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 해설 9

사랑과 정의 본질은 같다. 그 본질은 모두 애착이고 집착이다. 누군가 정스럽게 행동한다면 그 이유는 친밀감과 애착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애착이 생기니까 상대방에게 친밀하고 다정하게, 정스럽게 대하는 것이다.
수행자란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사람이다. 마음속으로 인정에 끌리고 이성을 흠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머리를 깎아도 수행자가 아니고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라 할 것이다.
정은 일견 자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인정을 자비심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인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집착이며, 집착을 이용해서 우리 안에 키우는 이기심이다.

#기도, 나는누구인가, 무아, 수행

https://youtu.be/G1JiqCmw9nI

여덟째, 세속과 교류하여 남에게 미움 받지 말지니라.

마음에 애정을 떠난 사람을 사문이라 하고,

세상 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하느니라.

이미 애정을 끊고 세상을 떠났는데

무엇하러 세상 사람과 다시 사귀어 놀 것인가.

세속을 그리워하고 못 잊으면 도철(악한짐승)이 된다 하니,

탐욕스런 도철에겐 도심이 없느니라.

인정이 짙어지면 수행심이 약해지니,

냉정하게 인정 끊어 다시는 얽매이지 말지니라.

출가한 본래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면

깊은 산에 들어가서 불법진리 참구하되

가사 한 벌 발우 하나로 인정을 끊어버리고,

주리고 배부른데 마음 쓰지 아니하면

수행은 절로 절로 도는 더욱 높아지리라.

송하여 이르되 나와 남을 위하는 것 비록 착한 일이지만

미혹한 마음에는 생사윤회 씨앗일 뿐 솔바람 칡넝쿨 속

고요한 달빛 아래 깨달음의 깊은 관문 화두 들어 뚫으리라.

지난 시간에 사랑 이야기를 한 데 이어 이번 시간에는 정을 키워드로 이야기합니다. 정(情)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게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과 사랑의 본질은 같습니다. 두 감정 모두 애착이고 집착입니다.

다정도 병인양 하여…

정이라는 말은 어떻게 쓰입니까? ‘저 사람은 참 다정해.’ ‘그 사람은 정이 많아.’ 또 다른 경우에 ‘그 스님은 너무 정이 없어. 무정해.’ 이렇게 쓰이고는 합니다. 연인들 간에 생기는 정은 연정이라고 하고, 친구들 간의 정은 우정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가 되었을 때 내 안에 생기는 정은 동정이이라고 하지요.

이런 표현들이 한결같이 담고 있는 것은 집착입니다. 아무런 사심 없이 상대방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누군가 정스럽게 행동했다면 그 이유는 친밀감과 애착입니다. 애착이 생기니까 상대방에게 친밀하고 다정하게, 기분 좋게 대하는 것입니다.

무정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까 정이 없는 행동을 합니다. 최소한의 친밀감이라던가 애착, 집착이 강하지 않으니까 정감 있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정 또한 이기적인 욕망, 집착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을 두고 좋은 의미로 주로 이야기합니다만, 정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먼저 정이라는 것의 본질은 집착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 본질은 집착, 정을 떼는 사람이 수행자

마음에 애정을 떠난 사람을 사문이라 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했습니다.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문장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원효스님이 보기에 수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마음에서 애정이 떠난 사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집착하는 마음을 여읜 사람입니다.

누군가 출가를 하지 않았고, 머리도 길었고, 가정도 있다 하더라도 항상 일상 속에서 마음속에서 집착을 털어내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다 하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여 물건이나 사람에 대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는 진정한 수행자가 아니라고 원효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행자는 수행자의 준말입니다. 수행자가 애욕의 그물에 걸리면 겉으로 보기에는 코끼리 같지만 개와 다를 것이 없고, 도인이 연정을 품으면 고슴도치가 쥐덫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쥐덫에 걸린 고슴도치는 어떻게 됩니까? 그대로 인생 종치는 겁니다.

원효스님이 이야기하시기를 정이라 하는 것의 핵심은 집착에 있으며, 겉으로 수행자처럼 보이든 출가를 했든 재가자이든 마음속으로 인정에 끌리고 이성을 흠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고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애정을 끊고 세상을 떠났는데 무엇하러 세상 사람과 다시 사귀어 놀 것입니까? 출가자의 경우에는 어쨌든 본인이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출가했으면서 왜 또다시 세상 사람들을 사귀고자 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사람에 대한 정과 집착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인정의 다른 모습은 자비심

수행하는 마음과 인정은 서로 상극이라는 이야기를 앞에서 해왔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인정과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봄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인정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요? 상대방을 위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상대방에게 잘해 주려는 모습 즉 자비로운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수행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이기심일 것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공감을 하지 못합니다. 동정심은 내가 상대방의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했을 때 내 안에 생기는 인정입니다. 그런 마음은 이기적인 사람에게서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의 특징은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을 자비심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집착에 의해서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자비심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그렇게 해야만이 이 중생세계에서 깨달음을 얻어 그야말로 자비로운 불국토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심과 상극이 되는 것은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이다.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은 인정 자체가 아니고 그러한 인정을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집착,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 안에 키우는 이기심 같은 것들입니다.

출가한 본래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면 깊은 산에 들어가서 불법진리 참구하되

가사 한 벌 발우 하나로 인정을 끊어버리고 주리고 배부른데 마음 쓰지 아니하면

수행은 절로 절로 도는 더욱 높아지리라.

좋은 이야기나 자칫 잘못하면 대리만족이 되어버립니다. 읽으면서 ‘이렇게 열심히 수행을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의 뇌는 내가 실제로 그것을 수행한다고 착각합니다. 특히 이제 불교를 조금 안다는 수준이 되었을 때가 되었을 때, 큰스님에 대한 지식만 쌓을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과 문장으로써 동기부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송하여 이르되 나와 남을 위하는 것 비록 착한 일이지만

미혹한 마음에는 생사윤회 씨앗일 뿐 솔바람 칡넝쿨 속

고요한 달빛 아래 깨달음의 깊은 관문 화두 들어 뚫으리라.

집착의 씨앗을 털기 위해 화두를 들고 그 힘으로 자비심을 내다

나와 남을 위하는 것은 비록 착한 일이지만 미혹한 마음에는 생사윤회의 씨앗이 생깁니다. 인정으로 인해서 나타는 행동들은 착한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미혹한 마음에서 인정을 베풀 때는 생사윤회의 씨앗에 불과합니다.

생사윤회의 씨앗은 내가 있다는 생각, 아상의 씨앗입니다. 내가 있다는 집착과 생사윤회의 씨앗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화두를 들어야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집착을 자비심으로 승화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심해야할 것은 정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 보살님들은 정이 참 많습니다. 오지랖이 넓다고 하지요.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될 것을 찾아다니면서 간섭하고는 하지 않습니까. 너무 다정하면 안 됩니다. 적당히 다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무주상보시를 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싫어할 정도로 오지랖을 떨면 안 됩니다. 적당히 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정의 본질이 집착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착을 자비심으로 승화를 시키자 하는 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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