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백중을 맞이하며 생각하는 죽음과 삶.
법당에 모셔진 종이 위패를 보며 그들이 생전에 살아숨쉬었을 모습을 생각해본다. 동시에 지금 살아있는 우리도 10년, 20년 후에는 종이 위패 한 장으로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길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산 사람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에,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역에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무명에서 나온다. 무명으로 인해 죽음을 삶의 끝자락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회피하거나 못본척하거나 심지어 통제하려고 한다.
죽음은 다만 일상이 끝나는 순간에 있는 무엇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주변 친지들의 죽음을 바로 보고 동시에 간접적으로 나의 죽음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죽음과 삶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메멘토모리, 무명, 백중, 죽음

백중 위패를 보며

새벽예불을 하면서 문득 영단에 걸린 위패들을 바라봤습니다. 저는 주지 소임을 살기 때문에 ‘올해도 위패를 거의 채웠네.’ 하는 실적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오늘 새벽에는 한 분 한 분의 위패를 보면서 그 위패의 주인공인 돌아가신 망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할머니였고 심지어는 누군가의 딸이나 아들, 친구였을 것입니다. 한때는 나름대로열심히 살기 위해서 애를 썼을 것이고, 나름 행복하거나 괴로운 순간을 살았던 적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 인생을 살던 분들이 지금은 이렇게 위패 하나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위패와 나와의 거리는 실은 몇 미터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마치 죽음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상  죽음을 말하는 순간들

얼마 전에 신도분들과 공양을 하는데 한 분이 제 옆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귓불에 줄이 있으면 혈액순환에 문제가 있는거래요, 스님.” 하는 겁니다. 오래 전부터 귓불에 줄이 가있는 것은 알았는데 옆사람이 그 말을 하니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는 것은 안 무서운데 안 아프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실은 황천길 예행연습을 해본 사람입니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실려갔을 때 의사선생님이 “저승길을 저만큼 가고있는 사람을 붙잡아왔다.”고 말씀하시더랍니다. 당시의 상황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엄청나게 아팠다는 사실은 생생합니다. 

급성 심근경색의 증상을 표현하는 말로 ‘살아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치통이나 요로결석 같은증상이 있으면 몹시 고통스럽다고 하는데, 심근경색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가까이 가면, 죽음이 다가오는하루이틀 상간에는 극심한 고통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아픈 게 두려울 뿐이야.’라고 큰소리치는 것은 허언일 뿐이라는 거죠. 

죽음에 대한 욕심과 희망

그 자리에서 제가 한 마디를 더 보탰습니다. “죽는 것은 아쉬울 게 없는데 내가 죽을 때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 할까봐 그게 걱정이 됩니다.”라고요. 나이 드신 분들은 ‘내가 죽어도 주변 사람들이 힘들지 않도록 준비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역시도 제가 볼 때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제가 겪어본 ‘죽을뻔한 경험’에서는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오로지 너무 아프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생각 혹은 ‘죽는 것이 이런 것인가’하는 의문, ‘안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고요. ‘너무 아프다!’

우리가 혈당 관리나 식단 관리, 성인병, 당뇨 등을 주의하면서 몸을 관리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괴롭지 않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치매나 파킨슨 같은 병은 개인의 노력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닙니다. 심혈관 질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싫다는 말은 달리 해석하면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오는 병 때문에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내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메멘토모리(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을 흔하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연히 시작된 ‘귓불’ 발언에서 ‘죽음’까지 언급해버리니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버렸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어서였겠지요.

죽음과 분리된 현대의 일상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죽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마당에다 천막을 치고 초상을 치렀지요. 이제는 그런 것들이 일상의 공간이 아닌 특별한 공간, 오직 죽음만을 위한 공간에서 치러집니다. 어르신이 위독하시다 하면 위독하기 전에 이미 병원에 계셔야 하고요, 임종 이후에는 장례식장에 모시게 되지요. 이렇게 우리 현대인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과 철저하게 분리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왜 두렵습니까? 모르니까 두렵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이라는 것 자체가 죽음의 반대 개념이기 때문에 죽어본 사람이 없는 겁니다. 저처럼 죽을 뻔한 사람은 주변에 좀 있습니다만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모르니까. 

모른다는 말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무명입니다. 중생은 무명에 휩싸여 있으므로 두려워합니다. 무명 안에서 두려움을 비롯한모든 번뇌들이 발생합니다.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죽고 싶다’는 말은 죽음에 대해서 나의 의도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죽고싶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을 통제하고 싶은 것이 인간들의 욕심입니다. 이런 욕심 역시도 무명에서 출발합니다. 

모든 괴로움이 무명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죽음을 완전히 경험해보지 못했으므로 그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무지’와 ‘무명’이 원인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일정 부분은 덜어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삶과 맞닿아있다

어느 날 템플스테이 참가자와 차담을 하는데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 저는 저녁에 자려고 누워있으면 ‘혹시 내가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집은 어떻게 하고 통장에 있는 돈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아, 나 정말 죽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한 마음이 몰려옵니다. 스님은 그런 생각 안 하십니까?”

거기에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가 죽을 뻔 해본 적이 있었는데요. 죽는다는 게 우리 일상과는 전혀 다른 영역일 것 같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게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상이 끝나는 순간이더라고요. 죽음은 삶이 끝나는 순간에 일어나는한 부분이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게 별겁니까? 오늘 밤에 잘 잤는데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면 그게 죽은 거예요. 그건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고민하고 대책을 만들어야겠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일을 두고 걱정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입니다. 

중국 고사에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서 평생을 벌벌 떨고 살았다는 사람이 있지요? 죽음이 두려워서 잠 못드는 사람은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는 게 그냥 막연하고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세팅값이기 때문입니다. 

백중에 생각하는 어떻게  것인가?’

며칠 뒤면 우란분절입니다. 우리가 일 년에 한 번씩 백중이라는 행사를 지내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가깝게 생각해보라는데에 있습니다. 법당 옆에 걸린 영구위패가 10년 뒤, 20년 뒤의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허망하다, 사는 게 무상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이 예견된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한 인생을 살다 간 망자들의 삶을 생각해보고, 지금은 이렇게 종이 한 장으로 남아있는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인정할 때 죽음은 더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렇게 살다가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죠. 

백중 기간 동안에는 이렇게 죽음을 생각하는 한편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어떻게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고 싶다면 주변 친지들의 죽음을 생각해보고,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의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한편 살아있는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화두처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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