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인간관계, 진정한 친구란?

누구나 진정한 친구를 바란다. 변함 없는 친구에게서 위로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나 영원한 우정이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는 현실에 실재하는 친구가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놓은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친구라는 개념이 아바타임을 알고 현실의 친구와 끝임없이 동기화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의 친구도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변함 없는 우정과 친구를 바라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변함 없이 정신적, 정신적 이익을 주는 사람을 원한다. 이익을 바라는 것은 왜인가? 뿌리 깊은 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변함 없는 친구를 만들고 싶다면 나를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자기 성찰의 힘을 통해 아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 대로 사는 길이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는 방법이다.

#마음, 알아차림, 우정, 친구

위로를 바라는 마음은 왜 생길까?

코로나19로 인해서 잠정 중단되었던 수요법회가 재개되었습니다. 수요법회에 나온 한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위로를 바라는 마음은왜 생기나요?” 오늘은 이 주제를 가지고 인간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위로를 바라는 마음은 왜 생길까요? 첫 번째, 사람은 항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혼자 고립되어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본 전제이며 출발입니다. 

무리를 짓고자 하는 욕망, 즉 관계욕구가 왜 위로를 싶다는 마음으로 표현되는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안에 있는 아상(我像)때문입니다. 아상은 내가 있다는 생각 혹은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마음과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계욕구가결합되면서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더해서 인간관계는 왜 쉽지 않은가? 인간관계의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앞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데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이 없는 인간관계, 친구

인간관계는 왜 어려울까요? 인간관계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경우가 친구 관계입니다. 친구 이외의 다른 관계에는 다른 목표가 들어있습니다. 직장의 직장상사와 부하 관계에는 회사 일을 한다는 목적이 들어있고, 가게의 주인과 손님으로 만나는 관계에서는물건을 산다고 하는 목적이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역시 이미 태어날 때부터 관계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반면 친구관계는 다릅니다. 같은 동네에서 같이 노는 사이가 친구입니다. 한자로 벗 붕(朋)이라 표현하면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하는동창의 개념이고요, 벗 우(友)를 쓰면 같은 뜻을 가진 사이를 지칭합니다. 일반적으로 친구라고 하면 기존에 정해진 관계나 틀 없이 같이시간을 보내는 사이입니다. 때문에 확연하게 정해진 목적이나 용도가 없는 친구 사이에서 인간관계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템플스테이에 온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친구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왜 친구 사이에 싸우기도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것일까요? 왜 인간관계는 쉽지가 않은 것일까요?

친구는 내 마음이 만든 아바타

첫 번째. 내가 보고 이야기하는 저 친구는 내가 만든 아바타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 놓은 이미지입니다. 내가 내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저 친구의 아바타와 상대하는 것이지 현실에 있는 그 친구와 내 마음이 대화하고 같이 노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형태를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마음이 내는 냄새를 코로 맡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데 어떻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마음과 친구의 마음은 서로 직접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만날 수 있는매개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마음은 마음 안에 있는 것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정보가 마음 안으로들어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상대하는 것은 실제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이미지, 다시 말하면 그 친구의 아바타입니다. 

실재하는 네가 아닌 내가 만든 이미지

왜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연애를 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걸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현실에 있는 그 사람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아바타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콩깍지가 씌어서 그 사람에 대한 아바타가 엄청나게 멋있었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현실에 있는 그 사람의 정보가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마음 속 아바타의 모습이 바뀐 겁니다. 그러면 실망을 하죠. 싫어지면 관심이 줄어들고 예전같이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헤어지는 거죠. 

친구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 친구다’라고 생각한 그 사람은 현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내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입니다. 아바타는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싫어하면 싫어하는 모습으로, 좋아하면 좋아하는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인간관계의 본질입니다.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 두 개가 맞아 떨어지지않는 겁니다. 쉬운 말로 한 번 미운털이 박히면 아무리 그 사람과 잘해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미운털이 빠질 때까지는요. 

실재와 아바타의 실시간 동기화 ‘불가’ 

두 번째. 현실의 그 친구도 계속 변하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친구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이런저런 계기를 통해서 실제 그 친구와 내 마음 속 친구가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동안 현실에 있는 친구도 계속변했습니다. 나이도 먹고 성격도 변하고 경제력이나 사회관계도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5년 전의 그 친구와 1년 전의 그 친구와 오늘의 그 친구는 다릅니다. 바뀌면 바뀌는 대로 계속 내 안에 있는 아바타를 수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건 거의 불가능하죠. 때문에 인간관계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전제로 깔아두고 다음 이야기를 해봅시다. 마음은 마음끼리 절대로 접촉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은 항상마음 안에 무언가를 만들어서 그놈하고 상대를 합니다. 내 마음이 ‘내것이다’고 생각한 대상이 있을 때, 실제 그 대상에는 어디에도 나의소유라는 표시가 없습니다. 

마음은 실재를 소유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저 차는 내 차야.’라고 할 때, 자동차 등록증을 통해서 내 소유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사회적약속일 뿐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종이에 새겨진 잉크자국일 뿐이지요. 그 잉크자국을 보고 사람들이 서로 약속을 한 것이지, 실제 자동차에 어떤 표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마음은 무언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실제 세계에 있는 무언가를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마음 자체가 볼 수도 들을 수도냄새 맡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나에게 애인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자식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내 마음속에 아바타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음 속에 있는 것 뿐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아바타에 대한 강한 소유의식을 우리는 애착, 집착이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애착하고 집착하는 것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내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입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인간관계의 본질이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친구와의 인간관계는 실재하는 친구가 아닌 내 마음이 만들어 놓은 아바타와의 관계이며, 현실의 친구와 아바타인 친구를 맞춘다고 해도 현실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맞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맞지가 않는 마음 속의 이미지를 소유하려고 것, 이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힘듭니다. 

이상적인 친구는 ‘변함 없는’ 친구

인간관계의 가장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친구관계를 놓고 봅시다. 우리가 우정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붙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영원한우정’이니 ‘순수한 우정’이라는 형용사가 붙습니다. 왜 그런 형용사가 붙을까요?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영원하지못하고 우정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사전적 정의 말고,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실제 우정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찾아봤습니다.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걸고 당신이 생각하는 친구에 대한 정의를 공모했다고 합니다. 1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모두가 나를 버릴 지라도 오직 그 사람만은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는 사람이 친구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이 말은 중생들의 마음속에서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친구의 정의입니다. 지치고 힘들고 괴롭고 슬플 때 다가와서 위로해주고 달래주는존재입니다. ‘너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변함없이 이익을 주는 사람

수요법회에서 받았던 질문은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에 대한 정의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힘들고 괴로울 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죠. 

‘이익’이라는 표현을 쓰면 경제적이나 물질적인 이익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친구와 사귀면 풍족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이익만 이익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이익이나 정서적인 이익도 포함됩니다. 정신적으로 괴롭고 정서적으로 힘들 때 힘이 나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면 그로부터 정서적, 정신적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들로부터 바라는 것은 사실 이익입니다. 친구라는 사람이 나에게 이익을 제공해주면 좋고, 이익을 제공하지 않으면 별로고, 오히려 그 친구가 물질적이나 정서적으로 나의 이익을 뺏어가면 그 친구가 싫은 겁니다. 네가 잘해주면 나도 잘해주고 네가 못해주면나도 못해주는 것이 현실에서의 인간관계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내가 좋을 때든 힘들 때든 한결같이 나에게 힘이 되어 주고 버팀목이 되어 주는 존재입니다. ‘한결같다’에 방점을 찍는 겁니다. 

현실의 친구와 이상의 친구

인터넷에 보니까 또 ‘불교에서 말하는 네 가지 친구 유형’이라는 글이 떠돌던데요. 부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저는 어디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글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꽃과 같은 친구, 저울과 같은 친구, 산과 같은친구, 땅과 같은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꽃과 같은 친구는 화려하고 예쁜데 시들고 나면 별 볼 일 없는 친구입니다. 자기가 좋을 때만 나를 찾고 자기가 괴로울 때는 나를 찾지않는 친구입니다. 스스로 활짝 핀 꽃 같을 때만 나를 찾는 친구입니다. 저울 같은 친구는 재는 친구입니다. 누가 나에게 득이 되는지 저울을 달듯이 재서 만남을 가지는 친구입니다. 이 두 가지 유형은 현실에서 보는 친구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 두 유형은 우리가 바라는 친구 유형입니다. 산과 같은 친구는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는 친구입니다. 내가 어떤 상태일지라도 친구가 한결같이 나를 반겨주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이 든든한 친구입니다. 땅과 같은 친구도 같은 맥락입니다. 땅은 사람을 살게 하고 곡식을 길러냅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를 베푸는 것이 땅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언제나 나를 지지하는 친구입니다. 물론 이런 이상적인 친구는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도 이렇게 못 해주는데 누가 나에게 이렇게 해줍니까? 

아상이 있어 이익을 바란다

이렇게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친구는 한결같은 친구지만 현실의 친구는 이익에 의해 좌우됩니다. 왜 나에게 정서적으로 이익이되지 않거나 심지어 이익을 해치는 친구는 싫어하는 걸까요? 짜증나고 화나고 슬프게 하는 친구는 왜 싫을까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사람은 나도 모르게 ‘나는 소중하다’ ‘나는 특별하다’ ‘내가 아니면 나를 누가 지키나’ 하는 생각을 뿌리 깊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불교적으로는 아상이라고 합니다. 

아상이라는 것을 흔히 오해합니다. 잘난 척 하는 사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을 두고 아상이 높다고 표현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평범하고 선량하고 헌신적이고 밝은 사람에게도 아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상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고 이것을 직시하거나 깨닫지 못하면 양의 탈을 쓴 늑대[양두구육]에 불과합니다. 

아상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제가 말씀드리면 누군가는 반문할 것입니다. 나는 잘난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힘들다면 나에게 아상이 있는 겁니다. 

아상 있는 자의 돌탑 쌓기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포행길에 조그맣게 돌탑을 만들고 있는데요. 조금 만들어 놓으면 무너져 있고, 열심히 쌓아 놓으면 무너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엊그제부터는 오가는 길에 틈틈이 좀 큰 규모로 돌탑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등산객이 지나가다가“돌탑을 참 엉성하게 쌓고 있구만.” 하고 가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살짝 상했습니다. 왜 기분이 상했나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잔소리 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 속에는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특별하다.’ 라는 마음이 깔려 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의 행위를 두고 평가를 하니까 그 마음이 툭 튀어나온 겁니다. 

그렇게 말을 한 등산객이 그냥 지나가면 좋은데 다가와서 말을 겁니다. 저한테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자문자답 식으로 말을 합니다. “절에 가면 항상 탑이 있는데 말이야. 탑이라는 게 왜 절에 있을까? 스님 알아요?” 기분이 좀 상해있는 상태라서 대답을 빨리 안 했더니 자기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옛날에 부처가 죽었을 때 제자들이 사리를 가져가서 어쩌고 저쩌고…” 

나는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지죠. 그 사람이 또 다시 묻습니다. “왜 스님을 스님이라고 부를까?” “글쎄요. 특별한 유례가 밝혀진 바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스님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승(僧)님, 승님, 하다가 스님이 된 게 아닐까요?” “일리가 있네요.” 

제가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니 또 말을 겁니다. “그런데 스님, 이 동네 사람 아닌 것 같은데. 저쪽이죠?” “네 뭐 그렇습니다.” “그래, 저쪽 사람들은 말투가 안 고쳐져. 이쪽 사람들은 서울 가면 서울 말투 쓰고 고쳐지는데 저쪽 사람들은 안 바뀌어.”

저는 기분이 점점 더 안 좋아집니다. 나보고 어쩌라고? 싶은 거죠. 그러고는 제 고향을 자꾸 묻는 겁니다. “그거 알아서 뭐하게요?” 대답했더니, “내가 곧 80이 다 되어 가는데 말이야.”라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60입니다. 적은 나이가 아니죠. 그러더니 제가 더이상 대꾸를 안하니 그냥 가더라고요.

이토록 평범한  ‘아상’ 

만약 나에게 아상이라는 게 없었다면 그 사람과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저 사람이 잘 못 생각한 게 아닐까?’ 정도에서 멈추지, 소위 말해서 ‘빡이 치는’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는 아직 득도를 못한 중생이기 때문에 아상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의 집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말을 하면 짜증이 나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내가 정성 들여 돌탑을 쌓고 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말은 얹으니까 기분이 나쁜 겁니다. 이런 경험은 살면서 누구나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짜증나게 말이야.” 하는 선에서 끝납니다. 

제가 출가를 하고 행자 생활을 끝내고 사미계를 받아 강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행자들은 이동을 하거나 걸어갈 때 손을 흔들면 안 됩니다. 두리번거려서도 안 됩니다. 항상 차수(배꼽 앞에 두 손을 모으는 것)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생활을 8개월 정도 하다 보니까 몸에 익어버립니다. 우스개 소리로 행자생활을 하다가 때려 치우고 도망갈 때도 차수를 하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정도로 습관화가 되니 사미계를 받고도 항상 차수를 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 스님이 “스님, 이제 행자가 아니니차수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행자 때는 스님들이 그렇게 따뜻하게 말을 걸어준 적이 없으니 그 말을 듣자 너무나 감동적인 겁니다. ‘아, 나를 인간 취급을 해주다니!’

무슨 말이냐 하면요, 행자 때는 내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아상이 억눌려 있었는데 사미계를 받고 나니 원상태로 돌아온 겁니다. ‘이제는 손을 흔들고 다녀도 되는구나. 신난다!’ 그때 처음으로 아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마음 깊이뿌리내려 있는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인간관계가 힘든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마음이 움직이는데, 상대방도 똑같지 않겠습니까. 

이상적인 친구를 곁에 두는 법

각설하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친구를 어떻게 하면 내 곁에 둘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의 방법만 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겉과 속이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겠지만요, 겉으로라도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친구가 돈을 떼먹어도,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아도 만났을 때는 환하게 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그렇게 만드는것보다 나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 스스로 한결같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친구가 내 험담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수 있을까요?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마음이 생기면 한결같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캐치해야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를 알아차려서 다스리고, 배신감이 일어나면 배신감을 알아차려서 다스려야 합니다. 내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결같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통찰의 힘

다시 말하면 자기 통찰의 힘이 강해야 합니다. 결국 결론은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불교의 수행은 단 하나입니다. 언제나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도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자기 성찰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지금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있는가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자기 성찰의 힘이 커지면 나의 인간관계도 좋아지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발전하면 부처님 말씀대로 자타가 일시에 성불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것이 요원하다고 해서 절에 올 때만 기도를 하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는 우리가 받는 겁니다. 친구때문에 마음 아프고, 인간관계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일희일비 하면서 고통속에서 살아가는겁니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통찰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정리합니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이익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익에는 경제적인 이익 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이익도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한결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가? 내가 한결같은 친구가 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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