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가 궁금해! 귀신은 있다? 없다?

백중은 영가님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는 불교의 명절이다.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돌아가신 영가님이 실재한다고 전제하는 바, 영혼의 유무와 귀신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있다고 믿자니 찝찝하고 없다고 치부하자니 무언가 미덥지 않은 ‘귀신’의 존재!
귀신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귀신이라는 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 마음이 만들어내고 마음이 상을 키운다.

#극락, 알아차림, 제사, 죽음, 천도재

https://youtu.be/smjMx32fF3k

기독교인인 장남 대신 막내딸이 제사 지내도 되나요?

오늘은 그동안 여러 신도분들과 나누었던 질의응답을 바탕으로 제사와 49재 등 백중과 관련한 기초적인 궁금증을 해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테면 신도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오빠는 멀리 사는데 새언니가 독실한 신자라서 돌아가신 부모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오빠도 제사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식으로서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저는 딸인데 제사를 지내도 됩니까?”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사를 지내는데 제주를 누구 이름으로 해야 합니까? 장남 이름으로 해야 합니까? 실제 제사를 지내는 딸 이름으로 해야 합니까? 답하자면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내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제일 위에 이름을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지내느냐에 따라 제주가 정해지는 겁니다.

또 흔한 질문 중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기제사를 어디까지 합쳐도 됩니까? 저희 시아버지 말로는 어릴 때 병에 걸려서 돌아가신 분이 먼 친척 중에 있다고 하는데 그분이 언제 돌아가신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족 기제사를 지낼 때 그 분을 같이 모셔도 됩니까?”

답하자면 같이 지내도 됩니다. 엄밀하게 따져서 기제사는 말 그대로 기일에 지내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합치겠다’고 한 순간부터 그 룰을 깬 것입니다. 옛날에는 기제사를 일일이 다 지내야 하는 걸로 생각하고 한 달에 한 번씩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현실적으로 매번 달리 제사를 지내기 힘드니까 합치는 겁니다. 합치는 순간 ‘기제사는 기일에 지낸다’고 하는 보이지 않는 관례가 깨진 겁니다.

그렇다면 기왕 지내는 김에 제대로 밥 한 끼 못 얻어먹은 영가님들도 같이 제사를 지내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기제사와 천도재의 경계가 갈수록 애매해지고 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일반 집안에서도 대부분 제사를 합쳐서 일 년에 한 번 지냅니다. 천도재나 다름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를 모신다고 하는 그 자체입니다.

시댁과 친정 제사를 함께 지내도 되나요?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시댁 조상님들 기제사를 지내는데 친정집 제사를 같이 지내도 됩니까?”

이것 역시 정해진 규칙은 없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데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나라 법에 <제사에 관한 특별법> 같은 것이 있어서 ‘기제사는 위로는 몇 대 밑으로는 몇 대까지 합칠 수 있다’ 혹은 ‘기제사는 기일에서 며칠 안팎으로 날짜를 조절하는 것은 허용한다’ 혹은 ‘기제사에 외가를 같이 모시는 것을 허용한다’ 등으로 정해져 있으면 법대로 해야지요. 이런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스님에게 와서 묻고는 합니다. 왜일까요. 뭔가 모르게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말입니다. 같이 지내도 된다고 배우자와 합의하고 자식들과 상의하면 됩니다. 다만 가족 간에 이견이 있으면 못 하는 겁니다. 먼저 가신 분을 위한답시고 하다가 산 사람들끼리 싸움나면 더 안 좋은 일이니까 말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기제사는 무조건 따로 지내고 여자는 제사 지내는 방에 들어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에는 우리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유교적인 윤리와 도덕이 확실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교관념은 희미해지고 여권이 신장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옛날에는 너무나 당연하던 원칙들이 희미해졌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원칙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제사를 지낼 때 딱 한 가지 기준만 지키면 됩니다. 가족들의 합의입니다. 가족끼리 서로 토론하고 합의해야 합니다.

49재가 끝나면 영가님은 어디로 가나요?

49재에 관련한 궁금증도 있을 겁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49재를 치른 제주분이 차를 마시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49재가 끝나면 영가님하고 증심사하고는 어떤 관계입니까?”

질문의 요지는 49재가 끝났으니 영가님은 이제 어디로 가냐는 것입니다. 영가님이 지난 49일 동안은 증심사 대웅전 법당에 계셨을 텐데 49일이 지나면 어디로 가는지 말입니다. 제가 답하기를,

“100일째 되는 날과 1년째 되는 날, 3년째 되는 날 제사를 지냅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따르면 그렇게 3년이 지나면 영가님이 완전히 다른 몸을 받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서야 그 분이 진짜 궁금했던 게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불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른 몸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윤회를 떠올리는데,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몸을 받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기에 ‘극락을 가느냐, 지옥을 가느냐’ 즉 장소가 궁금한 겁니다.

극락세계, 서방정토는 어디에 있나요?

불교에서는 어디로 가냐고 물으면 극락세계, 정확하게는 서방정토로 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서방정토는 어디에 있을까요? 기천만 기천만 유순, 그러니까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48가지 대원을 세우신 아미타 부처님이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한편 아미타정토에 대한 불교의 해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서방정토가 있다는 해석입니다. 주로 일본 불교에서 주창합니다. 불교와 무관하게 기존의 민간신앙에서는 동서양, 어느 민족, 어느 시대 할 것 없이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인간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지금까지 나와 같이 있던 누군가가 더 이상 없다고 하면 상식적으로 ‘어디론가 갔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갔기에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후세계는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 속에 들어있습니다. 사후세계가 있냐 없냐를 떠나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 할 것 없이 다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불교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정토사상입니다. 열심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면 서방정토세계로 간다는 것이 정토사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심정토사상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고 내 마음이 정토이고 내가 있는 이곳이 극락이라는 사상입니다. 내가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으면 여기가 극락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정토사상 중에 어떤 것이 맞고 틀릴까요? 엄밀히 말하면 후자인 유심정토사상이 맞습니다. 우리나라 불교의 뿌리가 된 육조 혜능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곳이 극락’이라고 이야기했고, 근대의 성철스님은 ‘극락 그런 것 없다’고 한마디로 잘랐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굳이 서방정토세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워낙 대비심이 있는 분이라 방편으로써의 사후세계를 인정한 것입니다. 나이 많은 노인 분들은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하기에 굳이 부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여 아미타불 기도를 열심히 하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정되고 그렇게 수행력이 깊어지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올바른 불자의 길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사후세계나 극락세계를 굳이 부정하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인정한 것입니다.

앞서 제주분의 질문은 ‘민간신앙에 비춰봤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귀신인데 49일 동안 대웅전에 있다가 진짜 극락으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불자라면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고 ‘어떤 몸을 받느냐’ 하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귀신, 있나요 없나요?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은 실제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신이 없다고 배웠고 현대 상식으로도 당연히 없다고 하는데, 절에 와서 보니까 제사도 지내고 49재도 지내는 것이 꼭 귀신이 있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다. 미신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부정하기는 찝찝하고 인정하자니 께름칙합니다.

기실 이 질문은 상당히 복잡하고 애매모호하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신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려면 이 질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귀신은 있다? 없다?’

이 질문은 두 가지로 이뤄져 있습니다. ‘귀신’이라는 말이 있고 ‘있다’ 혹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제대로 알고 나서 질문을 다시 해야 합니다.

먼저 ‘있다’, ‘없다’라는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있다 없다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불교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붕어빵을 만들고자 할 때 붕어빵 틀에 밀가루 반죽을 넣고 팥을 넣고 뚜껑 닫고 익히면 붕어빵이 나옵니다. 틀만 있으면 붕어빵을 계속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온 붕어빵이 다 똑같습니까? 조금씩은 다릅니다. 우리는 붕어빵 틀에서 나온 각각을 모두 붕어빵이라고 부르지만 자세히 보면 붕어빵이 아니라 밀가루반죽 덩어리입니다. 그런데도 붕어빵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다른 예로 지금 제가 손에 요령을 들고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이것을 처음 본다고 하면 현관문 위에 다는 종 같기도 하고 소 목에 거는 워낭 같기도 합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 중 제일 비슷한 것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그가 ‘이것은 요령’이라고 이름을 알려주면 이것에 대한 궁금증이 끝납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 붕어빵을 찍는 틀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붕어빵 비슷한 게 보이면 그 틀에 맞춰보고 붕어빵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 머릿속에 그동안 없던 요령에 대한 틀이 하나 만들어졌다면 다음에 이걸 보면 아무 고민 없이 요령이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붕어빵을 붕어빵이라고, 요령을 요령이라고 말하게 하는 틀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여기에 붕어빵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게 무엇인고 뜯어보면 밀가루반죽이고 더 엄밀하게는 화학 원소로까지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붕어빵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있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틀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있다 없다라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이런 틀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불교 용어로 상(象)이라고 합니다. 일체(一切)라고 합니다. 일체는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세상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틀입니다. 당연히 일체는 유심조[一切唯心造], 오직 마음이 만듭니다. 있다 없다에 대한 감이 옵니까?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틀을 통해 이름 붙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실상입니다. 실상은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무변(無邊)합니다. 가장자리가 없으므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이것 자체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일체입니다. 일체란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을 ‘뭐다 뭐다’라고 이름붙이는 그 틀입니다.

그 다음 키워드는 ‘귀신’입니다. 귀신이라고 하는 것은 좀 애매합니다. 종류가 워낙 많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귀신은 영혼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영화에 나오는 아주 무시무시한 악령이나 사람이 아닌 괴물의 형상을 가진 무언가, 혹은 빗자루가 자기 혼자 날아다니는 현상 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귀신의 정의를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귀신의 정의는 내릴 수 없다. 다만 크게 말하면 영혼을 귀신이라고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것으로, 어떤 물건이나 나무, 바위, 이상한 형체가 사람을 공격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있는 겁니다. 이 자리에서는 전자, 즉 영혼으로써의 귀신이 존재하는 게 가능하냐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혼은 존재하는가?

우리가 귀신을 봤다고 하는 경우는 이런 상황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소리가 들리거나 흐릿한 형태의 뭔가가 지나간다든가 새벽에 대웅전에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머리칼이 곤두서면서 찬 기운이 느껴지는 것 등입니다. 이것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겁니다. 느끼는 몸뚱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귀신’이라는 틀을 정의내리기를 ‘영혼만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면, 육체가 없이 영혼만 존재하는 형태가 가능한가를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내가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지는 세계에 영혼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엄밀하게 이 세상에서 영혼만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영혼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앞서 말한 ‘있다’라는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귀신은 있는가?’ 라는 질문은 곧 귀신에 대한 마음 속의 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내가 마음속에서 어떤 것을 귀신에 대한 틀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백과사전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사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정의내리기가 힘듭니다. 이 말은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없다는 증거도 없기에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심리학계에서는 흔히 말하는 ‘귀신이 씌였다’고 하는 경우의 90%는 정신분열 증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만 나머지 10%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지는 못합니다.

비슷한 경우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신은 우리가 이미 머리 속에 만들어진 여러 개념들을 바탕으로 상상 속에서 창조한 것입니다. 나라마다 신에 대한 이미지 틀이 있고 그 틀에 부합한 상상의 존재를 만들었기에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신은 머릿 속에서 창조해낸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신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머릿 속에 개념으로 이미지로 설정된 것을 실세계에 그와 같은 모습으로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일체는 유심조다

영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있다’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낸 하나의 틀, 이미지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내 눈 앞에 무언가 있다고 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틀이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일체는 유심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혼이 내 마음속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 있다는 의미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혼을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이 질문은 결국 과학의 발전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은 불과 100년 전만해도 달의 뒷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귀신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귀신으로 보이고, 귀신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심이 생기고, 그런 느낌은 ‘귀신은 있다’는 생각을 더욱더 확실하게 합니다. 귀신이 있는가 없는가 따지기 전에 내 마음 속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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