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2019년 백중 천도재 기간에 생각하는 삶과 죽음.
죽음이 삶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나이듦에 따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전염병이나 자연재해 등 죽음을 앞세운 자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온 우리 사회는 어느새 우리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는 사회적, 개인적 인식 속에서 짙어지는 죽음에의 존재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노욕이 되기도 하고 지혜로운 수용이 되기도 한다.
삶과 죽음,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누구인가, 수행, 죽음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백중 천도재 기간입니다. 오늘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법문을 하겠습니다.

제 나이 20대 초반에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나도 이제 꺾어 50이구나.’ 꺾어 50이란 말은 25살 젊은 친구들이 나도 나이를 제법 먹었다고 티내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 문득 나이를 많이 먹었네, 큰일 났네, 아무리 돌아봐도 특별히 한 건 없는 것 같고 마음은 급하네. 그런 조급증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10년 뒤, 30대 중반 쯤 돼 가지고 또 한 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내가 지난 10년 동안 뭘 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한 게 별로 없습니다. 마치 백사장에서 손가락을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버리는 모래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난 도대체 뭘 하며 살았지? 이렇게 살아도 되겠나? 그런 불안한 느낌이었습니다.

또 최근 몇 년 전, 새벽에 문득 잠이 깨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 나도 이제 언젠가는 죽는구나.’ 그날 새벽에는 유독 그게 가슴으로 확 다가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인생살이가 고달프면 마음속으로 ‘정말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 그냥 확 죽어버리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죽고 싶다는 것은 실은 사는 게 너무 힘들다 내지는 인생이 왜 내 뜻대로 안 되냐 하는 자기 푸념입니다. 살고 싶다의 간절한 표현입니다.

예순 언저리에서 생각하는 죽음

그런데 60이 다 돼 가는 나이에, 새벽에, 불현 듯, 아, 나도 언젠간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젊은 날의 푸념하고는 다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동안 내 인생에서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마음속의 한 부분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젊을 적에는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것이다’ 라는 게 너무나 당연해서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50대만 되도 나름대로 심각한 병들이 심심찮게 찾아옵니다. 암에 걸리기도 하고 저 같은 경우는 자칫 잘못하면 실명한다는 3대 안과질환인 황반변성, 녹내장, 백내장이 한꺼번에 왔습니다. 관리를 잘못하면 10년 안에 실명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실명되는 게 남 얘기가 아닙니다. 또 우리 주변에 위암에 걸려서 위를 잘라낸 사람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별로 환자 티가 안 나는데, 당사자의 경우는 살고 죽는 게 남 얘기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절박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나이가 되면 죽습니다. 그 언젠가가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한 달 뒤일 수도 있고 10년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흔히 나이를 좀 먹으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죽는 건 안 무서운데 죽을 때 아플까봐 그게 걸려. 안 아프게 죽었으면 좋겠어.” 내지는 “나는 죽는 건 괜찮은데 나 때문에 우리 자식들이 고생할까봐 그게 걱정이라 죽고 싶어도 죽으면 안 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나 죽음은 내 의지하고는 무관합니다. 내가 살고 싶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아무리 죽고 싶다고 해도 죽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죽음이 삶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노욕(老慾)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의 욕심. 나이를 많이 먹고 약간 치매 기운도 오고 그러면 식욕이 갑자기 왕성해지고 욕심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본능적으로 죽을 날이 멀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겠습니까? 살고 싶은 겁니다. 살려면 잘 먹어야 합니다. ‘대충 먹으면 안 돼, 잘 먹어야 돼.’ 이런 게 노욕입니다.

노욕이라는 것은 젊은이들이 ‘나 쟤하고 연애하고 싶어’ 하는 욕망하고는 다릅니다. 연애하고 싶고 좋은 차를 가지고 싶고 사업에 성공하고 싶은 젊은이들의 욕망은 어느 정도 인생에서 필요합니다. 그런데 노욕은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죽기 싫다는, 살고 싶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노욕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연애 감정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존경이나 30~40년을 살아온 부부로써의 우애도 전혀 없습니다. 배우자가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않습니다. 나는 번듯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끌려 사는 겁니다. 자식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봐도 문제가 많은 자식인데 끝내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남들이 보기에 진짜 나쁜 부모가 되기 싫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모습이 무너질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노욕하고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든 죽음을 받아들이되, 죽음에 과잉 반응을 하면 노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고 그 누구도 영원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에는 나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 나도 언젠가 죽는구나.’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당연히 있지만, 그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눈이 멀어버리면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은 조화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라 한다면 그것은 종이에 잉크로 쓴 사랑이라는 글자밖에 없습니다.

사회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메르스 사태

한편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을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입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여러분도 잘 기억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스처럼 좀 유행하다 말겠지 하면서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차원을 넘어 섰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누가 환자인지도 모르고, 감염이 되면 잠복 기간이 얼마인지 어떻게 전염이 되는지 정부도 모르고 다 모릅니다. 그때부터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됩니다. 웬만하면 밖에 안 나가고 모르는 사람이랑 접촉 안 합니다. 온 사회가 공포로 뒤덮였고 메르스 확진자로 판단되면 철저하게 격리됐습니다. 두어 달 메르스 때문에 바짝 졸아서 살았습니다.

사실 지금이 조선시대, 고려시대였다면 전염병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 경험하는 것 말입니다. 전염병이 한 번 돌면 웬만한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익히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최소한 한국전쟁 이후에 우리 사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죽음을 앞세운 자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전염병이라든가 자연재해가 생겨도 떼죽음 당하지 않습니다. 그 방어막이 바로 사회입니다. 사회가 개인을 죽음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메르스라는 놈이 사회라는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사회라는 방어막 안에서 너무나 편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상적으로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한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는 격리였습니다. 메르스 환자 내지는 메르스로 의심되는 사람은 우리와 접촉할 수 없게 철저하게 격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정보를 공개하라고 합니다. 공개를 하면 대상자를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한편 두려움의 타겟을 삼고, 공개하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이 벌어집니다. 누가 환자인지 모르니까 아무도 못 믿고, 사소한 걸로도 싸움이 생깁니다. 공포심이 극대화되면 그렇게 됩니다.

사회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격리시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깨달은 게 무엇이냐 하면 우리 사회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저희 할머니가 1970년대 초반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가 살던 부산은 완전히 도시화가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집에서 염하고 상을 치렀습니다. 1990년대까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병원 영안실에서 그런 의식을 하다가 또 언제부터인가 장례식장이라는 게 따로 생겨서 장례의 모든 것을 관장합니다. 음식 준비, 상복, 발인, 나중에는 아예 화장하는 것까지 돈만 내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과, 또한 죽어있는 사람과 전혀 접촉하지 않고 살아도 생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죽음에 가까워지는 사람은 어디로 보냅니까? 요양병원으로 격리시킵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습니다. 다들 속으로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지만 같은 가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에 걸리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온몸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죽은 다음에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까지도 온 가족이 지켜보고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죽음을 접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죽음은 기껏해야 영정사진 정도밖에 없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철저하게 격리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죽음과 나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살 거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사회가 죽음과 우리의 삶을 격리시키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죽음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이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몇 년 전에 했던 경험을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송광사 관음전에서 사분정근 기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관음전 요사채가 엄청나게 습해서 벌레가 많이 나오는 곳입니다. 어느 날은 딱정벌레가 한 마리 방에 들어왔는데 기도하고 와서 봐도 어디 안 가고 계속 있는 겁니다. 무신경하게 넘어갔는데 다음날 보니까 얘가 죽어 있습니다. 난 이 친구를 건드린 적도 없는데 왜 죽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벌레에게 매끄러운 장판은 거의 스케이트장 같은 겁니다. 게다가 벌레가 방을 탈출하려면 자신의 몸집보다 서너배는 더 높은 문턱을 넘어야 됩니다. 방을 탈출하는 것 자체가 벌레에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도전입니다.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들은 너무나 허무하게 그렇게 죽습니다. 너무나 쉽게 말입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이 필요한 이유

지금 우리들의 삶에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 않은 것은 사회라는 방어막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당연히 계속 살 거라고 생각하는 부작용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항상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

표현을 달리 하면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염두(念頭)라는 말은 생각을 항상 마음의 머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면 항상 그 염두를 거쳐서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염두에 둔다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죽음이 그 생각에 고정 변수로 들어갑니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인 나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덜고 없애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여기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맹점은 ‘나는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살 것이다’라고 하는 착각이고, 이는 사람이 가진 제일 큰 맹신이기도 합니다. 눈이 먼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요. 그런 믿음을 가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이 사회가 우리를 죽음과 격리시키고 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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