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의 소원

공원에 가면 일상의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중생들에게 행복이란 지금보다 조금 덜 행복한 삶, 지금보다 조금 덜 괴로운 삶이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사회적, 물질적 의미의 무언가를 해줄 수는 없다. 다만 불교에서는 ‘걱정할 시간에 공을 들이라.’고 제안한다.
공을 들이는 목적은 결코 현재 여기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있지 않다. 공을 들이는 것은 삶 너머에 있는 궁극적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다.
현대인들은 매우 축소된 종교의 역할 속에서 단지 힐링, 명상, 쉼 같은 것을 원하지만 불교가 추구하는 행복, 불자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궁극적 행복이다.
궁극적인 행복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원을 세워야 한다. 매일 아침 행선축원을 읽는 것부터 궁극의 행복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보자.

#기도, 수행, 열반, 중생, 행복

일상의 행복

얼마 전에 화순 호수공원에 산책을 하러 갔습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는데요. 가족 단위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 간단히 음식을 먹기도 하고 텐트를 쳐놓고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아주 여유로운 휴일 오후에 혼자서 왔다갔다 하는사람은 저밖에 없더라고요. 스님도 저 혼자고요. 이렇게 구경을 하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휴일 오후에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과연 일상의 이 작은 행복들을 누리는이들에게 불교가 들어갈 틈이라도 있겠나,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이상 더 무엇이 필요할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이었지요. 

마침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은 자우림이라는 밴드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요.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은행잔고. 그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라는 구절입니다. 

눈으로 보고 있는 모습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인데 귀로 들리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의기준이었습니다. 그래도 차는 하나 있어야지, 내 집은 하나 있어야지, 통장에 돈은 얼마 정도 있어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걱정을 안 하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행복을 지켜주는 것 아닙니까. 말로는 차나 아파트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면서 솔직하게는 제일 중요하게따지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내레이션은 그런 게 더이상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하니, 참 언밸런스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중생의 행복, 지금보다 조금 덜 괴로운 행복

다시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상의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불교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이 사람들은 무엇을원할까? 제가 보기에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행복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 같았습니다. 단지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고, 지금보다 조금덜 고통스러운 삶을 바라는 게 중생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가 아파트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이 고급 세단 한 대씩을 뽑아줄 수 있을까요? 은행 통장에다 1억 원씩넣어줄 수 있나요?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그런 건 못 합니다. 우리 불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조금 덜 고통스러울 수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절에 나오시는 보살님들을 보면 다들 하루하루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더 걱정할 게 없는데… 우리장남이 사업만 잘되면 정말 걱정이없는 사람인데. 우리 딸래미가 시집만 가면 정말 걱정이 없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걱정이 없는데말끝에는 항상 걱정이 따라옵니다. 항상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순 호수공원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은 그런 걱정 없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코로나도 조금 풀리고 날씨도 좋아지고 하늘도 화창하고.사람들이 오랜만에 나와서 참 행복해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중생이란 사람들은 걱정을 달고 삽니다. 걱정하지 않으면 중생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제가 묻겠습니다. 중생들이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덜고통스러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불교다, 그런 방법이 다 부처님 가르침속에 있다 라고 하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정답은 틀린 말입니다. 부처님이 2,500년 동안 하신 말씀이 일상에서 조금 더 행복하고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좀 더이야기해봅시다. 

걱정할 시간에 공을 들이라

얼마 전에 템플스테이에 온 모녀와 차를 마셨습니다. 엄마는 50대 중반 정도로 결혼을 일찍 한 것 같았습니다. 젊은 시절 고생해서 애들을 키워놓고 이제야 좀 살만한데, 서울에 있는 아들 일이 안 풀립니다. 그래서 항상 아들 걱정만 하고 있는 거에요. 제가 그 보살님한테 말했습니다. 

“걱정을 하시는만큼 포인트로 적립되면 아드님은 진작에 출세하고 진작에 부자가 됐을 텐데 왜 그런 거는 포인트로 적립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보살님, 보살님이 아무리 걱정을 많이 해도 그 포인트가 적립되는 게 아닙니다. 주변에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서울에 있는아들이 무슨 재주로 보살님이 걱정을 하는 걸 알겠어요. 설령 안다고 치더라도 엄마가 걱정만 하고 있으면 아들도 신경이 쓰여가지고 되던 일도안됩니다.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공을 들이세요. 절에 다니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하루 중에 특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하세요. 아들을 위해서 또는 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결국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야되겠다. 그런마음으로 공을 들여야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득이 될 겁니다. 걱정만 하고 있으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걱정할 시간에 공을 들이십시오.” 

우리 불자님들도 절에 와서 열심히 공을 들입니다. 부처님께 공을 들이니까 불공을 들인다고 한죠. 왜 부처님께 공을 들이나요? 제가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지금 현재 여기에서 행복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살자고부처님이 2,500년 전에 그 고행을 하신 게 아니에요. 이걸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공을 들이는 목적… 삶 너머 궁극적 깨달음

불교는 우리의 삶 너머를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고,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고,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고, 초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목표는 지금 여기에서 걱정 없이 행복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삶 너머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완전한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이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은 공을 들일 때 기왕이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겁니다. 

불교가 시작할 때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애시당초부터 ‘나는 새로운 종교의 교주가 되어야겠다.’ 해서 종교를창시한 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열심히 수행을 했고 내가 수행한 결과를 나 혼자 가지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해서 전법을 시작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당시의 이야기에 이런 것들이 있지요.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시고 이 어려운 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것인가고민하여 법을 설하기를 포기하려고 하자 천신들이 와서 “한 명이라도 부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부디 중생들을 위해서 법을 설해주십시오.” 간청을 하여 부처님이 법을 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부처님께서 완전하게 깨달음을 얻고 나서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하다 보니까 따르는 무리가 생기고, 그래서 교단이 생기고 종교로 발전한 거예요. 처음부터 부처님이 ‘나는 불교라는 종교의 교주야.’ 라고 시작한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불교는 종교로써 우리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나라가 어려울때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호국불교로 역할을 했고, 이 사회가힘들 때는 (기독교적인 표현이지만) 빛이 되고 소금이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세상살이 힘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지처가 되었고, 힘이 되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현대인이 불교에 바라는 것… 명상, 쉼, 힐링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제가 비록 종교에 몸 담고 있는사람이지만 ‘천덕꾸러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합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아닙니다. 전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개신교는 더 합니다. 카톨릭은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종교가 언제부턴가 모르게 천덕꾸러기가 되고, 종교가종교로써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되니까 요즘은 사람들이 불교에 기대하는 것이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명상은 하나의 사업이 되고, 불교는‘절에 와서 템플스테이 하면서 편하게 쉬어라, 마음을 쉬는 게 최고다.’라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불교에서 이런 것들을 얻습니다.

어떻게하면 내 마음을 위로 받고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치료받고,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 불교가 2,500년 전부터 가지고있던 수행법 속에서 이런 부분만 차용한 겁니다. 우리 증심사도 그렇지만 각 사찰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불교가 종교로써역할하기보다 이제는 현대인들의 마음의 휴식처, 마음의 치료처, 현대인들이 힐링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현상을 부처님이 의도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과거에 전통적으로 해오던 종교의 역할이 축소되니까 현대인들이필요로하는 것들을 불교에서 찾은 것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힐링이다 템플스테이다 하는 것들입니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기서, 보통 사람들은 걱정을 달고 사는데 이런 사람들은 열심히 공을 들여서 근심을 미래의 힘으로 바꾸는 게 옳바른길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있고 원하는 게 있으면 불공을 드립니다. 불공을 드리면서 기도를 하고 사경을하고 주력을 합니다. 걱정할 시간에 공을 들이는 것을 불교 속에서 이미 충분히 해왔습니다. 

불자가 불교에서 추구할 것… 궁극적 행복

그런데 불자라면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불교의 목표가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행복하자 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분명히 드렸습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행복, 부처님이 깨닫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인 행복이지 지금 잠깐 화창한 주말 오후에 호수공원을 거닐면서‘세상 별 거 있어? 이렇 게 사는 게 행복이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추구하는것은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가지고 있는 고통 그 자체를 완전히 뿌리뽑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삶을 넘어서는 결단이 없이는 부처님이 이야기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상은 불교가 아닙니다. 지금 세간에서 하고 있는 명상은 지금 이 순간 힘들고 지친 마음을 잠깐 쉬는 겁니다. 힐링은 불교가아닙니다. 잠깐 쉬는 거예요. 마음을 다스리는 겁니다. 반면 불교는 궁극적으로 내 삶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수행입니다. 부처님도 그런 결단을통해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약한 소리를 합니다. ‘어떻게 나하고 부처님을 비교하나. 부처님은 워낙 위대하신 분이니까 그렇게 완전하게 깨달음을얻으신 거고. 우리 같은 중생은 부처님께 불공 열심히 올리고 기도 열심히 하고 절에 열심히 다니는 것만 해도 이번 생에 복은 충분히 짓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이 재가자들에게 하는 법문에는 항상 공덕을 많이 지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우리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원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원을 세워야 하느냐? 행선축원문을 보면 됩니다. 행선축원을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실 거에요. 행선축원은 주로새벽예불을 할 때 스님이 하는 축원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용맹스런 지혜를 갖게 하시고 노사나불과 같은 큰 깨달음을 얻게 하소서. 문수보살과 같은 큰 지혜와 보현보살과 같은 광대한 행원 갖게 하시고 지장보살과 같은 크신 원력과 관세음보살과 같은 대자비를 지니게 하소서. 

  이런 축원을 새벽마다 스님들이 합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처럼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으니 지켜봐 주십시오, 라고아침마다 축원을 하는 겁니다. 이 축원을 전국에 있는 모든 사찰의 스님들이 새벽마다 합니다. 

불자라면 ‘공’보다 ‘원’을 세우자

그런데 그런 각오를 스님들만 가지라는 것이아니고 우리 불자들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걱정을할 시간에 공을 들이면 중생으로 살아가는 데에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자라면 공 드릴 시간에 뭘 해야 됩니까? 원을 세워야합니다. 공들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공을 들여야 절도 먹고 삽니다.(웃음) 공도 들이지만 기왕이면 원을 세우라 이겁니다. 

원을 어떻게 세울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앞서간 스님들이 좋은 말들을 골라서 읽기 좋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하면됩니까? 아침마다 읽기만 하면 돼요. 여러분들도 아침마다 일어나서 행원축원 한 번씩 읽으시라는 겁니다. 읽으면서 ‘아! 불자로써 나도 이런 원을세우고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지금 당장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할지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지금 생 아니면 다음 생 아니면 다다음생에라도 부처님처럼 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지금 이 순간의 사소한 행복에 안주하지 않고부처님처럼 궁극의 행복을 향해서 갈 수가 있다 이겁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공을 들이고, 공을 들일 시간이 있으면 원을 세우십시오. 구체적으로는 매일아침마다 행선축원을 읽으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아침에 행선축원을 읽는데 오늘 유난히 읽기가 싫다, 마음이 안 땡긴다 그렇다면 증심사주지가 새벽예불을 빼먹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행선축원을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증심사 주지도 열심히 예불에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행선축원을 매일 아침마다 부지런히 읽으세요. 그렇게 저하고 약속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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