하고자 할 의지 역시 없거나 약할 것입니다. 애초에 욕망이 없다면 믿음이 생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욕망은 믿음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두 번째, 욕망의 대상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채워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즉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욕망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욕망에서 행동이 나옵니다. 그런데 욕망만 있다고 해서 곧바로 행동에 돌입할 수는 없습니다. 욕망을 해소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아 답답해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는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여기까지는 욕망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욕망은 안으로 곪아 마음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 대신 ‘어디론가 떠나자! 어디가 좋을까? 제주도? 그래 제주로 휴가를 가자!’ 이런 생각이 들면 욕망이 분출될 대상이 생긴 것입니다.
제주도로 휴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환상의 섬 제주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은 벌써 제주도에 가 있는 것입니다. 욕망의 대상이 생기면 상상하기 시작하고 상상하다보면 현실화 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고 결국 행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듯 뭔가를 하려면 욕망만 있어서도 아니 됩니다. 반드시 욕망을 해소할 대상을 마음이 발견해야 합니다.
세 번째, 기존의 믿음
욕망의 대상을 찾았다고 해서 무조건 행동으로 돌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제주 휴가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처음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갑갑함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는데, 문득 의심이 듭니다. ‘제주도에 간다고 해서 과연 이 갑갑함이 완전히 해소될까?’ ‘제주에 값도 싸면서 시설도 좋아서 휴가를 즐기는데 더 없이 좋은 그런 숙소가 있을까?’… 왠지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여기에 뭔가가 더 추가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결코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기존의 이미 검증된 다른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어떤 숙박시설에서 묵을 것인지, 여행 코스는 어떻게 잡을 것인지 뭐 하나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 쉽게 찾는 것이 믿을만한 추천 사이트입니다. 여기서 평점이 높은 숙박시설을 고르고,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코스를 선택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공신력에 기대는 것이 됩니다. 평소에 신뢰하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그대로 휴가 계획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신의 계시대로 휴가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기존의 이미 검증된 믿음은 여러가지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오래된 것이 종교입니다. 그리고 근대이후 종교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과학입니다. 공신력도 기존의 믿음 중 하나입니다. 공신력은 이미 사회 저변에 믿음을 주는 것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신뢰하는 사람 역시 흔히 기대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욕망이 강하고 욕망의 대상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기존의 믿음에 기대지 않는 한 결코 안정적인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네 번째, 실행능력
욕망도 강하고, 욕망의 대상도 분명하고, 기댈 수 있는 기존의 믿음이 있다하더라도 그 믿음을 실행할 능력이 본인에게 없다면 그러한 믿음은 백일몽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순간 강하게 일어나더라도 곧 현실을 돌아보고 나면 사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 휴가의 경우, 믿을만한 휴가지와 일정도 추천받았지요. 그런데 정작 갈려고 보니 주머니에 돈이 없다면, 아니면 주머니 사정은 넉넉한데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주로 휴가를 가면 나의 이 갑갑함은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믿음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아무리 철썩같이 믿는다 해도 현실에서의 실현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면 그 믿음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오류;
첫 번째, 지나친 욕망이 빚은 오류
욕망, 욕망의 대상, 기존의 믿음, 실행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면 행동에 대한 믿음은 쉬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서로 상승작용을 해서 믿음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항상 이 네 가지가 잘 구비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기 십상입니다. 이 네 가지 중 하나 이상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믿음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공부를 잘하는 딸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학교를 졸업한 뒤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2년을 연거푸 아깝게 떨어졌습니다. 3년째가 되자 부모가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딸! 믿는다!”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너를 믿는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말라는 강한 요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저 딸이 잘 되기를 바라는 욕망뿐입니다. 그 욕망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욕망의 대상), 믿을만한 근거는 있는지(기존의 믿음) 모두 불확실합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실행능력). 결국 바라는 마음, 즉 욕망만 너무 강하다 보니 그것을 믿음으로 착각해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저 욕망만 있을 뿐 다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욕망 자체를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욕망이 강하다보니 그 자체가 의지를 만들어 내는 상황이고, 그런 상황을 믿음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오류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과 실행능력까지 제공해 줄 것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일상이 갑갑한 사람의 예로 설명해 봅시다. 억지스럽긴 하지만, 사는 게 너무 답답했던 그 사람은 자기 전에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저를 이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구해주소서!”
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제주로 여행을 가면 너의 모든 답답함이 해소 될 것이다. 조만간 너에게 돈이 생길 것이고, 휴가도 수월하게 허락받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말한 곳을 숙소로 정하고 휴가를 즐기도록 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신의 계시를 받기 전에는 그저 욕망하기만 했을 뿐인데, 꿈속에서 계시를 받고나서는 무엇을 해야 할 지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믿음을 끌어내는 욕망 외 다른 요소들을 신이 모두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을 과대평가한데서 오는 오류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욕망하기만 할 뿐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지 못하여 욕망이 과도하게 커져버린 상황이 만든 결과입니다. 신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욕망이 비대해져 버린 상황이 문제입니다.
세 번째, 과학과 공신력에 대한 맹신
과학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이유는 과학이 가진 합리성, 객관성, 검증가능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이기만 할 뿐 이러한 요소들이 결여된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하버드 의대의 실험에 의하면 소통이 원할한 부부가 오래 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는 내용의 신문기사가 있다고 합시자. 흔히 보는 기사 패턴의 중의 하나입니다. 저명한 대학에서 실험했다고 하니 필시 과학적일 거라고 단정지어버립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과학적인 권위로 포장했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믿음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허술한 기사도 별 의심 없이 믿곤 합니다.
공신력에 대한 맹신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갑니다. 현대인들은 활자화된 것은 무조건 믿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나마 추천사이트나 맛집 같은 것은 그럴싸한 형식과 내용이라도 갖추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온갓 검증되지 않은 기사들에도 사람들은 쉽게 믿음을 가집니다. 오직 그것이 활자화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일이 생깁니다.
네 번째, 실행능력의 오류
실행능력의 오류는 곧 자신감의 오류입니다. 자신감은 자신을 정확히 알아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실행능력을 올바로 판단하기 힘듭니다. 근거도 없이 내세우는 자신감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대로 반복되는 실패로 인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역시 자신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양극단에 치우치면 제대로 된 믿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은 정보가 아니라 정보가 가리키는 실체에 있다는 사실을 자신감에 적용해봅시다. 자신에 대한 온갖 정보, 즉 자신의 성격, 취향, 체질, 가치관 같은 것은 나의 정보에 불과합니다. 이런 정보를 잘 안다고 해서 자신감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에 경복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직접 서울로 가서 현실에 존재하는 경복궁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 나옵니다. 경복궁에 대한 지식을 안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행동하는 나 자신입니다. 그런 나 자신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이 나의 정보가 가리키는 나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 즉 나에 대한 믿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표현을 바꾸자면 자신감은 자기성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 관한 정보만으로 자신감을 채우려는 것은 자만심에 불과합니다. “나는 좋은 대학에도 합격했고, 항상 최상위권에 있었으니까, 이번 시험에도 잘 될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에 가깝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믿음의 오류는 하나의 믿음은 반드시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믿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믿음을 찾아야만 하기에 근거도 부족하고 맹목적이어도 쉽게 믿고, 거짓된 믿음일지라도 기대고 의지하게 됩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올바로 성찰하지 못하여 믿음의 4대 요소 중 욕망과 나머지가 제대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의 오류가 발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