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배하는 질서였던 과거의 ‘문화’
1960년대 초반 박정희 정권이 막 들어서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움직임이 태동할 때, 저는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부산 시내에 개울도 흐르고 숲도 우거져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려면 마을을 벗어나서 산을 올라가야 했지요.
마을 어귀에는 어릴 때 기억으로 좀 무서운 분위기가 나는 성황당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집에서 물을 떠놓고 무언가를 빌었습니다. 문지방을 밟지 말라, 모서리에 앉지 말라, 빗자루를 아무데나 세워놓으면 도깨비로 변한다 등등 우리 일상적인 삶을 지배하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어른들이 하니까 당연히 따라 해야 하는 규칙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굉장히 옛날인 것 같지만 불과 30~40년 전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고, 미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질서, 규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요즘 말로 하면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이러한 문화가 힘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요가와 템플스테이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요가와 템플스테이라는 두 행위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두 가지 요소는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가, 인도문화 중 가장 흥행한 상품
먼저 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법문을 시작할 때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문화를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질서와 힘이라고 했지요.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요가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인도의 문화가 전 세계적인 상품으로 가장 훌륭하게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여성분들이 다이어트의 일환으로 요가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건강관리를 위해서 요가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신의 안정, 힐링을 위해서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요가는 대중화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요가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돈만 있으면 누구든 가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상품화가 잘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세계에 수출한 인도 문화 중에 가장 성공한 것이 요가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돕니다.
우리는 요가는 다이어트, 심신안정, 치유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비즈니스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실제 인도에서 요가란 무엇일까요?
흔히 인도의 종교를 힌두교라고 합니다. 힌두교는 종교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집어서 종교라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힌두교는 말하자면 인도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1960~70년대에 금기시 하거나 지키려고 했던, 미신에 가까운 삶의 질서처럼 말입니다.
본래 요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힌두교의 중심 사상은 업과 윤회입니다. 악업을 정화해야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한다는 것이 힌두사상의 핵심입니다. 이 사상의 핵심은 ‘이 세상은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와 같습니다. 부처님도 인도 사람이었으니 인도인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고민하던 문제를 똑같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짓된 나를 벗어던지고 참 나를 깨달아야만 하며, 그럴 때만 윤회의 사슬을 끊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업과 윤회의 바탕이 됩니다. 요가라는 것은 거짓된 나를 벗어던지고 참 나를 깨닫기 위한 방법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기 훨씬 전인 3000~3500년 전 고대 인도에서는 제사를 정확하게 지내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발전하여 1500년쯤 전에 위에서 정리한 현재 힌두교의 핵심사상이 자리 잡았지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참 나를 깨달을 수 있는지 였습니다. 그 방법으로 수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수행의 방법이 바로 요가였습니다. 인도에서의 요가는 수행입니다. 해탈하기 위한 수행을 요가라고 말하고, 특히 고대인도에서 수행을 통해 해탈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들을 요가행파(수행파)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인도사회에서 요가는 수행 전반을 의미합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브라흐만과 내가 합일되는 것이고, 브라흐만과 내가 합일되기 위한 수행을 모두 요가라고 합니다. 수행은 크게 세 단계, 세분화하면 여덟 단계로 나뉩니다. 먼저 크게 세 단계를 살펴보면, 먼저 예비수행의 단계가 있고 내적 기술 즉 테크닉의 단계가 있고 그 후에 명상의 단계가 있습니다.
요가수행의 8가지 단계
예비수행의 단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계율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덕목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의 내용은 폭력을 행하지 않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진실된 말만 하는 것,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 것,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의 오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부처님이 오계라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것이 아니라 당대에 통용되었던 가치 중에서 지킬 것은 포용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고행과 경전 학습과 예불입니다. 이 두 단계를 통해 어느 정도 예비 수행의 단계가 갖춰지고 최소한의 심신 안정이 이뤄진 후에야 비로소 세 번째 단계로 요가를 합니다. 이것을 하타요가라고 합니다. 요가에는 여러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결가부좌도 있고 비트는 자세도 있고 비둘기 자세, 원숭이 자세 등등. 이런 좌법을 아사나라고 하는데요. 이런 아사나를 왜 하는가 하면, 그러한 자세를 취하기 위한 테크닉을 익히면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육체를 조복시키는 것입니다. 수행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좌법을 행합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호흡을 조절합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수행을 합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고 앉아있으면 마음이 계속 움직입니다. 소리가 나면 소리를 따라가고 잡생각이 들면 망상에 끌려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알고 있는 요가는 첫 번째 단계의 요가를 의미합니다. 호흡이라던가 마음, 감각, 보고 듣고 느끼는 이전 단계입니다. 하타요가 즉 외적인 기술을 익힌 후에야 비로소 명상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요즘은 명상도 하나의 비즈니스가 되었습니다. 편하게 앉아있으면 조용한 음악이 깔리고 이어서 목소리 좋은 성우가 명상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인도에서 하타요가 다음에 명상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이런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마음을 한 군데 집중하는 수행입니다. 배꼽, 미간, 콧잔등 등 어딘가 하나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선정의 단계입니다. 내가 있고 내가 무언가를 본다는 생각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아직 삼매에는 들지 못했지만 ‘주객의 분별을 벗어나야겠구나’ 라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있으면서 분별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가 삼매의 단계입니다. 이런 단계로 삼매에 들어가야 브라흐만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해탈할 수 있습니다.
‘아사나’가 떨어져 나와 ‘요가’로 통용
이것이 힌두교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런 여덟 단계를 거쳐서 수행해야 괴로운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 윤회의 속박을 벗고 해탈할 수 있다고 인도의 수행자들이 주장했고, 그렇게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세 번째 단계인 아사나 즉 육체적인 테크닉과 자세만 따로 떨어져 나와 전 세계에 확산되었습니다. 수행의 단계이지만 전혀 다른 용도로 대중화된 것입니다. 아사나가 요가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고 비즈니스가 된 것이지요. 비즈니스가 되었다는 말은 상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콘텐츠가 되어야 사회적으로 통용됩니다.
우리는 문화도 상품으로 봅니다. 문화사업이라고 하지요. 문화를 사고파는 것입니다. 인도사회의 고유한 문화의 하나였던 요가 역시 인도사회를 벗어나면서 자본주의의 상품이 됩니다. 인도사회의 고유한 문화 그 자체로써 퍼진 것은 아니지만 문화상품이 되어서 인도의 문화가 확산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힌두교의 개념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해도, 요가 수행의 여덟 단계를 알지 못해도, 돈만 내면 누구나 요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템플스테이의 원형, 객승·성지순례 문화
템플스테이도 한 번 들여다볼까요? 템플스테이는 말 그대로 템플 안에서 스테이 하는 것입니다. 절에 와서 하룻밤 자는 것. 숙박업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인정하는 영향력 있는 문화상품 중 하나가 템플스테이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어떤 지점이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상품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쯤 전에 송광사에서 원주소임을 봤습니다. 당시에도 템플스테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고요, 월정사나 직지사 같은 일부 사찰만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을 했습니다.
송광사 같은 절은 전국의 신도들이 성지순례를 오는데 당일치기로 다녀가기에는 너무 멀리에 있으니 하루 이틀 묵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단체로 버스타고 와서 밥 먹고 예불 보고 기도를 하고, 후원의 큰방에서 여러 명이 자는 형태였습니다. 기도하러 오는 분들에게 돈은 안 받지요. 대신에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 일들을 하고 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템플스테이를 한다면서 돈을 받으니까 일을 못 시키게 됩니다. 비용을 내고 오는데 감자 깎으라 할 수 있습니까? 청소하라고 시킬 수 있나요? 예불도 자유가 되었지요.
원래 우리나라 사찰의 일반적인 문화는 누구든지 절에 와서 기도하면서 묵어갈 수 있고, 그러면서 일손을 거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문화 ‘상품’이 되면서 불자가 아니더라도 사찰의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절에 와서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돈을 내고 예불도 해보고 108배도 하고 스님과 차도 마셔보고 포행도 하는 것이지요.
문화상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요가나 템플스테이나 같은 맥락입니다. 요가는 인도사회의 뿌리 깊은 수행 전통이다가 그 중의 특정한 부분만 떨어져 나와 전혀 다른 용도로 확산되었고요. 템플스테이는 절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하나의 객승문화가 하나의 상품이 된 것입니다.
물론 템플스테이로 발전한 데에는 여러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데, 어차피 호텔에서 잘 거 사찰에서 우리나라 전통 문화를 직접 느끼고 체험하게 해준다는 것이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아무튼 핵심은 불교의 전통적인 문화를 하나의 상품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입니다.
경제 논리에 따라 문화도 상품으로 소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왜 문화는 상품이 되고 있을까요?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몇 십 년 전만해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 질서에 따르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무언가를 구입해야 합니다. 돈을 얼마를 버느냐에 따라서, 어떤 집에 사느냐에 따라서, 어떤 요리를 먹느냐에 따라서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요즘은 우리 삶의 지배적인 질서 같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상품이 되어 한 번씩 소비할 따름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과 일상이 불자다운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계를 지키고 경전을 학습하고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인 부처님에게 헌신하는, 이런 모습이 우리 삶과 질서 속에 녹아들어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불자라면 불교의 교리가 우리 삶의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이 과연 그렇습니까? 일주일에 몇 시간, 절에 나와서 기도하고 법문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있지만 그 외의 나머지 시간은 종교가 없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매순간의 삶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세팅되어 있지 않다면 다를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에 예불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잠깐의 시간 외에는 보통 사람, 종교가 없는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기독교가 저지른 과오를,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탈레반에서 나타나는 이슬람의 행태가 그렇듯 말입니다. 이것은 따로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곧 정치고 경제고 문화고 예술이고 모든 것입니다.
몇 백 년 전까지는 기독교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자니 돈을 많이 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고, 종교에서 경제활동이 분리되고, 문화도 분리되고, 제일 나중에는 신앙만 남았습니다. 삶은 자본주의의 삶을 따라가고 주말에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고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만 종교는 역할합니다.
불자의 삶, 불교가 삶이 되는 것이 관건
불자들의 삶이 이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계를 지키고 예불을 하고 경전을 학습하는 것이 우리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야 합니다. 왜 하는지 몰라도 일단은 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고 내가 자연스럽게 행하듯이, 공양할 때는 공양게송을 하는 것이 내 자식들에게, 내 자식의 자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자비사상이 무엇인지, 연기란 무엇인기를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반대입니다. 교리를 배우고 수계를 받았으니 불자이기는 한데 일상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불교에 대해 좀 아는 것이지 진정한 불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불교가 우리 삶의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요가가 원래 인도에서 가지는 수행의 역할과 용도와 다르게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현상을 볼 때, 템플스테이가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이런 것입니다. 문화를 상품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녹아든 무엇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정신이 우리 삶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매 순간 살아가면서 그것을 체감해야 합니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죄의식이 일어나야 합니다. 생선을 먹고 고기를 먹을 때 불살생의 계율을 떠올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는 질서나 문화, 정신이 사라진 사회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상품이 되어서 필요하면 그때그때 사서 소비하면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모습을 되새기며,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질서가 되고 도덕이 되고 규범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