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정초에 칠성기도를 합니다. 칠성기도라 해도 치성광여래를 주인공으로 모시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관례적으로 신중청을 할 때 칠성기도를 하곤 합니다. 올해는 제대로 칠성기도를 올리기 위해 사시불공 정근을 칠원성군 정근으로 했고, 축원도칠성단을 바라보고 했습니다.
칠성기도: 백성의 무병장수를
정초 칠성기도는 언제부터 행해졌을까요?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까지 정초 음력 7일이 되면 마을에서 칠성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요. 이러한 풍속은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시골 절에서 주지를 살던 제 경험에 비춰보아도그렇습니다. 시골 절 신도분들은 일 년에 네 번 절에 옵니다. 정초, 초파일, 칠석, 동짓날입니다. 정초 때는 언제나 7일이 되는날 오셔서 “부적 주세요.” 하는 겁니다.
정초에 절에 와서 부적을 받아가는 민간의 풍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불교가 인도에서 건너와 우리나라에 정착하면서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이라는 우리 민간신앙을 수용한 결과입니다.
칠성신앙은 우리 선조들의 삶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 칠월 칠석이었는데요. ‘럭키 세븐’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동양에서는 북두칠성, 칠성님 자체를 길한 숫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칠월 칠석은 날짜에 7이 두 개나 들어가니 엄청나게 길한 날이었지요.
그 날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일 년을 시작하는 정초의 7일이었습니다. 한 해를 열면서 우리 마을과 가족들의 무사안녕, 소원성취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민중에게 가장 친근한 칠성님에게 기도를 올린 것이지요. 이렇게 마을공동체에서 이어져온풍습이 절 안으로 들어와 오늘날의 정초 칠성기도가 되었습니다.
앞서 불교가 수용한 민간신앙으로 칠선신앙과 산신신앙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정초에 하는 기도가 산신기도일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왜 산신기도가 아니라 칠성기도일까.
밤에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비는 것이 바로 칠성기도입니다. 칠성기도와 산신기도는 태생이 다릅니다. 칠성기도는 수명 장수를 기도의 핵심으로 삼고 산신기도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일반 민중들에게는 생명을 관장하는 칠성님이자연히 더 가깝게 느껴졌겠지요. 특히나 옛날에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기에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했고, 전쟁에나간 남편이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는 칠성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완벽하게 불교화시켰습니다. 북극성은 치성광여래라 하고 좌우에서 일광보살과월광보살이 치성광여래를 보좌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 불보살님을 옹호하면서 우리들을 보살피는 일곱 분의 여래가 계시고그 외에 28명의 중요한 대신들이 있습니다.
산신기도: 국가의 태평성대를
산신기도는 그 뿌리가 인류 문명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문명에서는 파라오가 곧 왕이자 신이었습니다. 신이 온곳, 하늘을 숭배했기 때문에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어 제사를 지냈지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통칭한 아브라함교 계통에서도 하늘을 신성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잖아요. 아브라함 계통도 하늘을 숭배하는 데에서 출발해 하나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인도의 인더스 문명도 같았습니다. 부처님이 불교를 창시하기 전 인도사회는 바라문교(힌두교)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바라문교는 제사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한 종교입니다. 하늘에서 선신과 악신이 싸우는데, 인간들이 공양물을 태워서 연기가 하늘로올라가면 그 연기가 선신에게 힘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역시 하늘을 숭배한 것입니다.
중국의 황하문명에서도 하늘을 숭배한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우리나라로 치면 고조선 시대에 중국에서는 아주 정교한 청동 향로를 만들어 하늘을 숭배하는 데에 사용했고요. 중국의 황제는 ‘천자(天子)’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관계를 되짚어보아도 이런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 초까지 우리의 왕이 하늘에제사를 지냈지만, 조선 사대부들이 공자의 성리학을 숭상하면서 ‘오직 중국의 황제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고 우리 같은 속국에서 하늘의 제사를 지낼 수는 없다’는 상소가 빗발쳐 태종 때에 이르러 우리의 제단이었던 환구단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없어진환구단은 조선이 망한 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모든 문명에서는 하늘을 숭배했습니다. 산신신앙은 여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산이 하늘과 가깝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으로 여긴 것이지요. 하늘은 지배층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산신제는 일반 백성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왕들이 주체가되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부침에 따라 조선의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됨에 따라 산신신앙이 지배층의 영역에서 불교의 영역으로 흡수됩니다.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기댈 곳이 필요했습니다. 사찰은 절 안에 산신각을 지음으로써 백성들에게 기도를할 명분과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산신을 ‘절로 찾아온 손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일상 속 뿌리 깊은 풍습과 문화
풍습은 특정한 때가 되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곳에 가서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문화입니다. 때가 되면 어딘가에 가서 공을 들여야 하고 그걸 안 하면 불안한 것. 이것이죠.
여러분들이 정초 입재날 굳이 여기까지 오신 것은 ‘스님이 주는 복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초기도를해야 올 한해가 별 탈 없이 지나갈 것 같다’는 오래된 생각 때문입니다. 이렇듯 문화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화로서의 풍습을 이야기할 때마다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입니다. 저 어릴 적 기억에 할머니가 방한 구석에 조그만 상을 펴고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침저녁으로 무언가를 빌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칠성님께 우리 자식 손주들 건강하고 하는 일 잘 되기를 빌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해서 빌었다기보다는 평생을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안 하면 불안했던 것 같아요. 도시에서, 마당도 장독대도 없지만 무조건 해야만 하는 행위였던 것이지요.
그 옛날 우리 할머니 세대까지는 그렇게 일상에 뿌리 깊었던 칠성신앙이 이제는 희미해졌습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복지 수준이 높아지고 의료 기술이 좋아지면서 굳이 빌 이유가 없습니다. 예전만큼 절실하지 못한 것이지요. 지금이 나쁘다는말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습과 문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칠성기도는 기복신앙?
“칠성기도나 산신기도는 다 기복신앙이오.” 이렇게 말하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는 말입니다. ‘내가 빌 테니까 우리 자식 좀잘 되게 해주세요.’ 하는 것은 기복이 맞지요.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요, 기복이 거래는 아닙니다. 우리가 감히 치성광여래나 산신님하고 거래를 할 수 있습니까? ‘내가이 만큼 기도할 테니 나에게 이 만큼을 달라’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기도를 하는 것은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내 복을 쌓는 일입니다. 내가 복을 많이 쌓아서 그 복으로 내 주변 사람들도 잘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요즘 사람이나 옛날 사람이나 젊을 때는 먹고 살기 바빠서 절에 올 시간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시집을 가니까 시어머니가 틈만 나면 절에 가서 공을 들인다고 하는데 젊을 때는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시어머니만큼 나이를 먹어보니 시어머니 하던 대로 내가 하고 있는 겁니다. 나이를 먹으면 젊을 때처럼 뭔가를 적극적으로 일굴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스스로 복을 짓고 그 공덕을 아이들 앞으로 돌리는 것이지요.
오늘 정초기도 입재를 계기로 칠성신앙과 기복신앙의 관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복은 복을 쌓는 데에 의미가 있지 부처님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