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문화다 (미얀마 성지순례)

불교가 국교인 미얀마에서는 출퇴근길에 자연스럽게 법당을 참배하고, 생일이나 기념일 등 삶의 순간에는 어김 없이 불교와 함께 한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특별한 종교의식이나 신앙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문화에 가깝다.
종교가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근현대 역사의 질곡을 겪으며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여 기존에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던 도덕과 윤리 같은 덕목이 희미해져버렸다.
불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일상의 문화가 되도록, 내 삶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공동체, 기도, 수행, 의지, 희망

미얀마 성지순례 (1)

지난 4박6일 동안 미얀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해서 오늘부터 이어지는 세 번의 법문 동안 미얀마 성지순례기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미얀마는 조용하고 깨끗한 인도입니다. 인도에 다녀오신 분들은 바로 감이 올 겁니다. 아마도 그 나라 자체가 불심이 깊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미얀마에 가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원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절인데, 신도들이 참배하는 사원과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장소 자체가 따로 있습니다. 예를 들면 증심사가 참배하는 사원이라면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은 원효사 쯤 되는 곳에 따로 있는 식입니다.

누구나 참배할 수 있는 미얀마의 사원

사원에는 스님이든 재가자든 일반인이든 관광객이든 심지어 개나 고양이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참배하고 공양 올릴 수 있습니다.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리고 가는 사원마다 우리로 치면 신도, 재가불자들이 많건 적건간에 부처님 앞에서 명상하고 독경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식당의 한쪽 벽에는 가족들의 기념사진이 걸려있는데, 삶의 순간마다 불교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불교가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얀마는 절이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을에 함께 있습니다. 동네마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있습니다. 미얀마를 가기 전에는 불심이 깊은 나라라고 하니 불자들도 우리식으로 철야기도를 하고 절을 하고 경전을 외우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실제 가서 본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출퇴근길에 참배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오래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자연스럽게 명상하고 독경합니다.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묻어납니다. 말하자면 미얀마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문화에 가까운 것입니다.

미얀마의 불교, 신행이라기보다 문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무엇입니까? 명절이 되면 외지에 나가 있는 가족들이 다 집에 와서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이것은 당연히 하는 것이고 꼭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그렇습니까?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니까 그냥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미얀마의 불교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명절에 성묘하는 것이 우리 문화이듯이 미얀마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사원에 들러 참배하고 부처님께 꽃을 올리고 스님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문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절에 가고 기도하고 공양올리고 보시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신행활동, 종교활동입니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그게 그냥 문화입니다. 미얀마도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입니다만 워낙 불자가 많다보니 불교식으로 생각하고 불교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된 것입니다. 이게 제가 미얀마에서 가장 크게 느낀점입니다.

한국의 불교, 일상 문화가 아닌 특별한 종교활동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가 없는 사람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대도시는 종교 없는 사람이 60%를 넘어서고, 광주의 경우 불자는 인구의 10%에 불과합니다. 등산객 10명이 증심사 앞을 지나간다고 하면 그 중 6명은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고, 그 중 2명은 교회에 다니고, 다른 1명은 성당에 다니고, 남은 1명은 불자입니다. 그런데 불자라고 해도 절에 가는 지는 모릅니다. 말하자면 그 10% 중에서 재적 사찰이 있는 사람은 60%에 불과합니다.

한국에서는 절에 가고 기도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아니라 남들은 안 하는데 시간을 내어서 부득불 하는 종교활동인 것입니다. 이것이 미얀마와 우리나라 불교의 첫 번째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모습이 올바른 종교의 모습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종교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종교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 꾸미는 말을 모두 제하면 ‘종교는 문화’로 요약됩니다. 어떤 문화인가 하면 믿음을 매개로 하여 인간생활에서 나타나는 고뇌를 해결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문화입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정 집단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문화가 되려면… 도덕과 윤리 기준 되어야

종교가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성향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안정을 추구합니다. 뭔가 일정하게 유지되면 안정감이 있는데 뒤죽박죽 늘 다르면 안정감이 없습니다. 안정감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가 굳이 판단하지 않아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그대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이 있으면 살아가는 데 불안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도덕이고 윤리입니다. 공통된 생각이 모여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 도덕과 윤리는 우리 삶의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종교는 이와 같은 공통된 기준을 만들기 위한 바탕이 됩니다. 믿음이라든가 절대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공통된 생각을 하도록 이끌어내는 것이 종교가 지닌 역할 중 하나입니다.

종교는 도덕과 윤리의 바탕이 됩니다. 모든 사회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서구는 100% 그랬습니다. 과거 서양은 모든 것을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행했고, 지금도 이슬람교는 중동국가에서 그렇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동아시아에서는 종교가 아닌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교가 사람들에게 공통된 행동을 이끌어내는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현대 종교의 역할이라 함은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며 우리 삶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미얀마는 아주 종교적인 국가입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바탕이 되어서 도덕과 윤리가 세워지고 그 기준에 따라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미얀마는 종교라는 틀로 살아가는 종교적인 국가이며 일상에서 종교가 문화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근현대 역사의 질곡 겪으며 증발해버린 윤리적 덕목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할까요? 역사의 곡절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습니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야 어른도 보이고 공경하는 마음도 생기고 예절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을 비롯해 몇 번의 분란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화두였고 1970년대까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몇 십 년을 살다보니 우리들 삶에 내재되어 있던 도덕이나 윤리 같은 덕목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서양의 경우 종교가 삶의 모든 것을 관장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금의 종교로 자리잡기까지는 과학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삶의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역할을 종교가 했는데 과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의 원리를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파헤치게 됩니다. 종교에서 담당하던 진리를 추구하는 역할을 과학이 가져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중세 이후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신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철학이 대두됩니다. 그 전에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은 사악한 욕심이라고 종교에서 가르쳤는데, 살아보니까 정당한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면서 경제활동이 종교에서 또 떨어져 나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도 종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전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였다가 많은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오로지 신앙, 믿음 하나만 남은 것입니다.

도덕의 기준 아닌 기복의 대상이 된 불교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사상이 도덕과 윤리를 지탱해줬는데 전쟁을 몇 번 겪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돈 버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까 그것을 따질 정신이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종교를 신앙으로써, 믿음으로써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 종교가 교회에서나 절에서나 우리 자식 합격시켜달라는 식의 기복신앙으로 나타나고, 혹은 어떤 영적 체험을 강조하다보니 일반인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마을공동체가 무너진 후 도덕이나 윤리 대신에 우리들을 지탱하는 것은 돈과 능력과 법입니다. 능력은 곧 돈입니다. 자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돈 많이 벌라고 다그치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인간답게 살라든지 보시를 많이 하면서 살라고 교육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던 충효사상에 바탕한 도덕 윤리가 아닌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이 말은 곧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남에서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요즘 우리들의 윤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 우리에게 종교가 없다고 하면 염치가 있어야 합니다. 염치라는 것은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워 할 줄 알고 남에 대해서는 체면을 차릴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번듯해야 하며 정신적으로 내 자신을 단련시켜야 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염치만 있으면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돈만 있으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 같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 마을 사람들을 미우나 고우나 보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람을 거치지 않아도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염치가 없어도 사는 데 별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럴수록 염치만 있어도 이 세상을 보다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다면 불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결국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미 답을 하셨습니다. <금강경>은 수보리의 질문과 부처님의 대답으로 이뤄졌습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들을 한 마디로 줄이면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부처님이 대답하기를 모든 중생들을 다 제도하겠다는 마음으로 살라 합니다. 이 말은 자비심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느 한 중생도 제도하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공성을 체득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두 가지로 제시하셨습니다. 자비심과 공성입니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천 지침도 설했습니다. 오계입니다.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술 마시지 않는 것이 자비심과 공성을 실천하는 지침입니다. 이 오계의 심오한 뜻을 파헤치기보다 액면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 교리가 일상 문화가 된 미얀마를 보다

미얀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모기를 죽이지 않고 쫓아낸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제가 처음 머리 깎고 신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송광사에서 새벽예불을 하면 모기가 엄청나게 무는데도 모기를 잡지 않는 겁니다. 어느 날은 큰방에서 스님들이 모여 독경을 하는데 모기를 쫓으려고 손을 휘둘렀다가 본의 아니게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내가 살생을 했구나 하고 자책하고 괴로워하고는 했습니다. 이제는 희미해진 감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얀마 사람들은 그게 일상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문화입니다. 살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경전을, 계율을, 큰스님 말씀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그저 부처님이 살생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살생 안 하는 것이고 그래서 모기도 웬만하면 잡지 않습니다.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의 오계가 우리들의 도덕이고 윤리가 되지 못하다 보니 살생에 대해서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게 종교가 일상에 파고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차이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미얀마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매일 얻어먹고 사는 스님들이 그렇습니다. 보시 받는 우리가 당신 복을 지어준다는 겁니다. 비구는 복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을 지을 수 있는 밭이라는 말입니다. 미얀마에서는 일반인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불교적인 공양, 보시문화가 사회 전반적인 문화로써 자리 잡고 있는 예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불교는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복신앙을 하고, 어떤 사람은 수행의 도구로 삼고, 어떤 이는 교리를 공부하는 등 일정 부분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문화여야 합니다. 삶 속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미얀마같이 인구의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사회가 아니라 10명 중 1명만 불자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를 인정하되 ‘나는 불자다’라는 생각을 스스로 가져야 합니다. 절에 들어올 때는 불자고 절을 나가는 순간 내가 불자라는 생각이 지워지면 그건 불자가 아닙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오계를 좋아서 지키거나 싫어도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히 하는 문화가 아니기에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길입니다.

“부처님, 말법세상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질문했습니다.

“미친 코끼리와 미친 사람, 미친 수레가 항상 우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나는 이 미친 것들과 함께 살고 함께 죽으면서 부처님의 법과 승가를 생각하기를 잊어버릴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어서 어디에서 태어날까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는 불자인데 이 세상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도 비슷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큰 나무가 동쪽으로 기울어있을 때 그 밑동을 베면 어디로 넘어지겠는가?”

“동쪽으로 넘어집니다.”

“너도 그와 같아서 목숨을 마친 뒤에도 나쁜 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너는 오랫동안 부처와 법과 승가를 생각하기를 닦아 익혔고 오랫동안 믿음과 계율, 보시를 닦아 익혔기에 목숨이 다한 뒤에는 과보를 받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또 호수에 빠진 기름단지의 비유를 듭니다. 기름단지를 호수에 빠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단지가 바닥에 가라앉아 깨지더라도 기름은 위로 떠오릅니다. 이처럼 불법승 삼보를 믿고 계율과 지혜로써 살았다면 목숨이 다한 뒤에는 단지 속 기름이 물 위로 떠오르듯이 비루하고 나쁜 곳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더라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된다고 안심시킨 것입니다.

“계행을 지키고 믿음을 갖춘 재가신도가 되어라”

마하야마가 이 말을 듣고 믿음이 생겨 다시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재가의 신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라.”

“삼보에 귀의한 재가의 신도는 어떤 계행을 갖춰야 합니까?”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은 빼앗지 말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곡주와 과일주 등 취기 있는 것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재가의 신도가 믿음을 갖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재가신도가 믿음이 있다면 마땅히 열 가지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은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이다. 지혜와 덕행을 갖추신 분이다. 바른 길로 가신 분이다.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분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분이다. 사람들을 잘 길들이시는 분이다. 신들과 인간의 스승인 분이다. 깨달은 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다.”

“세존이시여, 계행을 지키고 믿음을 갖춘 재가신도가 보시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재가의 신도는 마음속에 인색함의 때를 제거하여 지혜를 베풀고, 손을 정화하여 보내버림을 기뻐하고 구걸에 응하여 보시하고 나누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불교가 삶이자 문화인 미얀마를 다시 보며…

우리는 미얀마를 가난한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보면 가난합니다. 그런데 미얀마가 7년 연속 세계에서 자국 내 기부를 제일 많이 하는 나라 1위로 꼽혔다고 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보시를 많이 하는 나라 1위라는 겁니다. 돈을 1000만 원 버는데 10만 원 보시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자기가 번 것 중에 보시할 수 있는 만큼을 일상적으로 보시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이죠.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를 하자면 간단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미얀마는 불교가 그들의 삶이고 문화입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펴기 위해서는 종교가 삶이 되고 문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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