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 죽음, 현실적 죽음

백중 기간에 생각하는 삶과 죽음.
의학적으로는 장기 이상, 심폐사, 세포사 등 일정 부위를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한다. 반면 우리가 인식하는 죽음의 순간은 다르다. 육신의 모습이 살아있는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오늘의 화두는 이런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언젠가는 죽을 송장을 사람이게끔, 살아있게끔 끌고가는 것은 무엇인가?

#윤회, 제사, 죽음, 천도재

백중 기간 동안 우리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의학적인 죽음과 우리가 현실적으로 피부로 느끼는 죽음, 이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학적 죽음

의학적인 죽음이라고 하면 살아 있는 생명, 유식한 말로 유기체의 생물학적인 기능이 정지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봤을 때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죽었다고 해야 하느냐 입니다. 뇌가 죽었다고 해서 죽었다고 볼 건지 아니면 심장이 멈춘 것을 죽었다고 할 건지 아니면 온 몸의 세포가 다 완전히 죽은 것을 죽었다고 할 건지 아니면 호흡을 하지 않는 그 시점부터 죽었다고 할 건지 말입니다.

의학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법적인 죽음의 기준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돌아가셨다는 사망신고를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삶과 죽음이 상당히 행정적이고 딱딱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모든 것은 행정적으로 넘어가면 다 딱딱해지고 재미없어집니다. 죽음마저도 그렇습니다.

;신체 기능의 죽음

죽음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장기 이상입니다. 신체에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장기가 있습니다. 심장, 뇌, 폐입니다. 이 세 개 중에 하나가 완전히 기능을 정지하면 사망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뇌가 완전히 기능을 정지하면 뇌사라고 합니다. 뇌에 호흡을 관장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뇌가 멈추면 호흡을 할 수 없습니다. 뇌는 죽었는데 인공호흡기를 달면 인공적으로 호흡이 되니까 죽었다고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게 뇌사상태입니다. 식물인간의 경우 뇌가 죽은 건 아니고 뇌의 기능이 대부분 정지했는데 호흡기능 등의 아주 일부가 남아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식물인간으로 5년 동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는 뉴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뇌사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뇌가 완전히 죽은 겁니다.

그 다음 삼대 장기인 심장, 폐, 뇌 세 가지가 다 정지한 경우를 심폐사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심장이 멈추면 혈액 공급이 안 되니까 뇌도 죽고 뇌가 죽으면 폐가 호흡을 못 하니까 폐도 멈춥니다. 서로 다 연관이 되어 있기는 합니다. 때문에 의학적으로, 민법상으로는 심장, 폐, 뇌 이 세 가지가 모두 기능을 정지한 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망신고를 할 때는 심폐사 하는 시점을 보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세포사가 있습니다. 온 몸의 모든 세포가 다 기능을 멈추는 겁니다. 심장, 폐, 뇌는 기능이 정지했는데 다른 몸의 세포들은 아직 기능을 하고 있는 기간을 생사중간기라고 한답니다. 심장도 멈추고 뇌도 기능을 중지하고 폐도 기능을 멈췄는데 다른 세포들은 아직 자기 기능을 조금씩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폐사와 세포사 사이에 생사중간기가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알아봤듯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칼로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봤을 때 여기까지는 살아 있고 여기는 죽어 있고 이걸 정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어떤 분이 돌아가셨다라고 하면, 숨이 멎는 때부터 옆에 있던 가족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제주들은 막 여기저기 전화하고 장례식장을 잡지 않습니까. 사실은 아직 죽은 게 아닌 건데요. 티벳의 경우에는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고승이 돌아가시고 나면 1년이고 2년이고 그대로 놔둡니다. 그러면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손발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란다는 이야기가 티벳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많이 나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은 정확한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일정한 시간을 다 포괄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두루뭉술하면 사회적으로 일처리하기가 불편하니까 민법상으로는 심폐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두는 것입니다.

현실적 죽음 ;
죽음의 인식

반면 우리가 생각할 때 죽음은 어떤 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경험한 죽음은 제 은사 스님의 죽음입니다. 2019년 2월 18에 입적하신 후 염부터 다비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염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어도 이 사람이 과연 살아생전에 그 사람인지 연결이 잘 안 됩니다. 머릿속으로는 같은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마음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아, 이거는 살았다, 죽었다. 죽은 사람은 사람으로 안 느껴집니다. 그래서 죽기 직전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사람을 보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본능적으로 압니다. 아, 저 사람은 곧 죽겠다 하고 말입니다. 저도 사실 그냥 아프다고 해서 병문안을 갔는데 그 병실에 들어가는 순간 얼굴을 보니까 산 사람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다음 날 돌아가셨고 말입니다.

다비를 할 때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다비를 다 하고 나면 남는 것은 재뿐입니다. 그 재하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살아생전의 은사스님하고는 연결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분향소에 영정사진을 처음 걸 때야 비로소 아, 은사스님께서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염하는 걸 보면서도, 다비를 할 때도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분향소에 차려진 영정사진을 보고서야 비로소 죽음을 실감했습니다. 아, 이제 은사스님은 더 이상 우리랑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지 않는구나. 영영 사라졌구나. 영영 없어졌구나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정사진은 살아계실 때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염할 때 본 시신이나 다비할 때 본 재는 살아계실 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분향소에서 영정사진을 보고서야 현실적으로 죽음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현실적으로 죽음은 육신이 어떻게 변하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영영 우리 곁에서 없어졌구나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현실적으로는 그 사람이 죽은 순간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여기서 한 가지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별개로 생각을 하는데, 예를 들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자전거가 있는데 달리는 자전거는 살아 있는 자전거, 멈춰 있는 자전거는 죽은 자전거라고 합니까? 자전거가 달리면 살아 있고 멈춰 있으면 죽었다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달리거나 멈추거나 다 같은 자전거입니다.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자동차 시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에 대해서는 살아서 움직이면 그냥 사람이라 하고 죽어서 유기체의 활동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시체라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왜 말을 따로 하느냐가 첫 번째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의문사항입니다.

두 번째, 생명이라는 게 사람의 육신에 들어와서 결합돼 있으면 이 사람은 살아 있는 거고 생명이 사람의 육신하고 분리가 돼서 빠져 나가면 이 사람은 죽은 거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과연 이 생각이 맞는 생각일까요?

흔히 혼(魂)이라고 합니다. 혼이 들어오고 나가고, 혼이 자기 몸을 못 찾아서 구천을 떠돌고, 혼이 원한을 가지면 원귀가 되고. 그렇게들 말합니다. 그런데 왜 자전거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전거가 달리고 있을 때는 그 자전거와 자전거의 생명이 결합이 돼 있고 자전거가 멈춰 있으면 그 자전거에서 생명이 빠져나갔다 라고는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제가 여러분들에게 던지고 싶은 두 번째 의문입니다.

오늘의 화두;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답을 하라는 게 아니고 한 번 생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절 집에 이런 화두가 있습니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다 송장이라는 겁니다. 송장은 송장인데 어떤 송장이냐? 말도 하고, 웃고, 울고,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성질도 내고 그렇게 하는 송장입니다. 가만히 있는 송장이 있고, 막 돌아다니는 송장이 있는 겁니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 질문을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해보십시오. 이 화두를 마음속에 꼭 넣고, 오늘 주무실 때까지 품고 계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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