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하는 마음

미운 마음이 커지면 원망이 되고, 원망이 커지면 원한이 되고, 원한이 사무치면 저주를 품는다.
원망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힘든 원인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있다는 전제로 원망은 자라난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남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여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고 통제하는 것은 부처님도 못(안) 하는 일이다.
<뚱보 비구의 일화>와 <뚱보 비구의 전생담>에 비추어 원망하는 마음의 근원을 찾아본다.

#나홀로, 마음, 수행, 알아차림,

https://youtu.be/peYtTrb6pVQ

낯선이로부터 뒤집어 쓴 화

며칠 전의 일입니다. 증심사 경내에서 마주친 한 스님이 저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스님인데 이야기인 즉 “스님이 법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왜 직원들이 와서 못하게 말리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에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같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시는 겁니다. “세상천지에 스님이 어느 절이든지 가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인데 어디 기도를 막느냐”고요. 제가 다시 “제가 잘 알아보고 챙겨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또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세 번쯤 반복하다보니 짜증이 나려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한마디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는데, 괜히 시비 붙어봐야 피곤한 일이기도 하고 증심사 평판을 생각하여 다시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넘어갔습니다.

들어보니 사정은 이렇습니다. 이 스님이 신도 두 명과 함께 참배를 와서 사시예불이 끝난 후에 목탁을 치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신도인지 종무원인지 모를 재가자가 와서 ‘사중에 말도 없이 이러시면 안 된다’며 제지를 한 것입니다.

사실 절에서 목탁을 치거나 대종을 울리는 것은 정해진 시간에 대중들이 다 주재하는 시간에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생깁니다. 큰절 같은 경우에도 목탁이나 사물의식 연습은 절 안에서 하지 않고 산속 깊이 들어가서 합니다. 대중스님들의 정해진 일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 스님은 대중생활을 잘 모르는 스님이었고 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뚱보 비구 이야기

그날 저녁에 경전을 보고 있는데 이런 일화가 나왔습니다. 이른 바 ‘뚱보 비구’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사촌이 나이를 먹은 후에 느지막이 출가를 했답니다. 이 사람은 왕족으로 오래 잘 먹고 살다보니 몸이 뚱뚱하여 사람들은 이를 ‘뚱보 비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분은 아직 출가하여 안거를 한 번도 안 지내본, 우리로 따지면 행자를 갓 지낸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왕족의 습이 남아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행동하고 승복이나 가사도 고급스럽게 입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뚱보 비구가 법당 한가운데 폼을 잡고 앉아있는데 한 무리의 비구들이 법당에 들어섰습니다. 부처님을 친견하러 멀리에서 온 비구들입니다. 이 비구들이 보기에 나이가 많은 스님이 승복도 멋진 걸 입고 있으니까 큰스님인 것 같아서 절을 올리고 발을 닦아드리는 등의 예의를 갖췄습니다.

그런데 통성명을 하고 승납을 물으니 뚱보 비구는 이번이 첫 안거이고, 이 비구들은 벌써 수십 안거를 난 고참들입니다. 고참 비구들이 화를 냅니다. 예를 갖춰서 사과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뚱보 비구가 사과를 할 사람이었겠습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부처님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생각에 당장 부처님에게 달려가 울면서 고자질을 하는 겁니다. ‘저 비구들이 법당에 들어오자마자 나한테 싫은 소리를 했다’고 말입니다. 부처님이 자초지종을 듣고서 뚱보 비구에게 고참 비구들에 대한 예의를 다 갖추었냐고 묻습니다.

“너는 고참 비구들이 왔을 때 발을 닦아주었느냐?”

“아닙니다.”

“너는 고참 비구들이 왔을 때 옆으로 비켜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가 잘못한 것이로구나.”

부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데도 뚱보 비구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지켜보고 있는 고참 비구들은 참으로 황당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뚱보 비구의 전생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뚱보 비구는 이번 생에만 이런 것이 아니고 이 전생에서도 이렇게 안하무인이었던 것입니다.

뚱보비구의 전생담

전생은 부처님이 태어나기 전이니 등장인물을 수행자라고 통칭하겠습니다. 옛날 옛적 수행자 A가 있었습니다. 그가 만행을 하다가 어떤 마을에 이르러 옹기장이의 작업장에 머물렀습니다. 해질 무렵 B라는 수행자도 옹기장이의 작업장으로 찾아왔습니다. 둘은 통성명을 하고 한 공간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밤중, 수행자 B가 밤중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 문 쪽으로 가다가 그만 수행자 A의 머리를 밟고 말았습니다. 자다가 봉변을 당한 A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수행자 B가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는데, 실은 자기 전에 수행자 A가 문이 아닌 다른 쪽에 있는 것을 봐두었던 참이었습니다. 수행자 A가 자다가 문 쪽으로 이동한 것이지요. 수행자 B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아까는 이쪽에 머리가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머리를 밟지 않게 반대쪽으로 들어가야겠다.’

그런데 웬걸, 그 사이 수행자 A도 몸을 반대로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수행자 B가 수행자 A의 목을 또 다시 밟고 만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밤중에 싸움이 납니다.

“당신은 내 머리를 밟는 잘못을 했으니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내일 동틀 때 네 머리는 일곱 조각으로 갈라질 것이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수행자 B이지만, 실수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지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데 저주까지 받으니까 화가 납니다. 수행자 B도 수행자 A를 향해 저주를 내립니다.

“내일 동이 틀 때 죄가 있는 사람의 머리에 벼락이 내릴 것이다!”

수행자 B는 수행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주를 내리고서 신통으로 앞날을 내다보니까 내일 아침 수행자 A가 벼락을 맞아서 죽을 운명인 것입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저주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고민을 하던 수행자 B는 고심 끝에 신통을 부려서 다음 날 아침 해가 아예 떠오르지 않게 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그 나라의 왕도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왕이 고문에게 묻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지 않다니 이 무슨 변고인고! 그대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아마도 두 명의 사문이 다투느라 해가 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왕은 두 수행자를 찾아 왕궁으로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행자 A가 잘못했고 해가 뜨면 A는 벼락을 맞아 죽을 지경인데, 유일하게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인 사과는 죽어도 못 하겠다고 합니다. 왕은 신하들을 시켜서 강제로 수행자 A의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시킵니다.

“수행자 B여! 이렇게 A에게 사과를 시켰으니 이제 해를 띄워주십시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왕이시여! 이 저주는 수행자 A가 자발적으로 사과를 해야지 억지로 해서는 풀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고, 사과만 하면 수행자 A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데도 그는 완강합니다. 그래도 사람 목숨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한 수행자 B가 묘안을 냅니다.

“수행자 A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머리 위에 머리통과 닮은 진흙을 만들어 매단 후 내가 해를 띄우는 순간에 몸과 머리를 호수에 담그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면 호수 위에 뜬 진흙이 대신 저주를 받게 될 것이오.”

수행자 B가 신통을 부려서 해를 띄우고자 수행자 A는 재빨리 호수 안에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머리 위의 진흙은 7조각이 나고 수행자 A는 무사했더라 하는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고요해지지 않는 원한, 고요해지는 원한

그가 내게 욕을 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패배시키고 내 물건을 훔쳤다.’

이렇게 앙심을 품는다면 그 원한은 고요해지지 않으리라.

그가 내게 욕을 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패배시키고 내 물건을 훔쳤다.’

이런 생각을 품지 않으면 그 원한은 고요해지리라.

게송만 놓고 보면 참 쉽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괴로우니 네가 밉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한 번 미운사람이 생기면 그 인간을 보기만 해도 속에서 열불이 나고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망, 할 일 없이 뒹굴거릴 때의 마음

그런 걸 원망(怨望)이라고 합니다. 증오하는 마음입니다. 원(怨)이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누워 뒹굴 원(夗) 밑에 마음 심(心)을 썼습니다. 풀이하면 원망하는 마음은 누워서 뒹굴뒹굴 할 때의 마음입니다. 누워 뒹굴 원(夗)은 저녁 석(夕)에 사람 인(人)을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저녁에 사람이 무엇을 합니까? 해 떨어지고 할 일이 없으면 누워서 자야하는데 잠이 안 옵니다. 왜입니까? 화가 나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벌떡 일어납니다. “이 인간 때문에 내가 잠이 안 와!” 이런 모양을 글자로 만든 것이 누워 뒹굴 원입니다.

이렇듯 원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입니다. 원망하면 그런 마음과 욕구가 내 안에 가득 차있는 것입니다. 원망이 강해지면 무엇이 됩니까? 원한(怨恨)이 맺힙니다. 한(恨)은 마음 심(忄) 변에 어긋날 간(艮)이 붙어서 만들어졌습니다. 마음이 어긋난 것입니다. 내 생각하고 저 인간의 행동이 어긋나기에 마음이 괴로운 상황을 글자로 쓴 것이 한입니다. 원망이 두 배가 되어서 원한이 된 것입니다.

원한이 커지면 무엇이 됩니까? 마음속으로 저주(詛呪)를 품습니다. 두 한자 모두 주문이라는 뜻입니다. 남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속으로 ‘저 놈 안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잘 되라고 하는 기도이고, 저주는 못 되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어서 미운 마음이 커지면 원망이 되고, 원망이 커지면 원한이 되고, 원한이 사무치면 저주를 품습니다.

원망, 남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

이런 상황들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전 상황에서는 내가 힘든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있다는 전제가 있을 겁니다.

수행자 A는 ‘내가 잘 자고 있는데 저 사람이 목을 밟아서 화나게 했다’고 생각했고, 뚱보 비구는 ‘나는 법당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저 사람이 왕족인 나에게 감히 절을 하라고 윽박질렀기에 내가 불쾌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이 생기고, 원한이 되고, 결국에는 저 놈 잘 못 되라는 저주를 내린 것입니다.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그런 생각을 마라. 그런 생각을 안해야지 네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안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전에는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까 남편이 사행성 주식이라든가 부동산 투기라든가 노름이라든가 이런 걸 너무 좋아해서 집에 돈이 모일 일이 없습니다. 30년을 그렇게 살면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고 남편에 대한 원망이 쌓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이유는 각각 다르겠지만 비슷한 경험들을 하셨을 겁니다.

원망이 쌓이고 쌓이고 쌓였습니다. 저 남편은 노름밖에 모른다, 가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하고 단정지어버립니다. 그리고 내 말대로 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물론 잔소리를 하니까 그나마 이 정도라도 유지하고 살지 잔소리마저 없었으면 이미 집도 날렸을지 모릅니다. 내 덕에 이나마 살고 있는데 남편이 내 뜻대로 안 해주니까 화가 납니다.

사실 이럴 때 처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네 뜻대로 하고 사세요. 대신에 생활비 통장은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건드린다면, 안녕히 가세요. 우리 갈라섭시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순간, 내 인생이 괴로워진다

그러면 됩니다. 전혀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화가 납니까? 남편이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의 인생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괴로워지게 마련입니다.

남의 인생에는 굳이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남’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의 남이라면 관여하고 싶어도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남이니까요. 그런데 남이지만 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족, 가까운 친구, 직장 동료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인생살이에 오지랖을 떨어서 ‘이래라 저래라’, ‘이러네 저러네’ 간섭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짜증이 유발되고 화가 나고 마음에 미움이 쌓이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돈 버느라 일 하느라 연애하느라 바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할 일이 없으니까 오만데 다 간섭을 합니다. 그게 다 애정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부처님도 못 하는 것, 남의 인생에 간섭하기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못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남의 인생에다 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누구에게도 ‘이 길로 가라’고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시하실 뿐입니다.

“네가 갈 수 있는 길은 이런 길 저런 길이 있다. 그런데 내가 살아보니까 A, B, C라는 길 중에 A라는 길이 가장 행복한 길이더라. 가고 안 가고는 너의 선택이다.”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지 못합니다. 부처님도 못 하는 게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명심하면 인생을 그나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려 말고 내 인생이라도 제대로 살자’는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법문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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