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불교의 길: 지계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 두 번째 날은 지계의 날이다. 지계는 올바름의 날이다. 불교에서의 올바름은 부처님의 진리인 법을 바르게 하자는 의미이다. 법의 기준이 바르게 서있으면 선악의 판단, 혹은 규범이 제대로 갖춰지게 된다. 지계는 법에 근거하여 양심에 거리낌 없는 것이다.
양심의 기준이며 지침이 되는 것이 오계이다. 오계를 따르면 크고작은 선택의 상황에서 편하게 삶을 건너갈 수 있다. 양심을 지키면 손해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더 큰 복과 덕을 쌓을 수 있는 이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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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름, 법을 바르게 함

오늘은 ‘올바름의 날’입니다. 규율과 예의범절을 지킵시다. 계(戒)는 어둠을 지켜주는 등불이며 바다를 건너는 배이며, 병자의 약이며 성현이 되는 사다리며, 비오는 데 우산이며 자성(自性)을 깨우치는 길이며, 자신의 칠보장엄(七寶莊嚴)이며 생사해탈의 길잡이입니다. 살생·투도·음행·망어·음주를 금하여 지계행(持戒行)을 닦읍시다.

구산스님이 제창한 ‘생활불교의 길’ 두 번째 날인 화요일은 지계의 날입니다. 지계의 날은 ‘올바름의 날’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올바르다는 말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올바르다’는 말을 할 때는 흔히 ‘옳다’와 ‘바르다’의 합성어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어원을 살펴보면 ‘올’이 ‘바르다’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베틀에서 옷감을 짤 때 세로로 늘어진 실을 날줄, 가로로 정렬된 줄을 씨줄이라 합니다. 올은 씨줄을 말합니다. 올이 일정하고 바르게 정렬되어 있지 않으면 베를 짤 때 천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즉 올바르다는 말은 어떤 행동의 기준이 바르게 서있다는 뜻으로, 선악의 판단 혹은 규범이 제대로 갖춰지는 상황을 표현합니다. 

구산스님이 말씀하신 올바름은 법을 바르게 하자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법(法)은 무엇입니까? 일반 사회에서 쓰는 민법, 형법과는 다른 법입니다. 법이라는 한자는 본래 해치(해태)를 의미하는 치(廌)자가 들어간 법(灋)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해치는 불을 막는 물의 동물로써 예로부터 재앙을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경복궁 앞에 해치 석상 두 구가 있지 않습니까? 경복궁을 마주보고 있는 관악산이 불꽃이 피어오르듯 강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해치를 놓았다고 합니다. 

상상속의 동물인 해치는 사자 같은 형상에 사슴 뿔을 달고 있습니다. 해치는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잘못한 사람을 그 뿔로 들이받아버립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여 잘못된 것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사람, 바로 법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해치는 악을물리치고 정의를 수호하는 법을 상징합니다. 

지계는 양심에 거리낌 없는 것

구산스님이 말씀하신 지계라 함은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고, 법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에서 지계를 지키고 실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계를 지킨다는 말의 핵심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심에 비추어서 ‘아,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그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한다고 합시다. 문방구에서는 필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량식품을 판매합니다. 이럴 때 ‘내가 불량식품을 팔면 애들 건강에 안 좋을 텐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경우가 있습니다. 양심에 걸리는 겁니다. 양심에 걸리지만 불량식품을 파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나에게는 이롭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계를 행한다는 것은 양심에 거리낌이있으니 불량식품을 팔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양심에 걸리는 것인지 걸리지 않는 일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심의 거리낌 없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양심이 제대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양심이라는 것이 흐리멍덩하면 어떤 것을 기준 삼아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지침이 되는 것이 불교의 오계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술에 취하지 않는 것. 스스로의 양심을 대신해 지켜야 할 기준을 제시합니다. 오계를 지키면 양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대부분 배운 것도 없고 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스님들께서 “나쁜 짓을 하면 지옥 간다”고 하면 진짜 지옥에 가는 줄 알았어요. 절에 그려져 있는 지옥도 같은 탱화를 보면 두려워했지요. ‘나쁜 짓을 하면 저렇게 지옥에 가서 고통받겠구나. 나쁜 짓 안 하고 살아야지.’ 이렇게 사고가 간단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배운 것도 많고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 살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처럼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일수록 양심이 중요하고 양심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긴다고 감옥 가지는 않지만…

계와 율은 모두 부처님께서 ‘이런 것 하지 말라’고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계와 율은 분리된 개념입니다. 계는 나 자신을 강제하는 것이되 어긴다고 해서 벌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자들이 오계를 어긴다고 해서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그런데 율은 어기면 벌칙을 받습니다. 스님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이 적힌 책을 ‘율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온 율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가장 경미한 벌칙은 큰스님 앞에 가서 잘못을 고백하는 참회이고, 가장 심한 벌칙은 절에서 쫓겨나는 산문출송입니다. 

구산스님이 말씀하신 지계는 계를 지키자는 것이고요. 그것은 곧 양심을 지키자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올바른 불자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계(戒)는 어둠을 지켜주는 등불이며 바다를 건너는 배이며, 병자의 약이며 성현이 되는 사다리라 했습니다. 

내 안에 계가 없으면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계가 없으면 살생을 하거나 음행을 하고도 부끄러운 마음 혹은 수치심이 들지 않습니다. 반면 내 안에 계가 있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수치심을 느끼고 다음부터는 안 그래야겠다는 반성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가령 오늘 증심사에서 법회를 하는데 법회에 갈지 그냥 집에서 낮잠이나 잘지그것도 아니면 핸드폰 유튜브 중계를 볼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기준이 되는 것이 계입니다. 

바다를 건널 때 수영을 해서 건널 수도 있고 뗏목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배를 타고 가면 편하겠지요. 이와 같이 내가 생활에서 크고작은 선택을 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선택하면 편하게 삶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살생은 제2의 자살행위

재가자와 출가자 모두 공통으로 지켜야 한다고 부처님이 강조하신 계는 오계입니다. 살생, 투도, 음행, 망어, 음주의 5개 항목입니다. 제일 지키기 쉬운 것은 음주입니다. 술을 왜 마시면 안 되는가? 정신을 흐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깨닫는 공부를 할 때 정신이 흐린거만큼 방해되는 것이 없습니다. 술은 예외조항 없이 이유불문, 장소불문 마시면 안 됩니다. 

구산스님이 살생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구산스님은 “살생은 제2의 자살행위”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중생을 죽이면 다음에 그 중생이 나를 죽인다고 말입니다. 

깨달은 도인의 입장에서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해서 나와 너의 구별이 있고, 심지어 내가 남보다 더 소중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다 한몸입니다. 세상 모든 중생들이 나하고 구별되지 않는 나 자신인 겁니다. 그러니 내가 다른 중생을 죽이는 것은 나 스스로를, 자기 자신의 몸을 해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불가피하게 살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하다못해 식사를 하면서 먹는 풀도 실은 생명이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풀도 생명이 있으니까 아무 것도 먹지 말자.’가 아니고요. 가능하면 살생을 피하고 어쩔 수 없는 살생을 한 경우에는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 말고 복과 덕을 쌓기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율에 대해서 구산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놈이 흉기로 위협해서 물질을 뺏을 수는 있어도 복을 빼앗아갈 수는 없다. 잘 산다는 것은 복을 지어서 잘 사는 것이지 돈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복을 감하게 되니 훔치지말아야 한다.”

구산스님이 보시기에 도둑질이라는 것이 꼭 어디에 몰래 숨어들어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어져야마땅한 것을 주지 않거나 가로채지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도둑질은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사장이 직원들에게 지급해야 할 정당한 급여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던가, 나라에서 세금을 떼되 월급쟁이들에게는 많이 걷고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만 걷는 것도 도둑질에 해당합니다. 정당하고 공평하게 세금을 매기는 것은 나라 운영에 필요한 일이지만 그 이상 세금으로 가져간다면 도둑질이라는 거죠. 

구산스님은 돈을 많이 벌려고 생각하지 말고 복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라 합니다. 복과 덕은 같은 것입니다. 흔히 ‘복이 많은 사람’라는 말을 할 때는 누군가 좋은 것이나 행운을 불러들인다는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덕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때는 무언가를 노력해서 얻는 과보로써 생각합니다. 

복과 덕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주상보시라는 업을 쌓으면 거기에서 얻어지는 것이 덕이고, 이렇게 쌓은 덕은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효과를 강조할 때 복이라는 말을 쓰고 그것이 어떻게 생겼나를 강조할 때 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 복을지으려면 보시를 통해 좋은 업, 즉 덕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양심대로 사는 것이 장기적인 이익

사음을 하면 안락한 미음을 이룰 수 없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출가자들에게 사음이란 음행을 의미하고 재가자들에게 사음이란 배우자 이외의 대상에게 하는 삿된 음행을 의미합니다. 부인이나 남편 이외에게 음행을 하면 안락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쾌락과 욕심에 가려서 마음이 어두워지면 깨달음을 얻는 데에 장애물이 되고, 깨달음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고통이 커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누구나 양심적으로 살면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나 혼자 양심적으로 살면 뭐하나? 다른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살지 않고 세상은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굴러가는데. 양심대로 사는 것은 나 혼자 바보 멍청이로 사는 것 아닌가?’

<군주론>을 쓴 키아벨리는 권력은 내 이익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국가 운영이라던가 국가의 이익은 완전히 정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중국과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미국 편을 너무 과하게 들자 중국이 미사일을 쏘아버렸다? 그러면 나라가 완전히 박살나 버리고 한순간에 끝나게 되겠지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예를 보아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개인의 일상을 다릅니다. 단언컨대 우리의 일상에서 내가 약간의 손해를 본다고 해서 생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의 삶에서는 장기적으로 보면 자기 이익만 찾는 것이 손해이고 양심대로 살아서 잘못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양심 따라 사는 것이 길게 보면 더 큰 이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나 혼자 양심에 따라 살면 손해보는 것 아닌가? 예. 아닙니다. 나부터 착하게 살면 한 명이라도 더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양심에 따라, 복과 덕을 쌓으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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