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불교의 길: 보시

법보시는 내 마음을 주는 것이다. 마음을 보시한다는 것은 ‘나’라고 하는 놈이 없는 것이라는 아공의 도리를 깨쳐야 가능하다.
재보시는 물건을 아낌없이 주되, 내가 보시를 했다는 행각이나 타인이 나의 보시를 받았다는 생각 없이 보시하는 것이다. 내가 주었다는 상을 내면 번뇌가 따르는 복이며, 상에 얽매이지 않으면 번뇌가 없는 참된 복이다.
보시는 또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며 없애주는 것이다. 때문에 번뇌를 없애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행은 그 자체로써 보시이며, 모든 보시는 본질적으로 번뇌를 없애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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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수행 그 자체

구산스님께서는 일주일 7일 동안 월요일부터 육바라밀을 차례로 제시한 다음, 일요일에는 만행을 덧붙여서 각각의 바라밀을 일상적으로 행하자고 제창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생활불교의 길입니다. 

육바라밀이 곧 계정혜 삼학이고, 계정혜 삼학이 곧 팔정도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계정혜 삼학에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의 다섯 가지 덕목은 있는데 보시행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 육바라밀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보시행이라는 덕목이에요. 어떤 이유에설까요? 보시바라밀이 결국은 나머지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바라밀을 모두 통튼 것이며, 우리가 수행하는 그 자체라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시하는 수행이 따로 있고 인욕하는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바라밀은 다 보시행이라는 것이지요. 

바라밀이라는 말은 ‘건너다’ 또는 ‘완성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것나가는 것. 번뇌의 땅에서 열반의 땅으로 건너가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을 완성한다는 것은 곧 수행의 완성을 뜻하고, 바라밀은 곧 수행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보시바라밀이라는 말은 ‘보시 수행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보시하려면 아공을 깨쳐야

오늘은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 중 보시행을 공부합니다. 마음 속으로 다음 구절을 따라하십시오.

법보시(法布施), 내 마음을 줍시다. 아공(我空)하여 마음을 보시하면 만법(萬法)이 유심소조(唯心所造)입니다.

법보시는 법을 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법보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법문을 하는 것도 법보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영가에게 금강경을 들려주는 것도 법보시에 해당합니다. 사찰에 경전을 보시하는 것도 법보시고, 군대나 교도소에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을 보내주는 것도 법보시입니다. 

반면 구산스님은 법보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요? 내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공이란 나라고 하는 놈이 사실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가야 진정으로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보시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도인이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부처님 말씀이 담고 있는 진리를 상대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진리를 깨닫는 것까지가 보시라는 이야기를 구산스님께서는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보시하려면 나라고 하는 놈이 없구나 하는 아공의 도리를 깨쳐야 합니다. 반대로 내 마음을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아공의 도리를 깨칠 수 있습니다. 보시한다는 마음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으로만, 교리로만 이해한다면 아공의 도리를 깨칠 수도 없고 마음을 보시할 수도 없습니다.

만법이 일체조소라는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오직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은 법보시라는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만 법보시를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공하여 마음을 보시하고 만법이 일체조소라는 이야기를 우리 일상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자식들을 떠올려보십시오. 누구나 온 마음을 다 줘서 아이들을 키웠을 텐데요. 이렇게 아이들을 키운 것이 과연 내 마음을 보시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보시한 것이 아니라 그냥 준 겁니다. 법보시라고 할 때는 나도 아공의 도리를 깨치고  상대방도 너와 내가 없는 대자대비의 경지를 깨칠 수 있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경지를 쉽게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딴에는 상대방을 위해서 힘든 일을 대신 해주고 성의를 표시했는데 상대방이 내가 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속으로 서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은 보시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상에 얽매이지 않아야 번뇌 없는 보시

재보시(財布施), 물건을 아낌없이 줍시다. 착상(着相)하면 유루복(有漏福)이요 무주상(無住相)하면 무루복(無漏福)이니, 냉수나 걸레처럼 줍시다.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보시와 같습니다. 상을 내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겁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보시를 했다는 생각, 저 사람이 나의 보시를 받았다는 생각 없이 보시하라는 것이지요. 

어느 날 부처님과 아난존자가 길을 걷고 있는데 한 바라문이 길을 막고 서서 부처님께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보시를 즐겨 하고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위중한 상태인데 의사가 말하기를 산 사람의 눈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신이 나의 어머니를 위해서 눈을 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주저없이 한쪽 눈을 빼서 바라문에게 주었습니다. 눈을 받아든 바라문은 별안간 그것을 바탕에 내팽개치고 발로 짓밟아버렸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아난존자가 너무나 놀라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뽑아주었는데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부처님이 아난존자를 막으면서 말했습니다. “됐다. 이미 그것은 내 몸에서 벗어난 것이니 저 사람이 나의 눈을 가지고 발로 짓밟던 어머니에게 약을 만들어 드리던 그 사람의 몫이다. 괘념치 마라.”

이런 이야기는 현실감이 너무 없어서 와닿지 않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 좋은 영화가 있는데 내려오셔서 영화를 보시겠습니까? 오신다고 하면 제가 표를 미리 예매해 놓겠습니다.” 

감독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영화관에 가보니 나처럼 초대를 받아서 온 사람이 한두 사람도 아니고 30~40명 정도 있는 겁니다. 요즘 극장에 사람들이 잘 안 오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초대한 것 같은데,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이러이러 했습니다.”는 말 없이 그저 조용히 웃으며 표를 나눠주고 “영화 잘 보십시오.”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반성을 했습니다. 스님들은 공양 받는 것에 익숙한데요. 그러는 반면 베푸는 데에는 인색한 분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출가사문도 아닌 재가자가 없는 살림에 주머니를 털어서 보시하면서도 티를 안 내는 모습을 보고 ‘참 저런 사람이 수행한다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흔히 보시를 한다고 하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돈을 내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을 내놓든 보시를 하면서 상(像)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는데 왜 그것을 몰라주느냐’는 마음 때문입니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배우자를 위해서 나의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보시하는데 상대방이 그걸 몰라주니까 서운한 겁니다. 그러니 일상생활에서도 보시하면서 보시한다는 생각 말고, 보시하는 행위 자체가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합시다. 보시를 하다가 ‘나만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 노력을 몰라주는 상대방을 탓하지 말고 내가 보시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착상하면 유루복이요 무주상하면 무루복이라 했습니다. 상을 내면 번뇌가 따르는 복입니다. 좋은 일 실컷 하고도 괴롭습니다. 그런데 상에 얽매이지 않으면, 즉 무주상하면 무루복입니다. 번뇌가 없는 복이 따라온다는 말입니다. 절에 와서 불사하고 봉사하고 불우이웃에게 돈을 보태는 것만이 보시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다 보시입니다. 

나와 너의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진정한 보시

무외시(無畏施), 마음과 육신까지도 아낌없이 보시하면 절대의 복(福)과 지혜로 너와 내가 없는 대자대비가 되니, 보시의 행을 닦읍시다. 

무외시의 외(畏)는 두렵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보시를 하면서 내 마음에 있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픈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배가 고프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렇게 못 먹고 살다가 병이 들고 죽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요즘이야 배고파서 죽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몇 십, 몇 백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굶어 죽는 사람이 흔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같은 개발도상국은 기아에 허덕이며 빈곤의 두려움을 겪고 있지요. 

어떻게 하면 빈곤의 두려움, 배고픔의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이 생각하기를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 내 자식들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내가 가난한 건 괜찮지만 내 자식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지켜보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인생이 괴롭다. 이렇게 계속 사는 게 두렵다.’고 합니다. 

이런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에게 가난이라는 두려움을 없애는 행위를 해준다면 어떨까요. 먹을 것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 농사지을 땅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고, 농사짓는 방법과 장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돕는 모든 활동이 무외시에 해당합니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안정적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보험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고요. 그 사람이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보험 체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것, 직장을 구해주는 것,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해주는 것 등이 모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무외시 보시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불안에서 나오고 불안은 번뇌에서 나옵니다. 결국 무외시는 번뇌를 없애주는 행위입니다. 내가 보시를 행함으로써 내 안의 번뇌를 없애고, 내가 보시를 행함으로써 보시 받는 사람의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 무외시입니다. 

번뇌를 없애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행은 그 자체로써 보시이며, 모든 보시는 본질적으로 무외시입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행위입니다. 

왜 보시를 해야 합니까? 구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는 행을 통해서 비로소 내 안에 너와 내가 없는 대자대비의 마음을, 자비의 마음을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자비심의 마음으로 실천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곧 내 안의 자비심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보시를 따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보시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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