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참선강좌, 참선요지 8

참선요지 마지막 시간. 허운스님의 법문으로 알아보는 공부하는 방법.
공부하면서 많은 조사어록과 큰스님들의 법문을 접하게 된다. 끽다거, 차나 한 잔 들라는 말과 모든 연을 쉬어버리라는 말, 있음과 없음의 두 갈래 길이 난 곳을 간다는 말, 생사에 윤회한다는 말, 모든 사물이 꿈이고 허깨비 같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모든 비유가 향하는 곳은 결국 처음이다. 참선의 목적이다. 마음을 밝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위의 모든 비유는 화두를 드는 마음 자세에 대해 이르는 말이며, 모든 망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참 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을 다시금 다시금 설명하는 말이다.
때문에 깨닫지 못한 우리 같은 범부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정진 수행하는 일이다. 참선의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그것이 곧 수행의 동력이 되며, 그것이 바로 불교의 참된 신심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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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HbsXd680npk&list=PLoHDOofmKm4ON5yKz0g6VRRFWuIXtUFbc&index=8

오늘은 제4장 제석보다시중除夕普茶示衆, 제5장 수행과 불수행不修行을 공부합니다. 이 두 장을 공부하면서 대승불교에서 나온 간화선에 관련된 법문이나 조사어록의 패턴을 살펴보고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제4장. 섣달그믐 저녁 보다普茶 때의 법문 (60p)

60쪽부터 시작되는 제4장의 내용은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니 게으름부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61쪽에 나와 있습니다.

황천길에는 노소의 구별에 없고 외로운 무덤은 소년의 것이 많은 법입니다. 어쨌든 일찌감치 노력하여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죽음은 노소와 빈부를 가리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젊다고 아직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조주스님의 끽다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주스님이 새로 온 스님에게 “여기 와 본 적이 있소?”라고 묻고 아니라고 하자 “차나 한 잔 드시오.[喫茶去]”라고 말하고, 다른 스님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원주스님에게도 마찬가지로 차나 한 잔 마시라고 이야기 했다는,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차나 한 잔 먹음세.”로 대변되는 끽다거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62쪽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바로 차를 마시고 떡을 먹고 있는데, 알겠습니까? 만약 알지 못한다면 바로 그 몸으로 차를 마시는 것은 누구이고, 떡을 먹는 것은 누구입니까?

조주스님은 자신을 찾아온 스님들에게 “여기 와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와본 적이 없다.”고 하자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조주스님의 첫 질문에 주목합니다. 첫 질문에 상대방이 와본 적이 없다고 하면, 첫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조주스님이 여기는 어떤 곳이라는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다는 것이 우리 같은 범인들의 생각입니다.

끽다거, 화두를 두는 마음 자세

그런데 이 일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밖의 상황, 내 밖의 조건, 망상과 생각을 일으키는 인연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인연들로 인해서 망상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이 차를 마시라고 한 것은, 당신의 질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면서 ‘차를 마시는 이놈은 도대체 누구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을 찾아온 스님들이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은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이놈이 누구인가?’라는 화두 참구인 것입니다.

이것이 끽다거를 바라보는 허운스님의 해석입니다. 결국 화두를 드는 마음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요컨대 일체를 놓아버려서 범정凡情과 망념이 자신의 오묘하게 밝은 참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범부의 마음만 없애라. 성인의 경해가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연을 쉬어버리는 것, 참선의 선결조건

조사어록이나 법문을 들을 때 항상 마음속에 주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참선요지> 제일 처음에 나오는 참선의 목적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는 것.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것은 모든 인연을 쉬는 것 또는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책의 앞장으로 돌아가 18쪽을 펼쳐보십시오.

달마대사와 육조스님이 학인들을 가르친 가장 긴요한 말씀으로는 “모든 연을 함께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연을 놓아버린다’ 함은 곧 ‘온갖 연을 놓아버린다’는 뜻이며, 그래서 “온갖 연을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 두 마디 말이 실로 참선의 선결조건입니다.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는 것 또는 모든 인연을 쉬는 것은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 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선의 선결조건입니다. 이 말이 62쪽에 똑같이 반복됩니다. ‘일체를 놓아버린다’라고요.

일체, 모든 인연, 모든 것은 다 같은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 마음 밖에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보는 것, 내가 귀로 듣는 것, 내가 냄새 맡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일체이며 인연입니다. 인연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이런 것들이 나의 인식작용과 인연이 되어서 내 안에 망상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서 라면 광고가 나온다면, 그 광고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고, 곧바로 이어서 라면이 먹고 싶은 마음이 들고, 라면을 끓이러 일어납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과정은 내 밖에 있는 라면의 이미지를 조건으로 하여 내 안의 인식작용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라면이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고, 이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라면을 끓이러 가겠다’는 의지가 생깁니다.

결국 이런 것들이 인연지어지기 때문에 일체를 모든 인연, 반연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은 모든 인연을 쉬는 것이고 일체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의 선결조건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것 말입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착각을 깨달으면 망상이 곧 참 마음

범정과 명념이 자신의 오묘하게 밝은 참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일체를 놓아버리면 자연스럽게 망상이 제거됩니다. 망상을 여기에서는 범정 즉 범부의 감정과 명념이라고 했습니다. 망상이 제거되면 참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허운스님이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했지만, 이런 표현은 망상이 따로 있고 참 마음이 따로 있어서 망상을 걷어내면 참 마음이 드러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마음과 생각을 별개로 나누면 이해가 쉽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따로 있지는 않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편의상 별개의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망상이 따로 있어서 참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만 바꾸면 그 망상이 곧바로 참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착각입니다. 지금까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동안 망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참 마음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개념이 어려울 수 있으니 허운스님도 마치 별개인 것처럼 표현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보니까 허운스님도 혹시 사람들이 망상과 참 마음을 다른 것으로 생각할까봐 사족을 달았습니다. 범부의 마음만 없애면 성인의 견해가 따로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따로 참 마음이 있거나 따로 성인의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을 제거하는 것 자체가 참 마음을 환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있음과 없을을 놓어버리는 유무중도의 경지

여러분은 지금 땅콩을 먹고 있는데, 만약 땅콩의 향미를 모른다면 목석이나 마찬가지이고, 향미를 안다면 범부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유무의 두 갈래 길이 난 곳을 갈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납승衲僧의 본분사입니다.

유와 무를 벗어나서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 수행자가 할 일이라는 것을 땅콩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땅콩의 향이 난다는 것은 ‘있음’이고 향이 나지 않는 것은 ‘없음’입니다. 땅콩의 향을 안다고 하면 인연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땅콩의 향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있음에 발목이 잡혀서 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제거하는 것은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 있는 것과 나의 인식작용이 결합해서 망상이 생기는 것인데, 그런 조건과 인식작용이 결합해서 ‘무언가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 유무중도입니다.

유는 대상과 인식이 합쳐져서 탄생하는 망상입니다. 핸드폰이 있다고 합시다. 내 앞에 ‘핸드폰이 있다’고 하지만 실은 핸드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부속의 결합이고 더 들여다보면 원자들의 결합이고 실은 원자의 대부분은 비어있으니 무언가가 있을 수가 없지요. 핸드폰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요, 일체의 조건이 갖춰졌을 때 생겨난 하나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니 유무를 떠나서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 수행자가 할 일이라고 허운스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참선의 목적을 다양한 스타일과 설명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참선의 목적이라는 하나의 틀만 확실하게 가져가면 이런저런 표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참선의 목적을 적용시켜 다양한 어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다시금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제5장. 수행과 불수행

우리가 자신의 이 마음 빛心光을 사무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아무 할 일이 없는데, 무얼 닦고 안 닦고를 말하겠습니까?

여러 어록에서 보면 무위진심(無爲眞心), ‘평상심이 도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범부의 마음만 없애면 성인의 견해가 따로 없다”와 같습니다. 망상을 제거하면 그 단계에서 또 다른 단계로 업그레이드 되어서 새로운 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망상을 제거한 자리가 참 마음을 환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마음 빛은 무엇입니까? 조건에 따라 생하고 조건에 따라서 멸하는, 생각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잘 관찰하고 깨닫기만 한다면 그 이상 다른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전하는 한 생각 마음이 밖으로 치달아 망상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생사에 윤회하여 무명번뇌가 물들면 물들수록 더 두터워진 것입니다.

앞 문장은 참선의 선결조건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생각에 끌려 다니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아직 참선의 선결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가 뒤에 설명됩니다. 생각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바, 망상과 번뇌는 내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것이 착각에서 비롯되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한편, 윤회라는 말도 나옵니다. 조사어록에서 윤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일반적으로 윤회는 전생, 현생, 내생에 몸을 바꿔가며 다시 태어남을 말하는데, 조사어록에서 생사에 윤회한다는 등의 표현을 쓸 때는 한 생각이 생하고 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찰나에 한 생각이 생하고 멸하고 다음 찰나에 다음 생각이 생하고 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윤회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윤회를 한다, 안한다, 윤회의 주체가 영혼이다, 정신이다, 업식이다 등의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고요. 다만 조사어록을 볼 때, 생사에 윤회하여 무명번뇌가 두터워진다는 문구를 볼 때, 찰나 생 찰나 멸하는 망상들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조건이 갖춰지면 생하고 조건이 갖춰지면 멸하는 망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의 목적, 자성 없음을 깊이 아는 것

대장부는 바로 알아차려,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물이 다 꿈, 허깨비, 물거품 같아서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압니다.

모든 사물이 다 허깨비고 물거품 같다는 이야기는 참선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생하는 망상은 나의 인식과 나의 바깥에 있는 대상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일러서 자성이 없다고 하며,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안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해야 유무의 두 갈래 길이 난 곳을 갈 수 있습니까?’ 라는 방법론과 같습니다. 유무의 두 갈래 길을 떠나는 것이 수행이라고 했습니다.

<금강경>에서도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 이름이 법일 뿐이다.’라고요. A는 A가 아니고 그 이름이 A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사물이 다 꿈, 허깨비, 물거품 같다는 말이 이런 말입니다. 핸드폰을 핸드폰답게 하는 본질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연기실상으로 얽히고설켜있기 때문입니다.

망상의 선결조건을 제거하는 것. 망상을 제거하는 것. 일체를 놓아버리는 것. 일체의 인연을 쉬는 것. 그렇게 하면

사람과 법이 문득 공해지고 모든 법이 함께 쉬어지며, 일념이 만년되어 곧바로 무생에 이릅니다.

무생은 조건에 따라 생하고 조건에 따라 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건 생 조견 멸하지 않는 것이 무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여의 세계이고 연기실상의 세계이고 진여의 세계입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스타일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기실상을 체득하고 연기실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범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65쪽에 표현하기를

자신의 청정하고 태평한 집 안에 앉아 무진장의 보배를 누리고, 무심무위하고 자유자재하며 동동여여함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차고 따뜻함은 오직 그 사람 자신만이 압니다.

이런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 자체가 깨달음의 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아주 내밀한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 자신만이 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주어도 모르는 경지에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범부가 해야할 일, 공부 또 공부

그 다음 수준의 사람들은 뜻을 일으켜 생사를 뼈아프게 생각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정진 수행하고, 도를 찾아다니며 힘써 참구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생사란 말 그대로 육신이 살고 죽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조건에 따라서 생하고 조건이 사라지면 멸하는 망상들이 생사를 반복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진 수행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우리 같은 경우에는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서 힘써 수행해야 하고, 이미 깨달아서 연기실상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진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4장과 5장은 앞에 했던 내용들이 반복되는 것이면서, 허운스님이 법문을 통해 여러 가지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바로본다는 참선의 목적의 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조사어록이나 큰스님의 법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그것이 곧 수행의 동력이 됩니다. 그것이 신심입니다.

부처님이 위대한 분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 신심이 아니고요,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해주는 것들이 신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2부 선칠개시는 조사스님들의 법문을 이해하는 법을 바탕으로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덟 차례에 걸친 참선요지 강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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