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전에 4

극락은 비행기나 차를 타고 이동해서 갈 수 있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다. 극락이란 번뇌망상이 없어져 무명업장을 벗어난 곳이다. 백중에 영가님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영가님이 삼독심을 버리고 무명업장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행위이다.
삼독심을 버리고 극락에 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상임을 깨쳐야 한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생과 사, 생과 멸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주도함을 아는 것이다. 흔히 무상을 무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찰나찰나에 생하고 멸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이 몸을 떠나 다음 생을 받는 것 역시 생멸의 자연스러운 이치임을 이해한다면 떠나는 육신과 삶에 탐진치 하지 않고 극락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누구인가, 무아, 알아차림, 윤회, 죽음, 천도재

https://youtu.be/W2GQO_4Zk6A

백중맞이 <영가전에> 특강 4

가시는길 천리만리 극락정토 어디인가

번뇌망상 없어진곳 그자리가 극락이니

삼독심을 버리고서 부처님께 귀의하면

무명업장 벗어나서 극락세계 왕생하리

모든것은 무상이요 생한자는 필멸이라

태어났다 죽는것은 모든생명 이치이니

모여졌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여지며

맺고쌓은 인연따라 생사윤회 돌고도네

일가친척 많이있고 부귀영화 높았어도

죽는길엔 누구하나 힘이되지 못한다네

임금으로 태어나서 온천하를 호령해도

결국에는 죽는것을 영가님은 모르는가

태어났다 죽는 것은 중생계의 흐름이라

이곳에서 가시면은 저세상에 태어나니

오는듯이 가시옵고 가는듯이 오신다면

이육신의 마지막을 걱정할것 없잖은가

극락; 번뇌망상이 없어진 곳

극락이란 어떤 곳인지를 정의내리며 시작합니다.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하기를 극락이란 어디이냐, 번뇌망상 없어진 곳이며 무명업장 벗어난 곳이 극락이라고 합니다. 흔히 사바세계에서 9억8천만 리 서쪽으로 가면 아미타부처님이 주재하고 있는 서방정토 극락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서쪽으로 9억8천만 리를 가도 서방정토란 없습니다. 서방정토란 다만 번뇌망상이 없어지고 무명업장을 벗어난 곳입니다.

극락은 지금 이 세계에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이동해서 갈 수 있는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다음 몸을 받을 때 이 생에서 살던 삶보다 다음 생에서 더 나은 삶을 산다면 다음 세계가 바로 극락입니다. 이 생에서 내가 나쁜 과보를 많이 지은 후에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아주 힘들고 괴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곳은 이전의 삶에 비하면 지옥 같은 곳입니다.

그렇다면 번뇌망상을 없애고 무명업장을 벗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구절에 그 방법이 나옵니다. 삼독심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영가님이 다음 생으로 윤회할 때 옆에서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마음을 좋게 써서 그 업의 과보로 다음 생에는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삼독심을 버리고 극락에 가기 위해서는

삼독심이란 무엇입니까? 탐심, 진심, 치심의 세 가지 독과 같은 마음입니다. 탐은 탐욕, 진은 분노, 치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극락에 가기 위해서는 삼독심을 버리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삼독심을 버릴 수 있을까요?

<영가전에>에서는 먼저 ‘모든 것은 무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한 자는 반드시 멸합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생명의 이치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12연기의 가장 마지막은 노사(老死)입니다. 늙고 죽는 것이죠.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생각하셨습니다. ‘왜 사람은 병들고 죽을까?’ 태어났으니까 죽는다고 부처님께서 알게 되셨습니다. 태어났으니까 늙고 죽습니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생한 자는 필멸이다.’ ‘무상이다.’

생과 사, 생과 멸은 인연이 주도한다

나고 죽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나고 죽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태어나는 것은 ‘모여졌다’라는, 죽는 것은 ‘흩어졌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명이 있는 생명체는 생명이 없는 무정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체가 그 모습을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면 죽는다는 표현을 쓰고, 어떤 생명체가 나타나면 태어났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돌이나 산이나 하늘을 보고 태어났다거나 죽었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습니다.

생명체를 기준으로 보면 태어나고 죽는다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은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여지는 일련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연이 태어나게 하고 죽게 하고, 죽게 하고 태어나게 합니다. 생사윤회를 하는 것은 인연이 주도합니다.

인연 따라 생사윤회 한다, 즉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과 앞서 말한 ‘삼독심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이 부분을 제대로 알면 극락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예매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는 탐욕은 욕심을 많이 내는 것입니다. 살 집 한 채만 있으면 되는데 두 채, 세 채, 네 채를 가져서 부동산 투자를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욕심이고 탐욕입니다. 이런 탐욕 때문에 극락을 못 가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 정도의 이야기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 다른 철학, 다른 도덕적 차원에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욕심내지 말라, 검소하게 살라는 것은 불교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무상’…
변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생멸한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시계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대게 ‘무상하다’고 하면 ‘지금 이 시계가 언젠가는 낡고 고장나서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라고 이해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시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에서 이것은 무상이 아니에요.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아이가 블록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블록을 쌓아 산도 만들고 집도 만들고 터널도 만들고 나무도 만듭니다. 그러다가 산을 해체하여 자동차를 조립합니다. 아이는 블록을 모아서 어떤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흩어지게 만들고 흩어진 것을 모아서 다시 다른 모양을 만듭니다. 이럴 때 아이가 만든 산은 실제 산이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일까요?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 이 자동차가 영원할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고 하면 맞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블록이 몇 개 모여 있는 것뿐이죠. 그렇다면 산과 자동차, 나무, 터널 이런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것들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정해놓은 이미지이며 내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 있는 것들은 찰나찰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찰나 생 찰나 멸합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나 생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상은 매 찰나찰나 매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한다는 말 자체도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실제 세계가 변화한다고 이야기할 뿐이지 실은 변화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따로 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 블록 무더기는 그저 계속 변화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가 보면서 ‘여기에 산이 있었는데 변했네’, ‘터널이 있었는데 사라졌네, 터널은 무상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무상을 체득한다는 것은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산은 실제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실제 세계는 매 찰나찰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실제 세계는 이것저것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대상이 내 밖에 있다는 생각에서 ‘무명’이 온다

그렇다면 탐진치라고 이르는 무명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산이 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사과를 예로 들어, 내가 보기에 사과란 것이 있다면 예전 기억에 사과란 것이 있었기에 사과라고 정의내리는 것입니다. 사과를 먹었을 때 맛있었던 기억에서 먹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그런 욕심이 ‘이것은 사과’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무명이고 무명에서 비롯된 탐심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삼독심을 버리는 것이고, 삼독심을 버려야 번뇌망상이 없어지고, 번뇌망상이 없어지는 것이 곧 무명업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블록을 가지고 노는 것은 아이이고, 우리들의 삶을 모여졌다가 흩어지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인연입니다. 여기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껴야 합니다. 뭔가를 하는 것은 주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어떻게 블록을 쌓을 수 있단 말일까요?

인연은 자연이다

인연이 주도한다는 말은 자연(自然)입니다. 자연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는 인위(人爲)이라는 말과 대비됩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합니다. 인연이라는 법칙에 따라 알아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블록을 쌓는 것이 아니고 블록이 알아서 모였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이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인연 따라 생과 사가 윤회한다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다음 구절에는 부연설명이 나옵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죽는 때에는 소용이 없고, 온 세상을 호령한 진시황 같은 사람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생과 사를 윤회하는 것은 인연에 따른 자연의 법칙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공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이 세상에서 죽으면 어딘가 다른 저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사윤회는 장소를 바꾸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은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잘 따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다음 생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삼독심을 털어내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극락의 삶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가고 올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내기로 했다면 휴가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제주도에 이미 가있게 됩니다. 휴가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그곳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죠.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저기에 있거나 몸은 저기에 있는데 마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올 때는 가는 것처럼, 갈 때는 오는 것처럼

<영가전에>에서는 반대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올 때는 가는 것처럼, 가는 것은 오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몸 따로 마음 따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같이 움직이게 되면 나라고 생각하는 이 육신이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이생에 얼마나 많은 선업을 쌓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이 더욱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바로 이런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단지 흩어질 뿐이라는 것. 인연이 생해서 모였다가 인연이 다했기에 흩어져 다른 모양이 될 뿐인데 우리 중생들은 이 모양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아등바등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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