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을 사랑하라

열정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열정은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는 반면 잘못하면 주객이 전도되어 나 자신이 열정에 끌려가기 쉽다.
누구나 열정을 다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경험을 한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더이상 열정을 다하고 싶지 않아지기도 한다.
‘열반경’의 공덕천과 흑암천 이야기에서는 행복의 공덕천과 불행의 흑암천을 모두 거절하는 성인의 일화가 나오지만, 중생의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삶에서는 행복과 불행 모두를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열정을 사랑하자. 열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열정의 긍정적 측면도 부정적 측면도 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상실, 수용, 열정, 인연

청년의 열정과 좌절

얼마 전 불교학생회 학생과 차담을 했습니다. 평상시 밝고 활기찬 친구인데 그날은 기운이 없이 축 쳐져서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교내 창업 프로그램을 통해서 벤처 기업을 만들었는데 창업 투자 지원 대상에서 탈락하여 마음이 힘들다고 말입니다. 뭔가를 해보겠다고 회사를 만들었는데 막상 돈이 없으니 회사를 굴릴 수가 없는 겁니다.

당시에는 이 학생의 고민을 단순하게 ‘돈 버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열정의 문제였습니다. 젊은 청춘이 자기의 열정을 쏟아붓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하는 데에 돈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열정은 말 그대로 무언가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정이 아주 강하면서 다루기 힘들거나 간신히 통제할 수 있는 정도의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 말에 열정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또 심리학적으로 분석할 때 열정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조화 열정이고 나른 하나는 강박 열정이라고 합니다. 

조화 열정은 열정을 가지고 활동을 하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강박 열정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자아실현, 자기 존중 같은 감정들을 찾는데 그 무언가가 무너지면 상실감이나 절망감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열정은 강박 열정입니다.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달려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것 말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학생 친구도 창업 프로그램에 삶의 의미 혹은 자아실현이라는 가치를 둔 케이스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화 열정이라고 하는 것이 비교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현실적으로 열정적으로 임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까? 부처님 정도 되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열정은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나 자신이 열정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그것이 열정의 장점이자 맹점입니다. 장점은힘이 강하다는 것이고 맹점은 거기에 끌려다니기 쉽다는 것입니다. 

열정은 만드는 것일까? 

대학생 친구의 경우, 열정에 끌려다니다가 뜻한 바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아서 좌절감이나 절망감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친구의 경우는 자기 자신을 던질말한 열정이라도 있으니 다행인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열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패기도 없는 것보단 깨지고 부딪치고 절망할 열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변의 젊은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열정을 가지고 살아”라고 섣부르게 조언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주위에서“젊은이면 젊은이답게 꿈과 희망을 가지고 목표를 세워서 열정적으로 살아야 해.”라고 말하면 이 젊은이는 그 말에 동요되고 그로 인해 조급해집니다. 무어라도 열정을 다해볼만한 대상을 나름대로 정해보려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열정은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신상품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골라서 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아무리 좋은 신상이라고 해도 조금 쓰다 보면 지겨워지고 결국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게 됩니다. 결국열정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안에서 정말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때는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 참 행복한데, 하고 싶은 무언가가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강압이 알게 모르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열정은 소모적인 것일까?

여러분. 법문 준비를 할 때 저는 이전에 했던 법문들을 슥 훑어봅니다. 한 말을 또 하면 지루하니까 이전에 어떤 말을 했는지떠올려보는 겁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예전 법문들을 찾아보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2019년도까지는 법문을 할 때 말도 빠르고 목소리 톤도 상당히 하이톤으로 열정적으로 말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2020년도이후에는 말이 느리고 차분해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2020년도 초에 크게 아프고 나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풀 꺾인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만, 단순히 체력적인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2019년은 제가 증심사 주지로 처음 부임한 해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뭘 하던지 제대로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더 열정적으로 법문에 임했던 것 같아요. 당시의 나로써는 평상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부임 초기이니 만큼 보다 열과 성을 다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 모습을 발견하고서는 ‘이 나이에 무슨 정열과 열정을 찾으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어떤 일에든지 열정적으로 달려듭니다. 일도 사랑도 이념도 그렇습니다. 열정을 다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경험들을 합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달리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겁니다. ‘이렇게 열심히 했다가 잘 안 풀리면 괜히 마음만 힘들고 좌절되니까 내 모든것을 완전히 내던지지는 말자.’라고 생각하면서 주저하게 되지요. 

공덕천과 흑암천 자매 이야기

이럴 때 우리는 열반경에 등장하는 ‘공덕천과 흑암천’의 이야기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덕천과 흑암천은 자매였습니다. 언니인 공덕천은 천하제일의 미인인 데다 그가 가는 곳마다 복된 일과 행복한 일들만 생겼습니다. 반대로 동생인 흑암천이다니는 곳은 불행한 일들만 생겼지요. 

어느 날 어떤 사람의 집에 공덕천이 방문했습니다. ‘똑똑.’기척에 문을 연 주인은 천상에서 내려온 것 같은 미인을 마주했습니다. 집주인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공덕천이 답했습니다. “나는 공덕천이라고 합니다. 내가 방문하는 집에는 재물이 넘쳐나고 행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주인이 문을 활짝 열고 공덕천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공덕천의 뒤로 못생기고 지저분한 여인이 따라 들어오는 겁니다. 집주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오? 나는 당신에게 이 집에 들어오라 말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들어오는 것이오?” 흑암천이대답했습니다. “나는 흑암천입니다. 앞서 들어간 사람이 나의 언니이며, 우리 자매는 항상 같이 다닙니다.”

집주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오?” 흑암천이 답했습니다. “내가 찾아가는 집은 재물을 탕진하고불행하게 됩니다.” 집주인이 기겁을 하고 흑암천을 막아서려 했으나, 공덕천과 흑암천은 한 몸과 같은 자매라서 들어가더라도 같이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더라도 같이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집주인은 결국 두 자매 모두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선택합니다. 

공덕천과 흑암천은 분리되지 않는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집에 공덕천이 제 발로 찾아왔다면 집주인과 마찬가지로 공덕천과 흑암천 모두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공덕천과 흑암천 양쪽 모두를 고려하면서 선택할 여유가 없습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의 경우에는 특정 대상에 열정적으로 매달릴 때가 있지요. ‘열정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일이 잘 안 풀릴 것을생각해서 적당히 하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치 도통한 도인처럼 매사를 대하자.’ 라는 마음가짐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공덕천이 있으면 흑암천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고 부와 명예를 쌓을 수 있는가 하면, 뜨겁게 불타오르던 열정은 언젠가 차갑게 식게 마련입니다. 세상의 모든재는 한때 뜨겁게 불타올랐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 것은 재가 될 수 없습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재 역시 열정의 얼굴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만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공덕천과 흑암천 둘 다를 집에 안 들이면 그만이지만, 우리의 실전 인생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둘 다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밝은 면만 받아들이고 어두운 면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습니다. 기왕에열정의 밝은 면을 피할 수 없다면 어두운 면도 함께 수용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전 속 이야기와 우리 일상의 차이입니다. 

오직 받아들일 

로마에 호라티우스라는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정을 지배하라. 그렇지 않으면 열정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화 열정과 같은 말입니다. 열정을 가지되, 후에 다가올 열정으로 인한 상실감과 절망을 생각해서 열정을 잘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가능하면 중생일까요?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열정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먼저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는 것입니다. 

열정을 지배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사랑의 대상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열정이 내 삶의 일부가 됩니다. 열정이 삶의 일부가 되면 열정의 빛나는 면도 어두운 면도 인정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삶의 어떤 지점에서 한 번이라도 뜨겁게 열정을불태운 기억이 있는 사람은, 그 열정으로 인해서 삶이 변화했고 발전했고 지금의 삶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 법문에서는 ‘열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만, 기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온갖 인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찾아오는 인연들을 우리는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찾아오는 인연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니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나에게 이로운 인연이든 해로운 인연이든 그 인연들이 나에게 찾아왔음을 인정하고 사랑해야지만 내 삶의 일부가될 수 있습니다. 

Previous

부처님 전생담 이야기

생활불교의 길: 보시

Next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