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재일이란 무엇일까요? 관음재일(觀音齋日)이라는 네 글자를 들여다보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찰에서는 관음재일, 지장재일, 열반재일, 출가재일 등 재일(齋日)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과연 재일이란 무엇이고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도록 공부해보겠습니다.
재일(齋日), 공양을 올리며 의식을 치르는 날
재일은 ‘재 의식을 치르는 날’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재를 치른다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관음재일은 관세음보살님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날일까요? 뭔가 이상합니다. 절집에서 재라고 하면 주로 천도재를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이날이 관세음보살님을 천도하는 날이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에서는 재(齋)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말이 많습니다. 천도재, 영산대재, 수륙대재, 팔관대재 등의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천도의식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원래 재라고 하는 말은 사찰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서 치르는 의식을 아울러서 통칭하는 말입니다. 불공도 재에 포함되고, 영가천도를 하는 천도재도 이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영가천도를 할 때 쓰는 ‘제사’라는 좁은 의미의 말을 주로 사용하다보니 넓은 의미의 재가 다소 퇴색된 측면이 있습니다.
재의 원 뜻을 살려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관음재일이란 관세음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면서 의식을 치르는 날입니다. 열반재일하면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을 기리기 위해서 의식을 치르는 날이지요. 지장재일은 지장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면서 의식을 치르는 날로 특별히 영가천도재를 같이 지냅니다. 이런 식으로 재일이라는 것은 특별히 의미가 있거나 기념할만한 날 불보살님께 의식을 치르는 날을 뜻합니다. 이렇게 재일이라는 원뜻을 알고 나면 불교의식을 헷갈릴 일이 없습니다.
관음보살, 중생의 소리를 관법수행하는 보살
재일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으니, 다음은 관음(觀音)이라는 두 글자를 살펴보겠습니다. 관음은 관세음보살을 의미합니다. 왜 관세음보살일까요?
보살이란 깨달을 각(覺)에 중생 생(生) 즉 깨달은 중생을 뜻합니다. 보살의 원음인 보디사트바 역시 말 그대로 번역하면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찌 이 가련한 중생들을 두고 사바세계를 홀로 떠나겠는가, 영원한 윤회의 굴레를 어찌 나 혼자만 벗어나겠는가, 중생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어서 해탈할 때까지 중생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볼 관(觀), 세상 세(世), 소리 음(音)을 써서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보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관세음보살님은 사바세계 중생들이 내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계시다가 그의 근기에 맞도록 제도해주시는 분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의 소망의 소리와 고통의 소리를 모두 ‘듣는’ 분이라면 볼 관(觀)이 아니라 들을 청(聽)이나 들을 문(聞)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관세음보살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청세음보살이나 문세음보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여기에서 ‘관’이란 관법 수행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관세음보살님은 중생들의 모든 고통을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수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음은 중생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내는 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법수행을 할 때는 여러 가지를 대상으로 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관찰하고 귀로 듣는 것을 관찰하고 피부로 느끼는 것을 집중해서 관찰하는 것이 관법수행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걷고 있다고 하면 이것은 수행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걸으면 그냥 걷는 것입니다. 걷는 것이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 하나하나를 관찰해야 합니다. 발걸음을 하나하나를 관하면 걷는 것도 수행이 됩니다. 버스를 탔는데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고 합시다. 이 때 앞에서 나는 소리를 집중하여 들어서 짜증이 난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반면 소리를 듣는 내 마음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수행이 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지금 현재 세상의 모든 소리를 대상으로 관법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세음이라 함은 중생들이 내놓은 소리이고, 중생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고 남도 포함돼 있으며 관세음보살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은 보살님이기 때문에 나와 남의 경계 없이 중생의 모든 소리를 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대목은 이렇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오온이 공한 것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 봅니다. 어스름할 때 불을 환하게 비춰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아 대상을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어디에 계실까?
관세음보살은 어디에서 수행하고 있을까요? 관세음보살이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들의 소리를 관하는 수행을 하고 있다면 어디에서 하고 있을까요? 넌센스입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관음전입니다. 전국 사찰에 관음전이 얼마나 많으며 관음사라는 절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고 수행을 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수행의 힘으로 우리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관세음보살은 어디에서 수행하고 계실까요? 믿음의 대상인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고려시대 나옹스님은 아미타 수행법을 묻는 여동생에게 이런 게송을 지어 답했습니다.
아미타불제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마음머리를 단단히 붙들고 잊지 말고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 생각이 이어지다보면 결국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나니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자색 금빛을 내는 상서로운 빛이 육문에서 나오리라
나옹스님은 이 게송을 통해 여동생에게 아미타 정근을 하면서 삼매에 드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생각을 잊지 말고 마음머리에 붙들어 매야 한다고 말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계신가요?’라는 질문을 입으로는 하고 있지만 머리에서는 마음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심두에 둔다는 말은 염두에 둔다는 것, 화두로 삼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을 내뱉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를 거쳐야 합니다. 그 머리 자리에 무언가를 가져다 놓으면 말이든 생각이든 항상 그것을 거쳐서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항상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고 염불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무궁무진하게 하다보면 이윽고 생각이 없는 곳 즉 무념처에 이릅니다.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는 다는 것을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자식이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고 합시다. 부모 입장에서는 무슨 생각이 들까요? ‘도대체 얘가 왜 이랬을까?’, ‘왜 잘 나가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라졌을까?’ 계속 이 생각을 하다보면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밥 생각도 안 나고 잠도 안 오고 하루 종일 ‘왜 그랬을까?’, ‘얘가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아미타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나, 관세음보살님이 어디에 계시나를 생각하다보면 다른 생각들은 다 없어져버리고 그럴 때 비로소 내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있다면 관세음보살님이 어디에 계시고 아미타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할 때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내가 아미타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님입니다.
‘왜 중생이 보살일꼬…’ 마음머리에 붙들어 메면
수학 문제를 증명할 때는 정답이 아니라 풀이과정이 중요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기에 내가 계속 중생으로 있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어디에 계신가요? 내가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데 왜 내가 관세음보살인가요? 이런 의문을 머릿속에 품고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 비로소 깨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불교에 입문할 때 소원성취를 바라면서 기도를 하고 공양을 올립니다. 또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은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기에 시험합격이라든가 사업성공이라든가 건강 등의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비록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잘 알고, 내가 관세음보살일까 하는 생각을 놓지 않고 이어가다 보면 반드시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 달에 한 번 오는 관음재일에 열심히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기를 바랍니다.
덧붙여 언제나 강조하듯이 기도란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으니까 관음정근을 좀 해야겠네.’ 혹은 ‘오늘은 기분이 나쁘니까 정근도 하기 싫어.’ 라고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굳이 관음재일, 지장재일, 신중기도 날을 정하는 것은 규칙적으로 하기 위함입니다. 좋으나 싫으나 재미있으나 재미없으나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매일은 못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수행을 하자 하는 의미를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