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탄생게의 진정한 의미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그를 편안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말이 실은 불교의 모든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자들도 잘 알지 못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이 세상 모두를 통틀어서 살펴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세상을 발견했다는 지혜의 영역이다. 부처님이 잘나서, 이 세상에 부처님부터 잘난 사람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라 말이다.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자비의 영역이다. 공성의 자리, 지혜의 자리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중생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마땅히 부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연민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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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게,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해서는 불교를 잘 모르는 분들이라도 잘 아는 문구가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보통 여기까지만 알고 있는데요. 전체 문장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입니다. 

천상천하는 모든 세상을 말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하늘 위건 지상이건 할 것 없이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한편 삼계란 온세상을 말합니다.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삼계의 온 세상이 모두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그를 편안하게 하리라 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직후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이러한 게송을 읊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경전에 나오는 말씀으로, 부처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경전에 나와 있는 대목입니다. 

설화로써의 탄생게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걷고 나서 어떻게, 인도 사람이 그것도 한문을 게송을 읊느냐? 누군가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과거 설화들은 다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 알에서 태어난 것은 말이 됩니까? 사람이 바위를 쪼개고, 호령을 치자 하늘이 갈라지고, 지팡이를 짚으면 바닷물이 갈라지고. 이런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교과서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러한 설화들은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의 상징성과 속뜻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탄생게의 경우에도 탄생게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아기부처님이 걷고 말하고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탄생게를 구절별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의 교리를 함축한 탄생게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 온 세상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나 홀로 존귀하구나.

이것이 설화라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도 이러한 의문이 남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째서 온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존귀하다고 했을까? 이건 말이 안 맞지 않은가. 불교의 교주가 불교의 교리를 부정하는 모순이 아니냐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우리 불자들도 이 부분에대해서는 딱 꼬집어서 해명을 하지 못합니다. 내지는 ‘부처님은 그만큼 존귀한 분이다.’ 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삼계개고 아당안지 三界皆苦 我當安之 | 삼계가 모두 고통으로 가득차 있으니 마땅히 내가 편안케 하리라. 

이러한 탄생게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 탄생게를 썼는지는 문헌에 나와있지 않지만 누군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분이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탄생게가 지금까지 남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는 것은 그 탄생게가 올바르고 정확하게, 함축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왜 이 탄생게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는가? 이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지혜를 이야기하고,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불교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지혜와 자비의종교입니다. 지혜와 자비의 종교인 불교의 모든 것을 단 두 문장으로 함축해놓은 것이 바로 탄생게입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 이걸 쓴 겁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최소한 원효대사 정도는 되어야 이 정도 게송을 써다 할 만큼 누군지 몰라도 정말 대단한 경지의 게송입니다. 

불교의 지혜 : 연기실상의 세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왜 지혜를 이야기하느냐? 연기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것, 공을 체득하는 것이 불교의 지혜입니다. 공이라 하는 것은 무아입니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공성입니다. 연기는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이게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기에 말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연기 내지는 공의 도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불교의 지혜라는 것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온세계, 전 우주, 우리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통틀은 것이 천상천하입니다. 그 모든 것 중에서 오직 내가 존귀하다는 것은 곧 온 우주를 통틀어보았을 때 내가 가장 잘났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내가 최고라는 말이 아니고요. 다 통틀어서 살펴보았는데 오직 나밖에 없다 이겁니다. 아무 것도 없고 나밖에없기 때문에 오직 내가 존귀하다는 겁니다. 

오직 나밖에 없다는 것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여기에 있고 하늘은 파랗고 물은 흐르고,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로 이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이런 말을 하잖아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세상, 분별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불교의 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깨달음은 모든 분별이 없어진 경지입니다. 인간이다 짐승이다, 지구다 우주다. 이런 것들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하나만 있는 것입니다. 이걸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구별을 할 수 없으므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공성입니다.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것. 당연합니다. 딱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체감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

“대웅전 마당에 연등 꼬리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연등 꼬리표가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한데, 어떻게 저 연등 꼬리표와 내가 하나라고 하는가? 말이 안 된다.”

연기의 도리를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 느낄 수 없는 겁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의 나라에 눈이 두개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바깥 세상에는 훨씬 많다. 잘 모르겠지만 눈이 두개면 멀리 있는 것, 가까이 있는 것을 구별하기도 쉽고 물체를 입체적으로 볼 수가 있다. 입체가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기 참 힘들지만 3차원적으로 세상을 볼 수가 있다.”

그러면 눈이 하나 있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입체적이라는 게 뭐냐. 설명을 해보라.”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알 수가 없습니다. 눈이 두개가 있어야 2차원 평면에 맺힌 망막의 상을 3차원적으로 이해하는데 눈 하나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입체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하니까 그런가 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느끼지는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연기의 도리,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이며 구별이 없다는 이야기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느끼기가 힘듭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지혜의 영역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물고기에게 물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느끼지 못합니다. 한 물고기가 낚시꾼에게 걸려서 물밖으로 나갔다가 기적적으로 도망쳐 물속으로 들어왔다고 할 때, 다른 물고기들에게 “우리가 사실은 물 속에서 산다. 물밖에는 공기라는 게 있고 그건 물과는 달라서 우리가밖에 나가면 곧 죽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아 그래? 그런데 물이 어디에 있는데? 좀 보여줘봐.”라고 합니다. 그럴 때 이 물고기는 얼마나 답답할까요. 

물 속에 사는 물고기의 생각으로, 눈이 하나밖에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제일 귀중한존재구나. 내가 최고구나.’ 라는 식으로 이 말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왜냐? 우리 중생들은 개별적인 나, 대상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의 ‘나’는 굳이 표현하자면 참 나, 연기실상의 도리, 진여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이 문장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 안에 불교의 지혜가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문장만 깨치면 불교를 지혜를 깨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자비의 영역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자비를 말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새의 양 날개처럼 같이 갑니다. 그래서 탄생게에서도 두 문장으로 이야기합니다. 

삼계개고, 온 세상이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눈 두 개 있는 사람이 눈 한개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니 너무 답답하고 너무 괴롭고 너무나 안된 겁니다. 입체감도 원근감도 없이 사는데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한 마음이 자비(慈悲)의 비심(悲心)입니다. 

자애스럽다 할 때 ‘자’는 지혜에 대한 통찰에서 나옵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너는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아니야 하는 마음에서는 자애로운 마음이나 공감하는 마음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불교의 지혜를 완전히 마음으로 체득했을 때에만 내가 따로 있고 남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다 내 일이고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입니다. 이것이 자비심할 때 ‘자’입니다.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중생들의 삶을 보니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본인들은 그것이 괴롭고 고통스러운지를 모릅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삼계가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통스러운 건 당신 일이고 나는 괴롭지 않으니 상관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자비심이 아닙니다. 

보살의 마음

모든 존재가 괴로우니, 번뇌 속에 살아가니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겠다. 번뇌의 불길을 끄겠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지만, 나 개인의 고통은 이미 사라졌지만, 중생들이 괴로우니 나 역시 괴롭다고 하는 것은 보살의 마음입니다. 보살은 깨달았으나 중생들의 고통이 너무나 마음 아파서 개인의 깨달음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중생이 깨달을 수 있도록 중생과 더불어 살면서 노력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중생들의 고통을 편안하게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자비심입니다. 지혜를 체득하면 자비심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실천은 자비심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는 말에 불교의 모든 지혜가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 불자들은 명심해야겠습니다. 

주변에서 누군가 물어보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씀하십시오. 부처님 당신이 저 혼자 잘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한 것이 아니라고요. 그정도는 해야 불교 믿는 사람이다, 절에 다니는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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