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절따라] 전쟁과 평화

‘길따라 절따라’ 답사 프로그램을 통해 진주성에 다녀왔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첨예한 싸움을 벌인 치열한 전투의 땅이자, 7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한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전쟁을 아주 먼 옛날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임진왜란의 양상은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또렷하게 반복되고 있다.
인류는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하지만, 전쟁은 어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만이 전쟁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국전쟁 혹은 80년 광주의 경험을 통해서 전쟁의 다른 얼굴을 본다.
지나온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연장이며, 우리의 삶이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점철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더욱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목숨, 전쟁, 죽음, 진주성, 평화

https://www.youtube.com/watch?v=CDDs0ygM4b8

길따라 절따라, 진주성을 가다

지난 주에 <길따라 절따라> 프로그램 관계로 진주에 다녀왔습니다. 진주 청곡사는 광주로 치면 증심사같은 절입니다. 해인사 수말사로 유서 깊고 도량도 큰 절입니다. 다음 여정으로는 진주성에 갔는데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내린 의기 논개 이야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자 가장 잔혹하게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가슴 아픈 유적이기도 합니다. 

진주성 전투는 정말 무의미한 전투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진주는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왜국이 한반도를 지나 중국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조달해야 했습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손에 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남해 쪽 해상은 이순신 장군이 막고 있으니까 들어올 수가 없고, 육지를 통해 들어가는 관문이 바로 진주였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진주를 뚫으면 전라도를 장악해서 원활한 물자를 공급받을수 있는 것이었지요.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진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만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진주성 전투 첫 회에는 우리가 이겼습니다. 3만 명 정도의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우리 쪽 병력은 약 2,500명 정도였습니다. 10배가 넘는 병력이 공격해왔는데 6일의 전투 끝에 우리 군이 승리를 차지합니다. 당시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민관이 똘똘 뭉쳐 일사분란하게 전투에 임한 것이 승리의 요인으로 꼽힙니다. 몇 개월 후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왜구가 조선군과 백성 7만 명을 몰살합니다. 패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같은 시기 일본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일본의 선두 정예부대가 부산포로 들어와서 서울까지 진군하는 데에 보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쟁이랄 것도 없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순식간에 돌파한 것입니다. 평양까지 가는 데에는 한 달이 채 안 걸렸답니다. 즉 선두 정예부대들은 이미 평양이나 서울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이고, 전투력이 떨어지는 병사들 3만 명이 후방에서 진주성을 두고 1차 전투를 벌인 것입니다. 

2차 전투의 패인은 지휘체계의 분열이라 합니다. 1차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분명 왜구가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에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장수들이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지휘관이 서너 명이 되니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은 것이지요.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반면 일본은 1차 전투에서 패한 후에 복수를 하기 위해 10만의 정예부대를 몰고 들어왔습니다. 

또 다른 패인 중 하나는 장마 때문이었답니다. 성을 지키는 입장에서는 대포 전력이 상당히 중요한데, 장마철이라 대포에 불이 잘 안붙어서 성능을 발휘를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1차 전투 승리 이후에 경상도의 백성들이 상당수 진주성으로 피난 온 것이 더해졌습니다. 진주성은 초만원 상태였지요. 당시 진주성에 있던 민간인 6~7만 명은 2차 전투에서 모조리 학살을 당합니다. 

와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논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실 논개 이야기는 사실로써 확인된 정설은 아닙니다만, 진주성 2차 전투 당시 일본군들이 우리 백성을 학살할 때 ‘왜놈들한테 죽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처자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의기 논개라는 이야기가 파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과거의 전쟁 임진왜란, 현재의 러-우 전쟁  

진주성 전투를 되새기면서 지금 우리 현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떠올랐습니다. 임진왜란이 전개되는 양상과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의 양상이 너무 비슷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수도 키예우까지 며칠만에 진격을 합니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손에 떨어지겠구나’ 여겼지요.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군이 부산에서 평양까지 진격하는 데에 채 한 달이 안 걸렸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렇게 빠르게 진격하려면 하루도 쉬지 않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이동만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임진왜란 초반과 러-우 전쟁 초반의 전개 내용이 상당히 흡사합니다. 

그 다음 전쟁의 국면은 정치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명나라가 전쟁에 참여하면서 정치 국면이 시작되고 일본과명나라가 협상을 시작합니다. 지금 러-우 전쟁도 러시아가 당장 끝장을 볼 것 같았는데 진격이 정체되고, 돈바스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더 확보하려고 하고, 그 와중에 양국이 계속 협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임진왜란은 그야말로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국사시간 시험 범위 중 하나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제가 진주성에 가서 본 것은 무엇이냐면요. 학살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특히 진주에서는 정말 말할 수 없는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강이 피로 물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은, 교과서로 공부하는 시험문제의 차원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지구 반대편에서는 나라와 사람, 그리고 무기만 약간 달라졌을 뿐 똑같은 패턴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들이 피난을 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흔히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나쁜놈, 학살자, 침략자.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린스키는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웅으로 묘사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일 훌륭한 영웅은 백성들을 죽이지 않는 통치자입니다. 조금 비굴하더라도 머리를 숙여야죠. 우크라이나 국민의 반 이상이 피난을 나갔답니다. 열 명 중 한 명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하고요. 나라는 10~20년 가량 퇴보했다고 합니다. 

전쟁,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 

무엇을 위한 전쟁일까요?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건설되어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어떤 이유가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광주도 수십 년 전에 전쟁 같은 상황을 겪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약 열흘간 진행된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시민군’이라는 표현을 썼고요. 상대 공수부대들은 마치 베트남전쟁에서 베트콩들 잡듯이 군사작전을 펼쳐서 시민군들을 진압했습니다. 전쟁은 국가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내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내전이라고 합니다. 내전도 전쟁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것도 전쟁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개가 개를 죽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돼지가 돼지를 학살하는 모습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유독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평상시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큰 벌을 받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천벌 받을 행동이라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라고 합니다. 나라에서 상을 주고 카퍼레이드를 하고 치켜 세우느라 난리도 아닙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를 떠나서, 평상시에는 제일 나쁜 행동이 왜 전쟁이라는 시기에는 영웅 대접이 되는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쟁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진실 중에 하나입니다. 

다시 임진왜란 이야기를 해볼까요? 임진왜란의 양상이 초창기에는 한쪽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점령하다시피 하다가 일 년 정도 뒤에 정체기에 접어들고, 정치 협상을 시작합니다. 왜국이 명나라와 협상을 하고 결국은 왜국이 조선 땅에서 물러나게 되는데요. 이런 양상을 한국전쟁도 똑같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화, 일상의 삶 

한국전쟁에서는 북한이 남한에 쳐들어와 불과 몇 달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는 등 남한을 거의 다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에 유엔군이 참전하여 신의주까지 북한군을 쭉 밀어냅니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참전하여 남한의 영토로 다시 밀고 내려옵니다. 한국전쟁이 총 3년 동안 펼쳐졌다고 하지만, 주요 전적은 전쟁 초창기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 나머지 기간에는 무엇을 했을까요? 땅따먹기 하고 있었습니다. 정전협상을 하는데 어느 쪽이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 것이가를 놓고 약 2년간  휴전선 쪽에서 지루하고 무의미한 싸움을 지속했습니다. 52년도, 53년도 당시 소설 같은 것들을 보면요. 당시 서울은 평범하게 사회생활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휴전선 부근에서 전쟁을 하고 휴가를 받으면 서울에서 와서 휴가를 보내고 또 다시 전쟁터로 가고 그랬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70년 정도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습니다.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어마어마하게 긴 기간 동안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 살고 있어요. 이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큰 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 ‘평화’라고 하는 건 무엇인가? 제가 보기에는 다른 게 아닙니다. 멀리서 보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평화로워요. 우리의 일상이 그렇습니다. 멀리서 보면 한없이 평화로운데 가까이 가서 그 삶속을 들여다 보면 화내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입니다.

평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중생심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평화라고 해서 평화롭고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우리들의 삶, 일상적인 삶. 이것이 평화입니다.

목숨에는 차등이 없다 

진주성에 가서 느낀 첫 번째는 어떠한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절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요. 두 번째는 현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임진왜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것을 교과서에 나오는 몇 줄의 문장으로 받아들이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지금 이 시대에도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공교롭게 오늘이 5월 24일입니다. 며칠 전에 증심사에서 지원하고 있는 김동수 열사 추모문화제에 다녀왔습니다. 김동수 열사는 80년도 당시에 조선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장으로, 다가오는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부집행위원장이었습니다. 5월 27일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사수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열다섯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진주성에 가서 받았던 느낌을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서 비슷하게 받았습니다. 진주성은 그래도 같은 민족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과 벌인 전쟁이었지요. 그런데 1980년 광주는 한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왜 그때 공수부대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시민들은 진압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 공수부대를 지휘했던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충분한 전투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도 전쟁이었던 겁니다. 군인 대 군인간의 전쟁으로 경험한 군사작전을 자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다시 수행한 겁니다.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상당히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80년 5월 당시에 쓰러진 우리 광주 사람들의 목숨은 소중하고, 베트남에서 우리 파병 장정들의 손에 죽은 베트남 사람들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은가? 똑같은 목숨입니다. 그 사람들 목숨도 소중합니다. 베트남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 황당하겠죠.

베트남이라는 나라는 백 년 넘게 외세에 시달리고 백 년 넘게 외세와 싸워온 나라입니다. 미국이 쳐들어오기 전엔 프랑스와 수 십년간싸웠습니다. 흔히 말하는 ‘베트콩’의 목숨도, 광주 열사들의 목숨도, 진주성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목숨도 다 똑같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며칠 전 추모문화제에 참석해서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80년 5월을 말할 때 ‘민주화 항쟁’이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번의 여러 경험들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가하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80년 5월이 벌써 42년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까마득하게 들리는데 우리가 정말 먼 예전이라 생각하는 6.25전쟁도 70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30년 뒤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나 광주나 사실은 바로 최근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역사로 치부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Previous

진정한 효도

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1

Nex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