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비폭력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일을!’ 하고 경악하게 만드는 사건사고들이 전파를 탄다. 사회적 규칙을 어긴 죄로 사회적인 처벌을 받는 것과 별개로 범인을 향한 비방이 쏟아진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난 조건을 살펴야 한다. 그 사람에게 분노하기보다 그의 분노를 촉발한 조건에 분노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비방하는 마음자세는 무엇보다 내 안에 분노와 악의와 악업을 만들어내기에 내려놓아야 한다. 화를 내는 것은 악업이며 악업은 반드시 고통이라는 과보를 동반한다.
같은 조건에 놓여있더라도 내 안에 악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과로써의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악업을 키우는 대신 자비의 마음을 키우는 불자가 되자.

#분노, 알아차림, 자비심,

https://youtu.be/YHlEzqjZqEU

인면수심의 사건들, 그리고 분노

최근 뉴스를 통해 인면수심의 사건들이 전파를 타고 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갑질을 하여 경비원이 자살을 하는가 하면, 어린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여행용 가방 안에 감금했다가 자식이 사망에 이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9살짜리 아이가 학대를 견디지 못해 집을 탈출하는 일이 있었고요. 공무원이 폭행당하여 입원하는 일, 마스크 착용 지시를 거부하면서 버스기사를 폭행하는 일 등 폭력적인 사건이 부쩍 많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생명 경시 사상이라고 하지요. 책이나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말입니다만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며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 생명체인 우리는 다른 생명을 경시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왜 생명을 존중하기보다는 무시하는 경향을 띱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인 인간이 생명 경시하는 배경?

한 과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우주는 대부분 생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우주에서 일반적인 모습은 생명이 없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인간과 같이 생명을 가진 것이 우주적으로 보면 비정상이며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지요.

현대과학에서는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원소주기율표는 무생물로 이뤄져 있으며, 생명을 가진 우리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다만 원소의 결합일 뿐 어디에도 생명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원소의 집합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동물입니다. 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해야 합니다. 고기를 먹는 육식은 물론 풀도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모든 동물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서 그 시체를 섭취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볼 때 인간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은 일견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경시하는 일을 벌인 사람들은 사회적 규칙, 즉 법을 어겼으므로 사회로부터 격리됩니다. 그들이 처벌받는 것은 그런데 단순히 우리가 놀라고 경악할만한 일을 저지른 ‘인간 말종’이라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어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호불호에만 의해 심판받는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처벌받겠지만 법을 어겼을 때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처벌을 받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그때 사람들의 마음에는 증오와 비방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사회적 처벌을 받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 사람의 화를 부추기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비방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남을 해치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불이 다른 것들을 불태우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과 같다.” 불에게 화를 내봐야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비방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방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문제를 그 사람만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 데에 어떠한 조건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분노하지 말고 그의 분노를 촉발한 것(조건)에 분노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입니다.

사회에서 법과 처벌을 만든 것은 비록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조건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가 인내와 의지를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게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은 결과로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을 때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법과 처벌의 행간을 잘 읽어야 합니다. 죄의 조건을 따져야지 죄를 저지른 사람 자체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분노와 자비심 사이

빨덴 갸초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티벳의 독립을 꾀하다가 30년간 옥살이의 고초를 겪으신 스님입니다. 이 스님이 갖은 고생 끝에 티벳을 탈출하여 달라이라마가 계신 인도 다람살라에 당도했을 때, 달라이라마 존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습니까?”

그때 빨덴 갸초 스님이 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 안의 자비심을 잃을까봐 가장 힘들었습니다. 중공군들이 나를 고문하고 회유하고 협박할 때 내 안의 자비심이 사라지고 증오와 분노가 일어날까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같은 조건에 놓여있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그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질렀을 때, 단순히 그의 행동에 분노하기보다는 그가 그런 일을 하게끔 한 조건에 눈길을 주어야 합니다.

비방, 내 안의 분노를 키우는 것

비방하는 마음자세를 내려놓으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비방하는 것을 멈추어야 할까요? 내 안의 분노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악을 지향하는 마음은 필히 자기 자신에게 더 큰 해악을 가져옵니다. 내가 내 안에 분노를 만들지 않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남이 나에게 화를 내게 하는 조건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폭력과 화로 응대하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화를 내는 것은 누군가를 때리기 위해 불에 달군 막대기를 드는 것과 같다. 맞바람을 향해 재를 뿌리는 것과 같다.”

남을 때리기 위해 불에 달군 막대기를 든다면 그 어떤 것보다 먼저 내 손이 다치게 되어 있습니다. 맞바람을 향해 재를 뿌린다면 그 재가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내 얼굴이겠지요. 이렇게 내 안에 악의를 품지 않는 것, 분노를 품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화를 내는 것은 악업입니다. 악업은 반드시 언젠가 나에게 과보로 돌아옵니다. 한 번 화를 내면 언젠가 그에 따른 과보를 받게 됩니다. 당장의 불쾌한 감정이 미래에는 고통이라는 업보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속으로 혀를 찹니다. ‘아이고, 저렇게 의지가 박약해서야 어떻게 하겠나. 담배 하나도 못 끊고 말이야.’ 하고요. 만약 부처님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본다면 똑같이 생각하고 연민할 것입니다. ‘저렇게 툭하면 화를 내고, 화에 끌려 다니니 그야말로 화(분노) 중독자구나!’

분노의 조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폭력이라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증오와 악의가 일어난 결과입니다. 내 안에 악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과로써의 폭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법구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정복했을 지라도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자, 그가 더 고귀한 승리자다.”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수천수만 명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내 안의 분노, 내 안의 번뇌, 내 안의 중생심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자신과 싸울 때 부처의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부처님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모두 부처님께 귀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때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님이 와서 음식을 차렸는데 손님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입니까?”
“손님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주인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나에게 온갖 욕과 모욕을 주었을 때 내가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군가 비방과 모욕을 주었을 때, 당사자가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말을 뱉은 사람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부처님 전생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일국의 왕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자비심이 넘쳤던 이 왕은 이웃나라가 공격을 해왔을 때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성문을 열고 스스로 감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웃나라 왕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러한 왕의 행동에 감명을 받아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악업을 키우는 대신 자비의 마음을

그런데 부처님 당시의 현실은 어땠습니까? 전쟁의 상황에서 자비심을 선택했던 석가족은 몰살을 당했습니다. 또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만약 강도가 칼을 들고 우리 집에 들어와 내 아이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 때도 자비의 마음과 연민의 마음으로 강도를 대할 수 있겠습니까?

고타마 싯다르타도 깨닫기 직전에 이러한 유혹과 맞닥뜨렸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려 하자 마왕 파순이 여러 가지 유혹을 만들어내고, 마지막으로는 부처님을 전륜성왕으로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전륜성왕이 되면 범죄와 가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지요. 강력한 동맹을 통해 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전륜성왕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전륜성왕일지라도 감각적 쾌락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고통을 야기하므로 굴레에서 벗어난 자는 그런 방향으로 끌릴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온갖 고초를 당해도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는 것이 출가자입니다.

분노하지 말고, 인내하고 할 때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참는 사람만 당하는 것 아닙니까?!”

좀 당하면 어떻습니까. 나나 내 가족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안 될 일이지만 그 수준이 아니라면, 타인의 분노를 받아서 내 안에 분노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경전에서는 화를 낼 수 있는 조건에 처해서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하고, 상대방을 모욕하고, 학대하고, 악의를 품는 자를 ‘인간 말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조건 생 조건 멸입니다. 화나 폭력, 악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명을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조건에 놓였을 때 그 조건에 끌려 화를 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법구경 게송을 함께 독송하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분노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악은 선으로 다스리고 인색한 사람은 보시로 다스리고 거짓말쟁이는 진실로 다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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