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 수요일은 참는 날

구산스님은 법어집 ‘생활불교의 길’에서 활월화수목금토일 7일 동안 매일 해야 하는 수행으로 육바라밀과 만행을 제시했다. 그 중 수요일은 참는 날, 즉 인욕수행을 하는 날이다.
무엇을 참는가? 욕됨과 억울함과 번뇌를 참는다. 욕됨과 억울함을 참는 것은 아상을 내려놓는 수행이며 번뇌를 참는 것은 고통의 뿌리를 완전히 뽑는 수행이다.
인욕하는 것은 자아를 깨우치는 수행이며, 선업을 성취하는 길이며, 스스로는 부처가 되고 중생을 구제하는 공덕을 성취하는 행위다.
인욕하는 방법은 투쟁하지 말고 양심을 속이지 말며 시비하지 않는 것이다. 인욕은 너무나 힘든 수행이므로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굳건하게 세우고 바다이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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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뻔한 이야기’다

언젠가 법정스님의 말을 빌어서 “종교는 학습이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종교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 또 반복하면서 완전히 익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지난 관음재일부터 초사흘까지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법문을 쭉 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이야기, 원효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였지요. 

그러나 종교에는 비결이 없습니다. 종교는, 수행은 뻔한 이야기를 새기고 또 새기고 마음 속으로 깊이 생각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뭔가 특별하고 특이한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행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인데,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비결이나 비법에 의해서,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 뭔가를 변화하게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은 뻔한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불교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보면 맞는 이야기만 구구절절 하고 있습니다. 속으로 ‘경전 좀 보면 저런 이야기는 나도 하겠다.’ 생각하겠지만 수행이라는 것은뻔한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서 진정 나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찾아내는 겁니다. 

수요일은 참는 날

오늘은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을 가지고 복습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구산스님은 월화수목금토일 7일 동안 매일 할 수 있는 수행으로 육바라밀과 만행을 제시했습니다. 그중 수요일은 인욕하는 날입니다. 구산스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참는 날입니다. 욕됨과 온갖 억울함과 번뇌를 참읍시다. 참는 것은 자아를 깨우치는 길이며 모든 선업을 성취하는 길이며 성불도생의 공덕을 성취합니다. 투쟁하지 말고 양심을 속이지 말 것이며 시비하지 맙시다. 뜻은 태산과 같이 굳게 세우고 마음을 바다와 같이 넓혀서 모든 어려움을 포용하여 인욕행을 닦읍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상에서 꼭 해야 하는 수행이 인욕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분노, 번뇌, 힘듦, 주변사람에 대한 원망. 이 모든 것을 잘 참아내고이겨내는 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해야 하는 큰 수행 중 하나입니다. 

흔히 참선하고 기도하고 사경하는 것을 수행의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일상에서 인욕하는 것만큼 큰 수행이 없습니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인욕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인욕은 따로 시간 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매일매일, 같이 생활하는 이가 있는 이 공간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욕됨은 양심의 문제

무엇을 참느냐? 욕됨과 억울함과 번뇌를 참습니다. 이것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욕됨과 억울함이 한 파트, 번뇌가 한 파트입니다. 번뇌는 우리가 잘알고 있습니다. 모든 고통이 번뇌입니다. 육체적, 정신적이 고통입니다. 희노애락애오욕, 모든 거친 감정이 번뇌입니다. 

욕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평상시에 잘 쓰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을 그다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욕되다’는 말 앞에 부끄러울 치(恥)를붙이면 ‘치욕’이 됩니다. 치욕스럽다고 할 때는 더 구체적인 느낌이 오지요? 뭔가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했다는 느낌이 옵니다.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견디는 것입니다. ‘욕되다’의 사전적인 뜻은 ‘부끄럽고 명예롭지 못하다’입니다. 

명예롭다는 말은 우리가 잘 압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이나 평판이 좋은 뜻으로 널리 알려지는 것이 명예로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나 자신으로써명예롭다는 평을 받기 힘드니까 권력과 자리와 같은 내가 아닌 무언가를 통해 명예를 취하고자 하지만, 명예롭다는 말의 원래 뜻은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치욕스럽다는 말은 명예롭지가 못한 것입니다. 남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사전에서는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참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부끄러운가? 양심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문제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쪽팔린다’고도 합니다. 내 얼굴(쪽)이 남들에게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당당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한 가지만 알면 됩니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양심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내지는 행동 규범’입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양심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게 문제이긴 하지만 양심이란 것은 그런 것입니다. 양심은 도덕적인 기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뭔가 부끄럽고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했거나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치욕스러움을 느낍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신의 점수가 70점 정도 되는데 어느 순간 다시 보니 30점 정도 밖에 못 된다고 합시다. 그럴 때 내 양심에 비추어 남들에게 떳떳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배우자를 두고 외도를 한다면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은 알기 때문에 스스로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끄럽습니다. 욕됩니다. 

욕됨과 억울함, 아상이 있어 생긴다

억울함은 욕됨의 반대입니다. 한자로 쓰면 누를 억(抑)에 우거질 욱(鬱)입니다. 누르니까 답답한 겁니다. 누른다는 말은 내 기준이 아니라 상대의 기준으로나를 낮추고 내리는 겁니다. 나는 70점짜리인데 주변에서는 나를 30점이라고 찍어 누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냉장고에 있는 요구르트를 안 먹었는데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요구르트 네가 먹었지?” 하는 겁니다. 아이는 본인의 인간성이나 도덕성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깎이기 때문에 답답합니다. 그게억울한 겁니다.

억울함과 욕됨이 의미하는 바가 다른데 같은 카테고리로 묶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기준이 같기 때문입니다. 욕되거나 억울함이 있다는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기준이 없으면 욕되거나 억울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아상(我像)이라고 합니다. 내가 있다는 상, 나는 잘났다,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아상이 있으니까 욕됨을 느끼고 억울함을 느낍니다. 수요일에는 이와 같은 것들을 참자는 것입니다. 

번뇌를 참자는 것은 무엇일까요? 번뇌는 모든 고통입니다. 고통을 참아야만 고통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이야기입니다. 화가 나면 괴롭습니다. 슬프면 괴롭습니다. 심심하면 괴로워요. 마음이 우울하면 괴롭습니다. 그게 번뇌입니다. 그런 번뇌의 뿌리를 완전히 뽑으려면 화가 난다고 해서 화를 내고 우울하다고 해서 우울해서는 안 됩니다. 

수요일에는 무엇을 참아야 하는가? 욕됨과 억울함과 번뇌를 참아야 합니다. 욕됨과 억울함을 참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아상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번뇌를 참는 것은 번뇌를 참아내서 번뇌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첫 번째에는 무엇을 뿌리뽑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인욕행의 세 가지 목적

이렇게 참는 목적은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참는 것은 자아를 깨우치는 길이며 모든 선업을 성취하는 길이며 성불도생의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고 구산스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깨우친다는 말은 깨친다는 말입니다. 깨닫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안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깨친다’는 말을 쓸까요? 아는 것과 깨치는 것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깨친다는 것은 확실하게, 환하게, 제대로, 정확하게 알아서 번뇌의 뿌리를 다 뽑아내는 상태입니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안 결과 열반을 증득한 상태가 깨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 가면 남대문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두고 “나는 서울에 남대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알아야 확실하게 알아서 번뇌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요? 자아를 알아야 합니다. 내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 제가 마이크를 들고 법문을 하고 있는데요. 여러분은 마이크에 대해서 잘 몰라도세상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스님 목소리가 좀 큰가보다.’ 잘 못 알아도 별 이상이 없지요. 그런데 나는, 법문을 하는 나는 마이크의 기본적인 정보나사용법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어야 법문을 매끄럽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마이크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디오 업체라서 마이크를 수리해야 한다면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고치려면 어떻게 하는지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마이크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마이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아는 것의 정도가 다릅니다. 

깨달음, 확실히 알아서 번뇌를 뿌리뽑는 것

깨닫는다는 말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수준으로 나 자신을 훤하게 들여다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 결과 번뇌의 뿌리를 뽑고 열반을 증득하는 겁니다. 나 자신의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그 답은 부처님이 이미 말씀했습니다.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푸는 것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입니다. 증명 문제입니다. 스스로 수행을 해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객관식으로 아는 것은 교리공부를 하니까 생기는 지식입니다. 이런 지식은 깨달음으로 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마이크를만드는 정도의 지식인데 이것은 단지 마이크를 사용하는 데에 필요한 정도의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깨치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입니다. 

두 번째, 선업을 성취하는 길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교에서 모든 선과 악은 수행에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로 결정됩니다. 우리가 인욕하는 것이선업을 성취하는 길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성불도생의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성불도생은 부처가 되고 중생을제도한다는 겁니다. 그렇게만 한다면야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상의 세 가지를 목표로 세우고 인욕수행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주위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 참는 게 아닙니다. 자아를깨우치고 선업을 성취하고 성불도생의 공덕을 이루기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목표를 올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인욕행의 세 가지 방법

대상과 목표를 이야기 한 뒤에는 방법이 나와야 합니다. 구산스님이 제시한 방법은 투쟁하지 말고 양심을 속이지 말 것이며 시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앞에 ‘부끄럽다’ ‘치욕스럽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두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지요. 우리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불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도 필요하지만 불자로서의 양심도 필요합니다. 불자가 지켜야할 도리, 불자가 지켜야할 행동 규범.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계율입니다. 불자의 양심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계를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양심을 속인다는 말은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하고 체면을 거는 것입니다. 양심을 속이지 말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행동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은 굳이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고요. 불자로서의 양심은 오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떳떳하다면 여러분은 이미 인욕행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100% 옳은 것은 없다

투쟁하지 말고 시비하지 말라는 부분도 잘 봅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내가 옳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된 것, 억울한 것이 아상이있어서 그렇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상이 있다는 것은 내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내 생각, 우리 집, 우리 가족, 내 몸뚱이를 내가 지켜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으니까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것입니다. 인욕은 시비하지 말자는 거예요.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할까요? 우리 절 스님들이 점심공양을 하고 나서는 꼭 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어떤 스님은 사기로 된 드리퍼를 선반 위에 위험하게 올려 둡니다. 나는 항상 그게 불안하니까 그걸 내리는 순간부터 커피를 마시고 정리하여 제자리에 놓고 나가는 순간까지 신경이 쓰입니다. 그런데 다른 스님들은 그 위치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으니까 늘 그대로 하는데 나만 그게 신경쓰이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시비를 하는 겁니까 안 하는 겁니까? 시비라는 것은 표현해서 따지라는 것 뿐만 아니라 속으로도 ‘이렇게 해야 하는데.’ ‘저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내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 100% 옳은 것은 없습니다. 결국 정답은 서로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겁니다. 내가 옳으니까 내 생각대로해야 한다고 하면 그 순간에는 내 뜻대로 됐을지 몰라도 상대방에게는 그 반발 심리가 있기 때문에 다음 상황에서는 반드시 치받게 됩니다. 그런 후에는 싸움이 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선에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시비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상대방의 생각도 인정해고 내 생각도 인정하여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자는 겁니다. 왜? 세상에 옳은 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내가 옳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왜 옳다고 생각하는가? 내 안에 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욕에 있어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는 투쟁하지말고 시비하지 말고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실천을 굳세게 하는 것은 명확한 목표

그렇다면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뜻은 태산과 같이 굳게 세우고 마음을 바다와 같이 넓히는 것입니다. 참기는 참는데 승진을 하기 위해서, 모임에서인정받기 위해서 참는다고 하면 어느 정도 참다가 터져버립니다. 왜냐하면 참아야 할 이유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참아야 할 이유가 성불도생을 하기 위해서라면, 선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자아를 깨치기 위해서 인욕행을 한다고 하면 단지 승진을 하기 위해 참는 것과는 결이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태산과 같이 뜻을 굳게 세우라 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높은 목표를 세우고 인욕행을 행해야 합니다. 

인욕행을 하다보면 반드시 마장이 따라옵니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저런 인간하고 내가 같이 살아야 하나.’ 이런 분노가 계속 치밀어 오릅니다. 그걸 참는 게 인욕행입니다. 그것을 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분노는 머리로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하는 마음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자비심을 일으켜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바다와 같이 넓게 하면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상황도 다 이해가 됩니다.  

일상에서 인욕행을 하는 것이 이렇게 태산과 같이 크고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을 먹지 않으면 힘든 일입니다. 겉으로 화는 안 내지만 속으로 화를 내면 속이곪아 터집니다. 홧병이 나지요. 홧병에는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 말고는 해법이 없습니다. 인욕행을 하라는 말은 억지로 참는 차원을 넘어서서 화를 일으키는번뇌의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어려움을 포용하여 인욕행을 닦자고 구산스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을 낭독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참는 날입니다. 욕됨과 온갖 억울함과 번뇌를 참읍시다. 참는 것은 자아를 깨우치는 길이며 모든 선업을 성취하는 길이며 성불도생의 공덕을 성취합니다. 투쟁하지 말고 양심을 속이지 말 것이며 시비하지 맙시다. 뜻은 태산과 같이 굳게 세우고 마음을 바다와 같이 넓혀서 모든 어려움을 포용하여 인욕행을 닦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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