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바라보는 부부의 관계

불교에서는 부부를 도반의 관계로 본다. 함께 수행하고 서로 존중해야 할 가장 가까운 선우로 여긴다.
흔히 우리는 ‘선지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스승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선지식의 본 뜻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친구인 ‘선우’이다. 경전에서는 도반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에 대하여 나에게 유익한 일이며, 자애로운 행위를 일으키며, 나의 마음을 버리고 당신의 마음을 따르려는 한마음이 생긴다고 표현했다.
부부관계에서도 ‘성격차이’로 포장한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선지식과 도반으로 여기는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가족, 공동체, 관계, 부부, 인욕

불교에서는 부부를 어떻게 볼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장가도 안 가보고 애도 키워보지 않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웃을 분들이 있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저는 육십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으로 가족과 부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간에는 개인적인 주관보다는 경전에서 부부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피로써 맺어진 사이지요. 그런데 가족 중에 피로 맺어지지 않은 사이가 있습니다. 부부입니다. 때문에 부부라는 관계는 정말 묘하고 모순이 많은 관계입니다.

부부는 혈연이 아닌 가족 

첫 번째. 부부는 혈연이 아닌데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그냥 구성원이 아니고 가족을 만들어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혈연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습니다. 좋을 때는 하염없이 좋지만 싫을 땐 쳐다도 보기 싫어하는,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가 부부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책임지고 살기 때문에 이 모순을 피부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제가 볼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작년 11월에 ‘가족의 의미’를 주제로 세 차례 법문을 했습니다. 부부에 대해서는 험한 세파를 헤치고 가족이라는 배를 같이 이끌어가는 동지적인 관계가 부부이며 불교적으로 말하면 도반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가족을 배에 비유한 이유는 가부장제가 심하던 시절에 빗대면 남편은 키를 잡는 선장이요 아내는 그 외의 잡다한 일을 하는 선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오히려 아내가 집안의 선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은 굳이 비유를 하자면 기관사라고 할까요. 배가 계속 갈 수 있도록 엔진을 돌리는 것이 기관사의 역할입니다. 어쨌든 크게 보면 부부는 힘을 합쳐서 가족이라는 배를 이끌어가고 있는 동지이며도반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한 부부의 의무

경전에서는 부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한 바라문의 아들에게 매일 하루 세 번씩 여섯 가지 방향으로 절을 하는 이유를 설한 <육방예경>에 보면, 서방을 향해 절을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서방을 향해 절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 다섯 가지 할 일이 있느니라. 첫째는 남편이 밖에서 들어오거든 일어나서 맞이하는 것이요, 둘째는 남편이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거든 밥을 지어 놓고 집안을 말끔히 치우고 기다리는것이며, 셋째는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팔지 말고 남편이 꾸짖더라도 달려들거나 얼굴빛을 변하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남편의 가르침과 경계함을 받아서 여러가지 물건을 감추어 속이지 말 것이요, 다섯째는 남편이 고이 잠을 자거든 방안을 정돈한 뒤에 누울 것이라. 

이런 구절을 보고 ‘부처님은 너무 보수적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500년 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시대였습니다. 당연히 가부장적인 질서와 관념이 당연시되던 사회였지요. 그 시대상을 반영한 이야기로 생각하면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상대하는 데에도 다섯 가지 할 일이 있으니, 첫째는 드나들 적에 늘 아내에게 인사하는 것이요. 둘째는 때를 맞추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주는 것이며, 셋째는 금 은 주옥 따위로 몸을 장식케 하는 것이요. 넷째는 집안에 소용되는 것들을 모두 맡기어 쓰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밖에다가 첩을 두어 딴 살림을 차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이르는 부분을 보면 2,500년 전 그 시대에 일부일처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자가 능력만 있으면 둘째, 셋째 처를 둘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비공식적으로 그렇게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집에 있는 아내에게 충실할 것이며, 심지어 경제권을 아내에게 다 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당대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내에게 늘 인사하라는 것은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 말고 인격체로 존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상당히 혁신적인 생각입니다.  

부부를 표현하는 다양한 ‘명언’

지금 우리 시대는 부부를 좀 더 동등한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동등하다 보니까 과거에 비해서 부부싸움을 많이 하고 이혼도 많이 합니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이혼률이 일곱 번째로 높습니다. 서로 평등하다는 사고가 일반화되다 보니 갈등이 충돌하는 일이 많습니다.

인터넷에 ‘부부관계 명언’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부부는 3주 동안 서로 관찰하고, 석 달 동안 서로 사랑하고, 3년 동안 서로 싸우고, 30년 동안 서로 참는다.’ 맞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맞는 말 같아요. 또 저잣거리 말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남편들이 보통 친구들에게 베푸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예의만을 부인에게 베푼다면 결혼 생활에 파탄은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밖에서는 활발하고 친화력도 좋은데, 집에만 들어오면 입에 지퍼를 달았는지 대답을 안 합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내를 이유 없이 학대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녀의 눈물 방울수를 늘 헤아리고 계신다.’ 아마 탈무드가 만들어질 당시인 고대 예루살렘, 유대사회에서는 아내를 종 부리듯 학대하는 일이 많았나 봅니다. 아내가 흘리는 눈물 방울의 수를 다 세어 놓았다가 네가 죽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톨스토이가 한 말도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보다 서로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이다.”

선지식 같은 아내 

경전에 나오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수급고독원의 보시제일 수닷타 장자의 넷째 며느리 옥야가 아주 버릇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수닷타 장자가 부처님께 옥야라고 하는 이 며느리에게 한 말씀을 해주십사 간청을 했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옥야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일곱 가지 종류의 아내가 있다. 첫째는 어머니 같은 아내요. 두 번째는 누이같은 아내요. 세 번째는 선지식 같은 아내요. 넷째는 며느리 같은 아내, 다섯 째는 종 같은 아내, 여섯 째는 원수 같은 아내, 일곱 째는 명을 빼앗는 아내. 이것이 일곱 가지 아내의 종류이다. 너는 어디에 속하는가?” 옥야가 답하기를 “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해설해 주십시오.”

이후에 부처님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너무 길어서 여기에서는 소개하지 않고요. 중요한 것은 일곱 가지 종류의 아내 중에 ‘선지식 같은 아내’를 언급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식은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식을 본래 산스크리트어로는 ‘칼라냐 미트라’ 라고 합니다. ‘칼라냐’는 착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올바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트라’는 친구입니다. 즉 올바르고 아름답고 훌륭한 친구라는 뜻이지요. 우리 식으로는 선우라고 표현하지요. 선우라고 하는 것이 원래 의미에 가까운 의미인 것입니다. 

같이 수행을 하면서, 나와 더불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넓게 보면 불도의 인연을 맺어주는 사람. 이런 뜻의 선지식이 간화선으로 넘어오면서 수행자의 스승이라는 의미로 굳어졌습니다. 

선지식, 선우를 경전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사분율이라고 하는 율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기 어려운 것을 주고, 두 번째는 하기 어려운 것을 하고, 세 번째는 참기 어려운 것을 참으며, 네 번째는 비밀한 일을 서로 말하며, 다섯 째는 서로 잘못한 일을 덮어주고, 여섯 번째 괴로운 일을 만났을 때 버리지 않고, 일곱 번째 비천할 때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 선우다. 

부처님은 선지식 같은 아내를 강조했습니다. 부부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방금 전애 열거한 일곱 가지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나아가 도반 사이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가? 경전에 도반이 가져야 될 마음자세 세 가지가 제시됩니다. 

도반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 

세존이시여, 이 도반들과 함께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이롭고 유익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여기 존자들에게 여럿이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를 일으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내가 나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르면 어떨까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의 몸은 여러가지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융화하며 서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첫째. 이 도반과 함께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고 유익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로 이야기하면 내가 저사람과 가족을 이루어 같이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이롭고 유익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하고 사는 것은 죽음이야, 지옥이야.’ 그러면 같이 안 살아야죠. 

둘째. 나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내가 도반에게 홀로 있을 때나 같이 있을 떼에도 자애로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를 합니다. 도반에게 선업을 베푸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똑같습니다. 내가 배우자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내고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과 가족을 이루어서 같이 사는 게 나에게도 이롭고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셋째, 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나의 이기심과 마음을 버리고 이 도반들의 마음을 따르면 어떨까. 부부관계로 말하면 내 고집을 버리고 배우자의 뜻과 생각을 따르는 게 어떨까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도반으로 향하는 마음자세는 이런식으로 발전해 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올바른 도반관계가 아니라고 경전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몸은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부부는 도반으로서 한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도반으로써가져야 할 세 가지 단계를 배우자에게도 그대로 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결혼과 부부생활의 문제를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입니다. 그 중 하나를 봤는데 공감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질문하는 보살님이 법륜스님의 대답을 당최 듣질 않으니까 법륜스님이 이런 비유를 듭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서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스님이 그 사람을 흔들어 깨웠는데 ‘아이고 스님 저 살인마 좀 쫓아주세요.’라고 하면 맞는 말입니까? 당신이 지금 그런 꼴입니다. 꿈에서 깼는데도 여전히 나에게 살인마를 쫓아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부부관계든 친구관계든 우리가 도반으로서 관계를 가지려면 생각을 전환해야 합니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많은 갈등이 생기는 이유로 흔히 ‘성격차이’를 듭니다. 성격은 당연히 차이가 납니다. 그건 이혼의 사유가 아닙니다. 솔직하지 못한겁니다. 서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니까 부딪히는 겁니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니까 이혼하는 겁니다.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내 생각의 틀을 완전히 전환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부부로써도 도반으로써도 발전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을 버리고 도반인 배우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게 어떨까?’라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 바로 어떤 생각이 따라옵니까? ‘그러면 나만 손해잖아!’ 당연히 손해입니다. 그런데 손해 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부부가 가족이라는 배로 세상의 세파를 헤치고 나아가는겁니다. 한마음이 되자면 이기적인 마음을 덜어내야 됩니다. 거기에서 ‘내가 손해’라고 하는 게 바로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이기심을 털어내야 합니다. 생각의 전환을 하지 않고 관계의 개선은 불가능하고 부처님께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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