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 대하여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증심사 목요봉사팀은 매주 목요일 자비를 행하고 있다. 자비심이란 무엇일까?
자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서양 학자들은 사랑을 에로스, 필리아, 노도스, 프라그마, 아가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불교의 자비도 사랑의 하나이다.
이처럼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연애감정’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라”고 하는 부처님의 <자비경>을 구절구절 살펴보며 불교의 사랑과 자비를 다시금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 자비, 행복, 희망

https://youtu.be/recPhlhsV4w

증심사 목요 봉사팀의 10년

지난주 목요일, 자비신행회에 다녀왔습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관내 어르신들게 점심공양을 대접하는 봉사를 하고 있는 우리 증심사 신도님들을 만나 같이 봉사도 하고 점심도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셨습니다. 제가 증심사에 온지 만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증심사 목요봉사팀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실 몰랐다고 생각했는데 건성으로 들어서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반성하면서 기왕에 하는 봉사 더 좋은 재료로 더 맛있는 공양을 대접할 수 있도록 사중에서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시는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참 고생이 많으시고,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증심사 목요봉사팀이 10년 넘게 운영되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10년을 꾸준히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까요? 게 중에는 봉사를 하다가 나이가 드셔서 쉬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 사정으로 잠시 쉬었다 다시 하는 분, 또 쉬지 않고 계속 하는 분 등 여러 동참자가 계실 것입니다. 아무튼 꾸준히 10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일입니다.

우리가 ‘자비심’이라는 말을 할 때 흔히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증심사 목요봉사팀 여러분은 매주 봉사를 하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자비심이 철철 넘쳐흐르고 마음속에서 감동이 뭉클하고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서 안달하셨을까요? 매주 매주, 한결같이? 감히 생각건대 늘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비심, 그리고 사랑이란?

자비심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자비심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려면 먼저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사랑. 러브(love)란 무엇인가.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제 개인적인 경험을 먼저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제가 십 수 년 전에 강화도의 작은 절에서 기도하며 산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6월 중순쯤이었는데 어떤 신도분이 손바닥만 한 강아지를 데려와서는 그냥 놓고 가는 겁니다. 40대가 되도록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데 난생 처음 어미와 떨어져서 벌벌벌 떠는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 어땠냐하면, ‘이거를 내가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이 먼저 들이닥쳤습니다. 그 다음 드는 생각은 ‘철없는 젊은 아빠의 심정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이 너무 부담되니까 벗어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담감도 잠시,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정이 들어서 그 개하고 엄청 친해졌습니다.

개의 이름은 보리라고 지었는데, 보리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다른 개와 눈이 맞아서 새끼를 뱄습니다. 그 새끼를 제가 다 받았습니다. 첫 새끼는 나오자마자 죽고, 다섯 마리를 새벽 내내 낑낑거리면서 낳는 것을 밤새 지켜보며 받았습니다. 아침쯤 되어서 출산을 끝낸 보리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축 쳐져있고 새끼들은 엄마 배에서 꼬물거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보리와 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순수한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 몇 초 동안 느꼈습니다.

“보리야,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런 말을 보리에게 건네는데,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올라왔습니다. 이런 것이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출가 전에 연애 한 번 안 해 봤느냐?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순수한 애정을 그 순간 처음으로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깨달은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내가 사랑이라고 느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었구나.

사랑이라는 착각, 알맹이는 소유욕

여기 계신 분들은 아이를 낳고 키운 경험이 있으니까 장가도 못간 저 중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만, 감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중생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소유욕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확신하건데 그것은 소유욕입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배하기를 원하는 소유의 욕망이 아닙니다. 오늘 저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 배 아파서 내 자식을 내가 낳았다고 하면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사랑이 왜곡되느냐하면,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변질되고 내 자식이라는 생각에 내 눈이 멉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뭔지 몰라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잘 보고 이것이 사랑인지 혹은 집착으로 소유욕으로 변질되어가는 지를 잘 보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여섯 가지 정의

서양의 학자들은 사랑을 여섯 가지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로스적인 사랑입니다. 성적 욕망과 쾌락으로써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 필리아적인 사랑입니다. 이는 가족 간의 친밀감, 동지애, 조건 없는 믿음, 의리와 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노도스라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썸’ 타는 것입니다. 연애하는 건 아닌데 둘이 마주보면 눈빛이 반짝반짝 통하고 괜히 장난치고 싶고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만 해도 재미있는 사이입니다.

네 번째는 프라그마입니다. 이것은 부부애입니다. 부부애가 연애감정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제가 간접 경험한 바로 부부애는 가족을 같이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상대방에게 가지는 의리, 전우애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험한 파도를 같이 헤쳐 나가는 동료로서 가지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입니다.

다섯 번째는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라고 하면 흔히 성적 쾌락이 없는 플라토닉과 혼동하는데 둘은 같지 않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을, 말하자면 같은 그리스 사람이나 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나라 사람이나 노예나 귀족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다는 마음에 입각한 인류애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사랑과 믿음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이라면, 자비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가지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개미나 지렁이나 인간이나 바퀴벌레나 다 똑같은 중생이라고 감싸 안는 마음입니다.

이렇듯 앞서 말한 모든 것이 다 사랑이라는 말로 통용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살다보면 나타나는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고 ‘아 이게 사랑하는 마음이구나’, ‘사랑은 마음의 문제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애감정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당신 없이는 못살아. 그대 없이는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애감정은 여러 가지 사랑 중 아주 일부분입니다. 그 이외에도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 다양하고 넓은 감정입니다. 사랑을 한 가지로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간에 느끼는 애정, 믿음, 신뢰도 사랑이며, 부부가 상대방에서 느끼는 동료애 내지는 동지애 역시도 사랑이며, 누군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연민의 감정 또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을 폭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아, 부디 행복하라 … <자비경> 해설

초기경전 수타니파타에 보면 부처님께서 자비에 대해 설한 부분이 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구절로, 이 내용만을 발췌하여 <자비경>이라는 하나의 경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자비경>을 쭉 읽어가면서 중간중간 첨언하는 것으로 법문 이어가겠습니다.

니르바나에 이른 사람이 편안한 경지에서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공명하고 성실하며 말은 부드럽고 점잖아야 하며, 잘난 체하고 뽐내지 않는 것이다.

<자비경>이라고 했으니 ‘자비란 무엇이다’라는 이야기가 먼저 나와야 할 텐데, 말은 부드럽고 점잖아야하며 잘난 체 뽐내면 안 된다는 내용이 처음에 나옵니다. 우리는 자비라고 하면 상대방에 대한 자비심 즉 내가 중생들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합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는 어떤 마음이며 상대방에게는 어떤 마음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대하는 자비심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잘 보고,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잘 다스리고 있는가를 본인이 잘 살피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며,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생활하라.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되도록이면 간소하게 하라.

모든 감관을 편안하게 하고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이런 구절이 자비심하고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이는 자기 욕망을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음식, 생활, 욕심내는 것을 절제하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살만한 그런 비열한 짓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사지 않으려면 행동이 현명해야 합니다. 자비롭게 산다는 것은 현명하게 산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 다음에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살아 있는 것들아, 부디 행복하고 편안하여라.

이것은 자비심이 표현된 말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표현되는 것이 자비심입니다. 다만 타인이 아닌 나를 향했을 때는 욕망을 다스리고 절제할 줄 알고 행동을 현명하게 하는 것이 나에 대한 자비심을 기르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생명체라도 약한 것이건, 강한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 것이건,

제 아무리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나려 하는 것이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아, 부디 행복해져라.

이 구절은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연민의 마음을 가지되 구별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약하다, 강하다, 크다, 작다는 등의 구별을 하지 말고 모든 중생들이 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부모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 더 귀엽고 잘나 보입니다. 이런 구별하는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구별하는 마음을 없애라 함은 이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나의 바운더리(boundary, 경계선)를 만들어서 여기까지는 내 꺼, 내 사람, 우리 식구, 우리 회사, 우리 민족 등으로 구별지어놓고, 내 범주에 있는 것만 좋아하고 그 밖에 있는 것은 차별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니까 많이 사랑하고 내 자식이 아니니까 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멸시해서도 안 된다. 남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더욱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면서 내 자신에 대해서는 나의 욕망을 잘 다스리고 절제하는 마음을 확실하게 가져야 올바르게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보호하듯

살아 있는 이 모든 생명체에서 한없는 연민의 마음(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 자비심이 골고루 스미게 하라.

위로,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도 없고, 적의도 없고, 척짓는 일도 없이

이 누리에 두루두루 스미게 하라.

모든 중생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구석구석 스며들어가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다시금 하고 있습니다.

서 있을 때나, 걸을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잠자지 않는 동안에는 이 연민의 마음을 굳게 지녀라.

자비심이라는 것은 내가 내고 싶을 때는 내고, 화가 날 때는 안 내고, 심심할 때 내고, 내 앞에 손자가 재롱을 피우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꾸준히 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악한 견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사리를 잘 판단하며, 욕망의 늪을 이미 나온 사람,

이런 사람은 결코 두 번 다시 이 윤회 속에 태어나지 않는다.

오늘 <자비경>을 한 부씩 나눠드린 것은 가지고 가셔서 하루에 한 번이라도 보고 읽으시라는 뜻입니다. 읽고 하루에 다만 10분이라도 내 마음속에서 자비심을 끌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매일매일 읽으시고 마음속에서 자비심을 스스로 일으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수파니파타 <자비경>

니르바나에 이른 사람이 이 편안한 경지에서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공명하고 성하며 말은 부드럽고 점잖아야 하며, 잘난 체 뽐내지 않는 것이다. 만족할 줄 알며,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생활하라.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되도록이면 간소하게 하라. 모든 감관을 편안하게 하고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살만한 그런 비열한 짓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살아 있는 것들아, 부디 행복하고 편안하여라. 어떠한 생명체라도 약한 것이건, 강한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 것이건, 제아무리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나려 하는 것이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아, 부디 행복해져라.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멸시해서도 안 된다. 남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더욱 안 된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보호하듯 살아 있는 이 모든 생명체에서 한없는 연민의 마음(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 자비심이 골고루 스미게 하라. 위로,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도 없고, 적의도 없고, 척짓는 일도 없이 이 누리에 두루두루 스미게 하라. 서 있을 때나, 걸을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잠자지 않는 동안에는 이 연민의 마음을 굳게 지녀라.

사악한 견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사리를 잘 판단하며, 욕망의 늪을 이미 나온 사람, 이런 사람은 결코 두 번 다시 이 윤회 속에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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