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 왜 동지기도를 할까?

동지는 팥죽의 붉은 기운으로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세시풍속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와해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저 ‘팥죽을 먹는 날’ 정도에 그치고 있다.
동지는 오히려 수행공동체가 이어지고 있는 사찰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찰에서는 동지가 되면 함께 모여 동지울력을 하고, 당일에는 불보살님께 동지죽을 올리고 동지불공을 드린다.
사찰에서 동지를 챙긴는 이유는 사심 없이 웃으면서 일하는 봉사의 장을 만들기 위함이고, 나 혼자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내 가족과 우리 사회를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함이다.

#공동체, 기도, 봉사, 수행

동지, 삿된 기운을 쫓는 날

동지(冬至)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낮이 가장 짧다는 말은 태양이 이제 막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세상을 비추는 태양 즉 양의 기운이 태어나는 새로운 시작의 날입니다.

동시에 동지는 음의 기운 즉 삿된 기운이 가장 강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삿된 기운을 물리치자는 의미가 동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팥죽은 붉은색입니다. 전통적으로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동지가 되면 팥죽을 쑤어 벽에다 뿌려서 온갖 삿된 기운이 집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절집에서는 지금도 동지가 되면 각 전각과 처소마다 동지 마지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삿된 기운이 가장 강한 동지에 이런 기운을 몰아내는 것을 첫 번째 과업으로 여겼습니다.

또 동지가 되면 각 사찰에서 달력을 나눠줍니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달력을 보지만 과거 달력은 임금이 하사하는 것으로 사대부와 지식인들만 볼 수 있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오래된 전통을 따라 오늘날에도 절에서는 동지가 되면 달력을 배포합니다.

동지는 이처럼 삿된 기운을 몰아내는 매우 중요한 세시풍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동지의 존재감은 매우 희미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왜 절에서는 동지를 중요한 연례행사로 여기는 것일까요?

공동체가 희미해지는 사회, 공동체가 살아있는 불교

‘절에서만’ 동지를 챙기는 것으로 보이는 첫 번째 이유는 사회에서 더 이상 동지를 챙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파란만장했던 우리나라의 근대사와도 궤를 같이 합니다.

20세기 초 우리나라는 일제의 침탈을 받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유 풍습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온 백성들이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았고, 한반도에 미군정이 주둔한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가 미국식으로 급격하게 변화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 그저 먹고 사는 일이 바빴기에 동지, 단오, 칠석 같은 세시풍속은 뒷전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하여 농촌공동체는 해체의 길을 걸었고, 가족 구성도 대가족에서 핵가족 그리고 최근 들어 1인 가구가 대세가 되면서 공동체와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내려오던 문화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사회와 달리 사찰은 지금도 여전히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반이 전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대중과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25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무리를 이루어 수행하며 살아왔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인 공동체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절에서는 여전히 수행을 위한 공동체가 유지되어 왔지요. 때가 되면 어른스님께서 챙겨야 할 바를 일러주는 대중살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러한 문화가 아직까지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동지불공, 가족과 사회의 안녕을 기원

절에서 지내는 동지는 일반 사회에서 지내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팥죽만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지불공을 올립니다. 우리 선조들이 동지를 챙긴 이유는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집안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불자들은 붉은 색 팥죽의 기운을 빌리는 것보다 관세음보살님께 요청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사찰에서는 동지를 민족의 전통문화로써만 단순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불교식으로 재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불자로써 동지를 맞이하여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불보살님에게 가족과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동지라는 세시풍속의 의미가 불교를 통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선조들은 팥의 붉은 색이 삿된 기운을 막아준다고 믿었습니다. 저에게도 아주 오래되었지만 매우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 아주 어릴 적이었습니다. 평생 비녀를 꽂고 사신 전형적인 옛날 분인 할머니가 팥죽 한 사발을 거침없이 벽에 뿌렸습니다. 마치 검에 튀긴 핏자국처럼 선명한 붉은 색의 팥죽이 거친 시멘트 연회색의 벽 위에 흩뿌려졌습니다. 할머니의 뒷모습은 마치 어떤 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장수의 포스를 강하게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할머니의 엄청난 에너지는 필시 동지 팥죽에 대한 할머니의 확고한 믿음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옛날 같지만 불과 5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동지 팥죽에 그런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요. 기껏해야 마트나 편의점에서 즉석 단팥죽을 사서 먹는 정도로 동지를 기억합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의식도 변하고 동지의 의미도 퇴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찰에서는 동지의 의미를 불교의 신앙으로 견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신행생활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세상이 변하더라도 불교와 불교의 공동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여전히 동지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지요. 절에서 단순히 팥죽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동지기도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지기도, 정초기도, 칠월칠석기도 모두 불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세시풍속을 맞아 불보살님을 대하는 마음자세를 내 안에서 한층 더 키워나가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 됩니다. 단순히 불교와 아무런 상관없는 세시풍속이니 굳이 절에서 챙길 필요 없다고 폄하하기 전에, 이러한 세시풍속을 신행생활을 펼치는 장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동지 울력, 사심 없이 함께 일하는 즐거움의 장

동지 전날이면 동지울력을 합니다. 동지 울력을 한다는 것이 인형 눈 붙이는 것처럼 동지 새알 하나를 만들면 1원씩 주는 것도 아니고, 팀별로 대항하는 것도 아닌데, 참여하는 신도님들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새알을 빚습니다. 부처님과 우리 절 신도들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함이지만, 실은 울력하는 내내 일하는 그 자체가 즐거운 행위입니다. 사심 없이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그냥 함께 모여서 일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경험이지요.

선업을 행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사심 없이 행복하게 일을 하면 그것이 나에게 좋은 과보로 쌓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생전에 재가불자들에게 법문을 할 때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공덕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덕을 쌓는다는 것은 덕을 저장하기는 저장하되 다른 곳이 아니라 내 마음에 저장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마음속에 저장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복을 지으면 나에게 공덕이 됩니다.

요즘 세상에 이 도시 어느 곳에서 동지라고 사람들이 모여서 웃고 대화를 나누면서 새알을 빚을까요? 동지라고는 하는데 팥죽을 만들기는 번거로우니까 배달을 시켜 먹거나, 마트나 편의점에서 사 먹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입니다. 더구나 젊은 친구들은 팥죽을 나눠줘도 맛이 없다고 사양하고 맙니다.

동지라고 팥죽을 배달시켜 먹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모여 앉아 웃으면서 새알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굳이 종교나 철학 같은 고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혼자 전화로 시켜먹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동지라고 절에 모여 새알을 빚고 팥죽을 끓여 먹는 경험은 진정 소중한 경험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동지가 되면 불자들은 새알을 많이 만들어서 주변에 나눠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새알 울력을 하고 팥죽을 나누는 것은 일종의 봉사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시입니다. 이는 사찰이 신도들에게 봉사의 장을 제공하는, 이른 바 사찰의 순기능입니다. 몇 십 년 전처럼, 혹은 낙후된 시골마을의 노인정처럼 함께 명절을 치르고 팥죽을 만들어 먹는 모습은 근래에 보기 힘든 풍경입니다. 그나마 사찰에서 함께 하는 행복의 장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수행과 더불어 우리가 행복해지는 또 하나의 방법은 아무런 의도나 사심 없이 함께 모여서 즐겁게 일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뭐든지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무리 지어서 살아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행복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모든 행복을 다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은 굳이 말하자면 갈증이 날 때 먹는 아이스크림과 같습니다. 목이 마를 때 설탕물을 먹으면 당장은 좋지만 나중엔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처럼 종교적 갈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갈증으로 목이 마를 때 우리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시원한 냉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런 냉수가 앞서 말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심 없이, 그리고 함께 모여서 즐겁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에 안 나오는 것보다 나오는 것이 낫고, 또 절에 나와서도 가만히 앉아서 법문만 듣는 것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뭔가를 하는 것이 법문 듣는 것보다 공덕을 10배는 더 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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