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2019년 증심사 백중 2재 법문으로 함께 생각하는 부처님.
증심사 비로전은 부처님의 법신으로 불리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부처님은 보신, 법신, 화신의 삼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보신은 선업의 과보로써 부처님이 된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법신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화신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 화현한 모든 존재를 말한다.
신구의 삼업이 뻗어나가는 마음머리에 부처님을 붙여놓으시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든 것 중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로자나불, 수행, 염불

증심사 비로전의 게송

반갑습니다. 백중 2재 법회입니다. 지난주 초사흘법회에 이어서 오늘도 관음시식에 나오는 구절을 가지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합장하시고 따라 하십시오.

보화비진요망연 報化非眞了妄緣 보신 화신이 다 참모습이 아닌 거짓된 인연이니

법신청정광무변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은 청정하고 넓어서 가이 없구나

천강유수천강월 千江有水千江月 천 강에 물 맑으니 천개의 달 비추고

만리무운만리천 萬里無雲萬里天 만 리에 구름 없으니 만 리가 푸른 하늘이네

상당히 표현이 문학적인, 엄청나게 유명한 게송입니다. 증심사 어딘가에 이 구절이 붙어 있습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증심사에는 주련이 걸린 곳이 비로전밖에 없습니다. 가서 읽어 보시면 이 구절입니다. 왜 비로전에 이 주련을 걸어 놨을까요? 비로전에서 모시는 부처님이 비로자나불이고, 비로자나불은 법신이기 때문입니다. 게송에 보면 법신청정광무변이라고 합니다.

먼저 보신, 화신, 법신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부처님은 법신, 보신, 화신 이렇게 세 가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삼신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보신(報身), 선업의 과보로써 오신 부처님

고타마 싯다르타는 2,500년 전에 인도에 태어나서 수행을 열심히 해서 깨달음을 얻은 후 40년 동안 쉬지 않고 포교와 교화에 전념하시다가 80세 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너무 위대하니까 돌아가신 걸 인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승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신으로 추앙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잠깐 우리 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가 다시 당신 계시는 곳으로 가 계시는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상주하는 존재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이런 몸으로 상주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 그 자체가 곧 영원한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진리로써 상주한다면 육신하고 상관없이 영원히 상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법신이 탄생합니다. 진리 그 자체가 부처님이며 법신이고, 이를 형상화한 게 비로전에 있는 비로자나불입니다.

법신(法身), 진리로써 상주하시는 부처님

그러나 법신으로만 계신다고 하면 우리 같이 무지몽매한 중생들은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여 부처님이 자비심을 내어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중생들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당신의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화신입니다. 석가모니불이 대표적인 화신입니다. 과거에는 연등불이 오셨고 미래에는 미륵불이 그렇게 오십니다.

보신은 무엇일까요? 보는 업보, 과보할 때 보(報)입니다.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아서 그 과보로 부처가 된 겁니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29세에 출가하여 6년 동안 수행한 그 수행력으로 부처가 되었다고 하기에는 부처님이 너무 위대한 겁니다. 그래서 전생과 그 전생, 전생의 오백생 동안 어마어마한 수행과 자비행의 선업을 쌓았으며 그런 공덕의 과보로 태어났다고 하는 부처님이 보신입니다.

왜 법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을까를 거꾸로 생각하면, 다시 말해 제자들이 부처님을 너무나 존경해서 신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 부처님은 우리와 별개의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되레 우리와 같은 수행자인 것입니다.

화신(化身), 우리 곁의 만물로써 존재하시는 부처님

또한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게 우리 옆에 와있는 부처님이 화신불이라고 했습니다. 이 논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생명이 다 화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이 발전하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 부처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공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자비심은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역행보살과 연결됩니다. 역행보살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정말 미운 사람을 보면 역행보살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가지지 말고 ‘아, 저 사람이 나보고 마음공부를 하라고 일부러 저런 모습으로 행동을 하는구나’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한편으로 역행보살의 논리를 들여다보면 결국 나 잘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인간말종이지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너하고 상대 안 하겠어’ 하는 겁니다.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다른 이가 아닌 내가 혹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역행보살이지는 않은가 되돌아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불자의 자세입니다.

게송으로 보는 삼신(三身)

다시 게송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법신은 청정하여 가이 없구나’라고 했습니다. 보신이나 화신은 참 모습이 아니라 과보를 받았다거나 중생들의 바람이나 원이라는 인연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런 즉 이 세상 전부가 다 부처님의 몸이며, 법신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이런 비유도 듭니다.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떴는데 시냇물에도 바다에도 강에도 연못에도 시궁창에도 찻잔에도 달이 비춥니다. 천 개의 강마다 그 강에 맞는 모습으로 달이 비춥니다. 만 리에 달하는 온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고 그 하늘에 달빛이 비추면 달빛이 온 하늘을 다 채웁니다. 그것이 바로 법신입니다.

하늘에 있던 달은 법신이고,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모습이 바뀌어 보이는 것은 화신입니다. 이렇게 법신과 화신의 관계를 하늘에 뜬 달과 그 달이 강물에 비춘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이렇게 법신, 보신, 화신의 개념을 이 게송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게송만 보면 마치 법신이라는 것이 온 우주에 가득 찬 신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두 번째 게송을 읊어보겠습니다. 나홍스님의 제자가 아미타불 수행이 잘 안 된다고, 아미타불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하자 지어주신 게송입니다.

나옹스님의 아미타 게송

아미타불재하방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막망 着得心頭切莫忘 마음머리에 붙들어 잊혀지지 않게 하되

염도염궁무념처 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다한 끝, 생각 없는 곳에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 六門常放紫金光 여섯 문에서 언제나 금빛광명을 놓으리

아미타불이 어디에 있는가? 나홍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무슨 생각을 할 때마다 생각이 마음머리를 거쳐 지나가므로 그 마음머리에 아미타불을 착 붙여놓고 있으라고 합니다. 즉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네 글자를 항상 마음머리 즉 염두(念頭)에 두어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 이 네글자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육문을 통해서 방광한다는 겁니다.

방광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몸에서 금색 빛이 쫙 나가는 것이고 육문이란 내 안에 있는 안이비설신의를 말합니다. 즉 아미타불은 내 안에 있으므로 방광을 하면 안의비설신의 여섯 개의 문을 통해서 뻗어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네가 바로 부처라는 걸 깨달을 것이라는 나홍스님의 말씀입니다.

즉심시불과 짚새기불

그래도 이해를 못 하겠다 하는 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우스개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옛날 옛적 신심이 깊은 할머니가 며칠 동안 공양미를 싸들고 절에 가서 열심히 공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손녀딸이 보기에 참 우리 할머니가 한심해 보였나 봅니다. “할머니는 부처가 뭔지나 알고 그렇게 열심히 비는 거야?” 손녀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도 잘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갔을 때 스님한테 물어봤습니다. “스님, 부처가 뭡니까?” 그러자 스님이 하는 말이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니라” 했습니다.

잘 모르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어봐야 하는데 할머니는 묻지도 못하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서서 마을까지 즉심시불, 즉심시불 외우면서 하면서 옵니다. 그러다 개천에 퐁당 빠져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들은 말을 까먹어버렸어요. 겨우 기억해내서 다시 외우기 시작합니다. 짚새기불, 짚새기불. 그렇게 집에 돌아온 할머니가 손녀에게 말했니다. “부처가 뭐냐 하면, 짚새기불이야.” 그러자 손녀딸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흥, 지푸라기가 무슨 부처야!”

할머니는 그 날부터 드러누워서 왜 부처님을 짚새기불이라고 했을까? 이 생각만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생각은 전혀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도를 깨쳐버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하늘의 달처럼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수행해서 깨달으면 우리가 바로 부처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법문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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