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동지죽 동지의식
동지는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밤이 길면 어두운 기운이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삿된 기운을 몰아내는 붉은 팥으로 죽을 쑤었습니다. 이 죽을 집 주변에 뿌리면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었지요.
밤이 가장 길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이제는 낮이 길어질 일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합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음력 1월 1일을 한 해의 시작으로 치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해의 시작은 동지로부터 시작합니다. 해가 가장 짧은 날로부터 해가 점차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새 해를 맞이하는 날 동지죽을 지어 먹고 팥을 뿌리는 특별한 행위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나름대로 올 한 해를 어떻게 살 것인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지요.
과거와 달리 요즘은 절 밖에 나가면 동지를 기념하는 일이 드문 것 같습니다. 오늘이 동지인지 모르고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지만 ‘그래도 동지니까’ 하며 죽 한 그릇을 사먹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오늘 절에 오신 여러분처럼 절에 모여 같이 동지기도를 하고 동지죽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도 있지요.
세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오늘 하루를 더 의미 있게 보냈을까요? 제가 볼 때는 그래도 세 번째, 여기 계신 여러분이 동짓날을 알차고 의미있게 보냈을 것 같습니다. 똑같은 일상을 나만 생각한 채 보낸 것보다 한 시간이라도 나와 우리 가족,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없기를 기원하는 시간을 가졌으니까요.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낸다는 말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낸다는 말이고,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곧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가는 행위에 다르지 않습니다.
“스님은 왜 사세요?”
템플스테이에는 젊은 친구들이 주로 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차담을 하다가 물었습니다. “스님은 왜 사십니까? 저는 요즘 사는 낙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달라는 것이지요. 이럴 때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목적도 없다. 왜냐? 태어날 때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태어난 이유가 없으니까 사는 데에도 이유가 없다. 그냥 사는 거다.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택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목적이 있어서 죽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다 보니까 죽는 때가 오는 거다.”
이 친구가 재차 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유튜브에도 다 나오는 이야기고요. 그런 이야기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이 친구의 관심은 삶의 의미라기 보다는 지금 나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불만족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좋은 직장에 취직했는데, 이 작장에서 뭘 하고 있는지 왜 다니고 있는지 왜 사는지를 모르겠는 겁니다.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스님은 왜 사세요?”가 아니라 “왜 나는 행복하지 못할까요?” 라고 물었으면 그에 대한 대답을 했을 텐데 말이에요. 본인 스스로가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나요?”
비슷한 맥락의 고민을 가진 다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이 친구는 게임을 개발하는 똑똑한 친구인데 열정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창업투자 지원을 받으려고 했는데, 심사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열심히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도 길이 막히자 막막하고 답답한 겁니다.
“스님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출가한 사람에게 그렇게 물어보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친구도 질문이 잘못된 겁니다. 노력하고 열정을 불태우는 삶에서 인생의 의미를 추구했는데, 열정만 가지고는 행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없었던 것이지요. 이 친구의 질문의 의도도 “스님. 제가 느끼기엔 요즘 제 삶이 너무 불행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인 것이지요.
또 다른 젊은 친구의 사례도 있습니다. “스님 저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기는 한데 하루하루가 잔잔합니다. 20대에는 열정적으로 살라고 하고, 저도 열정적으로 살고 싶은데 무엇에 열정을 쏟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열정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열정적으로 살아야지.’ 마음먹는다고 해서 없던 열정이나 에너지가 솟아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머리로 열정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때문입니다.
행복의 정의?
경우는 다르지만 결국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행복으로 귀결됩니다. 칸트가 말하기를 행복하게 살려면 첫째, 일이 있어야 하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셋째, 인생의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다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붙잡고 행복하냐고 물으면 “글쎄요. 별로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은데요.”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행복에 대해서는 심리학자 셀리그만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셀리그만이 주장하는 행복의 세 가지 요건은 첫째, 즐거움이 있어야 하고 둘째, 무언가에 몰입해야 하며 셋째,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각각을 뜯어서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무언가에 몰입하고 즐겁고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서 꼭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 자체의 실체가 불분명합니다. 무엇이 행복인지 애매합니다. 행복이란 ‘이것이 행복이다’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무언가가 아입니다. 행복은 아주 복합적인 무언가입니다. 만족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성취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되어 있는 상태이지요.
국어사전에는 행복을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서 허무한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냥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잖아요. 백과사전에는 조금 더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어떤 요구나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스러운 상태’ 마찬가지로 모호합니다. 행복을 한 하나의 표현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을 때.
보리와 행복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살면서 정말 행복한 순간이라고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2007년도에 당시 머물던 절에서 보리라는 이름의 개를 키웠는데요. 어느 가을날 보리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단풍 든 경치가 좋아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카메라를 들어야 하니까목줄을 놓았더니 보리가 자유롭게 뛰어다녔지요.
몇 년 뒤에 사진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당시에 찍었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단풍나무들 앞에서 보리가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당시에는 단풍나무만 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때 보리는 나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사진을 보는 순간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그대로 소환되면서 “아. 이때 나는 정말 행복했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은 이토록 주관적입니다. 사전에서 정의하듯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생의 본능과 생의 동력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어떻게든 살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인간은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데, 아등바등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어요. ‘살고 싶다’. 다시 말하면 생의 본능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가장 큰 힘입니다. 생의 본능이라는 원동력을 상실하면 스스로 살기를 포기하게 되지요. 우리 인간의 생의 본능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든 나는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지금 내 삶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 옵니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요. 행복감은 삶의 동력을 충전시키는 배터리와 같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나.’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지금 내 삶의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행복한 순간은 대게 무언가 원하는 바를 성취했을 때 오거나 혹은 어떤 집단 안에서 소속감을 느낄 때 찾아옵니다. 가까운 예로 새알 울력을 할 때 스님들과 신도 몇 분이 모여 앉아서 같이 웃고 떠들면서 즐겁게 일하는 순간에 우리 모두 행복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행복이 뭘까?” 이렇게 질문하지 마세요. 답이 잘 안 나오니까요. 대신 질문을 바꾸어 보십시오. “사는 게 이런 거지!”, “이런 게 사는 맛아니겠어?’, “사는 게 별거 있나. 이렇게 살면 되지.” 이런 말이 나올 때가 내가 진짜 행복한 순간입니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출가하여 고민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도 행복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는데 우리도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출가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왜 고통이 생기는 지를 알아야 하고, 고통의 실상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세상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아내야 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부처님이 출가한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치니까 행복이 자동으로 따라온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삶의 원동력을 충전하기 위해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