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사는 방법 (feat. 법정스님)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내 안에서 발견한 순수한 욕망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스릴 것인가?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알아보는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방법.
마음이 좋고 싫음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이 감정에 대해 분별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 그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를 바라며 집착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말라’고 하니 마음이 괴롭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할뿐 아니라 서로의 의지함으로써 무언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할 뿐 자성은 없으니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즉 무명에서 벗어나야 연기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움직인다. 때문에 변하지 말라고 집착할 일이 아니라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지혜롭게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다.

#무아, 법정스님, 연기, 욕망, 인생, 지혜

지혜로운 욕망

욕망에 지혜로운 욕망이 따로 있고 어리석은 욕망이 따로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은 그냥 욕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보살’이라는 말도 말이 안 됩니다. 보살은 보디사트바 즉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인데요.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고 깨달으면 부처인데 깨달은 중생이라는 게 말이 맞습니까? 

보디사트바는 깨달았으나 부처가 되기를 마다하고 나 외의 모든 중생이 깨달을 때까지 나의 깨달음을 늦추겠다는 서원을 세운 분들입니다. 깨달은 중생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말이 되는 개념인 것이지요. 

지혜로운 욕심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비록 세상의 진리는 깨닫지는 못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고 듣고 이해했다면 그것도 일종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이 연기법대로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고, 연기법에 따라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풀어낸다면, 비록 깨닫지는 못했으나 분명 지혜로운 것입니다. 중생으로써의 욕망은 있으나 그 욕망을 지혜롭게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로운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전 시간에 유재석, 이적의 ‘말하는 대로’를 이야기하면서 내 안의 순수한 욕망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그렇게 발견한 욕망을 지혜롭게 다스려야만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에 이어서 어떻게 하면 욕망을 지혜롭게 다스릴 수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간에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회자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구절을 가지고 법문을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법정스님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 
늙는 괴로움도 젊음을 좋아하는 데에서 오고, 병드는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 데에서 온다. 죽음 또한 삶을. 좋아하는 것 즉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고, 사랑의 아픔도 사랑을 좋아하는 데에서, 가난의 괴로움도 부유함을. 좋아하는 데에서 온다. 이렇듯 모든 괴로움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로 인해 온다.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그저 돌처럼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마음이 그곳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핵심은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기보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분별심을 내어서 괴로워합니다. 법정스님은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 말고, 사랑을 하되 사랑을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지 말고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라는 말을 풀이한 것입니다. 

호불호, 분별의 이유는? 

왜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내 안의 순수한 욕망을 다스리는 것일까요? 이 두 가지 명제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왜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계속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상태 그대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내가 좋아하는 상태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더해서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 이 모습 이대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지금 이 모습이 좋은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인데, 문제는 사람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말을 안 듣고 더 나이를 먹으면 속을 썩이고 더 나이를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빠져서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자식입니다.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만 그런가요? 모든 것이 다 변합니다. 

모든 것이 다 변한다는 사실을 더 실체적으로 뜯어봅시다. 만일 여기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 예를 들어 시계가 있다고 합시다. 변하지 않는 시계가 있다면 과거에도 이 모습 이대로 있었어야 했고 미래에도 이 모습 이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시계가 있다면 그 시계는 도대체 언제 생겨났을까요? ‘생겼다’는 말 자체가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 모습 이대로 있었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만일 무언가가 영원하려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생기지 않았는데 영원히 존재해야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생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뭔가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하다, 항상하다는 것은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언가 변해야만, 다시 말해서 생기거나 태어나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은 왜 그런가?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말라 하니 괴롭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무엇이 그 상태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집착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나를 계속 변함없이 좋아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자식, 가족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아이가 두세 살 먹었을 때는 숨쉬고 똥싸는 것만 봐도 예쁜데, 그 아이가 나이 40살이 되어서 집에 있는 것을 보면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이라 하는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변합니다.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는데 내 마음으로는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상태 그대로 있기를 바랍니다. 현실과 마음이 맞지 않습니다. 맞지 않으니까 괴롭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말라’ 했을 때 변하지 않으면 인생의 고통이나 슬픔이 없는데, 내가 아무리 ‘변하지 말라’고 빌고 애원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정하게도 끊임없이 변하니 괴롭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요. 우리가 왜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가? 내 안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불자라면 누구나 쉽게 따라올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안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는가? 이 부분을 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연기, 서로 의지하여 무언가 만들어 지는 것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연기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관계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입으로 외는 것은 반만 알고 있는 것이니다. 연기는 의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지하여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텐트를 칠 때 어떻게 칩니까? 나무막대기와 끈, 천막이 서로 의지해서 텐트가 세워집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의지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텐트라는 것이 생긴 것이에요. 

연기는 인연생기의 준말입니다. 인은 내적인 원인 혹은 직접적인 원인을 뜻하고요. 연은 외적인 원인 혹은 상황을 의미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자라난다고 할 때, 씨앗이 인이고 주변의 토양과 기온은 연, 이것들이 결합해서 나오는 싹이 과입니다. 인과 연이 합쳐지면 과가 나옵니다. 내적인 원인과 주변 상황이 만나서 결과가 나옵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을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로만 알고 있으면 무언가가 생긴다는 부분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서로 의지해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없던 무언가가 생기는가? 아니죠. 서로 의지한 것들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죠. 

연기할 뿐 자성은 없다 

텐트는 나무막대기와 끈, 천막이 의지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텐트라는 것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텐트 안에는 텐트가 없습니다. 나무막대기와 끈, 천막만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 텐트는 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텐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 텐트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죠. 

나무막대기와 끈, 천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그것들 역시 무언가 의지해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자성이 없습니다. 텐트를 텐트이게끔 하는 무언가는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텐트라고 생각할 뿐이죠. 

이것을 나의 아들에 적용해도 같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 놓은 아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감정일 뿐, 현실에 아들이란 것은 없습니다. 현실에는 살갗, 머리카락, 간, 담, 쓸개 같은 것들이 총체일 뿐이에요. 사실은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왜 집착하는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때문입니다. 이런 착각을 불교에서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공한데 공하지 않다고 철썩같이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무명입니다. 지혜롭지 못하고 생각이 밝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해서 생긴다는 연기의 도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마음도 연기한다 

같은 맥락에서 유재석의 ‘말하는 대로’ 노래에서 의미하는 순수한 욕망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봅시다. 마음이라는 것도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피부로 느끼고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서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들을 모아 마음을 만드는 겁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맛보지 않고 느끼지 않고는 마음이라는 것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내가 무엇을 보고, 내가 무엇을 듣고,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냄새를 맡고, 어떤 촉감을 느끼고, 어떤 촉각을 느끼느냐에 따라서 지금 내 생각이 생깁니다. 이런 것들에 의지해서 내 마음이 생깁니다. 의지해서 생긴다는 것은 곧 연기입니다. 텐트가 공한 것처럼 마음도 공합니다. 

이 도리를 모르면 유재석처럼 순수한 내 욕망을 찾기 위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있으면 ‘나만의 욕망’이라 여기면서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거기에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미친듯이 무언가를 할 것입니다. 나만의 순수한 욕망 역시도 연기한 것임을, 즉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연기가 인연을 포함한다 

이 시점에서 인연과 연기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우리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저 사람과 인연을 끊어야겠어.’ ‘누구와는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일을 같이 해본 적이 없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일상적으로 쓰는 인연이라는 단어의 의미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전혀 다릅니다. 인은 내적인 원인, 연은 외적인 원인입니다. 인연은 그냥 조건들입니다. 반면 연기는 이런 조건들이 서로 의지해서 무언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해서 생깁니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데 있다고 착각합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조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연이고, ‘그런 조건들이 서로 의지해서 무언가 생긴다’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연기가 인연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연기라는 큰 틀 속에 인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은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킨다’는 법정스님의 말을 해석하기 위한 밑바탕이었습니다. 이러이러한 조건에 따라서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 의지해서 무언가 생긴다는 것은 연기의 도리입니다. 내 마음이 연기의 도리에 따라서 생기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인연들이 이루어져서 내 안에 좋은 감정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하도록 조성된 조건이 바뀌면 내 감정도 바뀝니다. 흔한 말로 세상 모든 일은 다 지나간다고 합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언젠가는 지나갑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좋은 일은 그대로 이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나쁜 일은 내 눈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도 연기하기 때문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인생사 새옹지마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중국 변방의 늙은이가 말을 한 마리 키웠는데 어느날 말이 도망가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하자 늙은이가 무덤덤하게 말했습니다. “혹시 압니까? 더 좋은 말이 생길지.” 며칠 지나서 도망간 말이 돌아왔는데, 다른 말 한 마리를 더 데리고 온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축하를 합니다. 말이 두 마리가 되었으니 말이죠. 

늙은이는 이번에도 무덤덤합니다. “세상 일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함부로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늙은이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장애를 얻고 말았습니다. 와중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데 아들은 다리가 성치 않으니 차출이 되지 않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화가 연기의 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세상 일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다리를 다쳐서 장애를 가져도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일은 지나갑니다. 

인연에 따르는 마음과 지혜로운 욕망 

이 세상은 연기의 도리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구불변하다면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왜 변하는가? 이 역시도 연기의 도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해 있기 때문입니다.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고 미워하고 기뻐하는 마음도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면, 법정스님 말씀처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할 일이 아니라,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마음을 다스리고 살필 때야말로 올바른 방향을 세울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욕망을 가질 때 희망과 의지와 확신이 생깁니다. 그래야만 방향이 생기고 그 방향을 따라서 달릴 수 있습니다. 방향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달리는 것은 에너지만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혜롭게 써야 합니다. 비록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이해하고 연기의 도리로써 욕망을 지혜롭게 다스리면 마음 먹은 대로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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