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하는 마음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는 니르바나 즉 열반이다.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고, 선정에 들고, 지혜의 눈을 여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계정혜 삼학에 매진할 수는 없는 일. 일반 불자들이 금생과 내생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일로 보시와 지계를 제시한다.
보시의 의미를 넓게 설정하면, 다른 사람에게 내 자신을 낮추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요즘 말로 ‘봉사’라고 한다. 또한 불자 5계를 지키는 지계 또한 선업을 쌓는 훌륭한 방법이다.
이번 생에 쌓은 보시와 지계, 두 가지 선업으로 하여금 내생에 분명히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도, 봉사, 수행, 알아차림

백중 천도재와 봉사가 무슨 상관?

오늘 아침 BTN불교TV에서 ‘행복한 피자가게’ 소식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과 봉사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중 천도재와 봉사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연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에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결국은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인도 대륙을 떠돌며 설법에 나선 이유는 나 혼자 행복하지 말고 다른 중생들도 다 같이 영원한 행복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가 전부입니다.

부처님이 경전 등을 통해 말씀하신 행복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금생의 행복이요, 두 번째는 내생의 행복이고, 세 번째는 영원한 행복입니다.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궁극의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살아있는 지금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금생의 행복이나 어떻게 하면 죽음 후에 좋은 몸을 받아서 태어날까 하는 내생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셨습니다. 금생과 내생에서의 행복은 깨달은 자가 얻는 열반이나 니르바나가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또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금생에서의 행복, 내생에서의 행복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행복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열반 즉 니르바나는 번뇌의 불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영원한 행복이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계정혜 삼학이란 무엇입니까? 계율을 지키고[戒], 참선하여 선정을 닦고[定], 지혜의 눈을 여는[慧] 것입니다. 계를 지킴으로써 내 몸을 잘 다스리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마침내 지혜가 열려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의식주에 얽매이지 않고 선정을 닦는 수행만 하며 살아간다면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 안에 살아가면서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보시와 봉사로 이루는 행복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키워드는 간단합니다. 보시와 지계입니다.

먼저 보시(布施)라고 하면 불사에 동참하는 물질적 보시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재화 즉 돈을 내는 행위는 보시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시의 의미를 넓게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모든 행위가 다 보시입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봉사’가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보시의 의미와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 봉사라고 하면 돈을 기부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재능이 있으면 재능으로 봉사하고, 특별한 재능 없으면 육체노동으로 봉사하고,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기부해서 봉사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마음으로 봉사하면 됩니다. 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봉사입니다.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보시’는 ‘봉사’라는 것을 마음과 머리에 입력해야 합니다.

봉사는 타인에게 내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봉사에 임하는 마음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힘들다고 안 하고 바쁘다고 안 하고 기분 나쁘다고 혹은 기분 좋다고 안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선택적으로 하는 봉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봉사를 하면서도 내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속으로 짜증이 나고 그것은 필히 얼굴에 나타납니다.

봉사는 또한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상대의 지위고하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다만 한결같이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 봉사입니다. 한결같이 평등하게 나 자신을 낮추는 봉사를 열심히 하면 금생에 복이 온다는 이야기를 부처님께서 하셨습니다.

지계와 도덕적인 생활로 쌓아가는 행복

다음은 지계(持戒)입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살, 도, 음, 망, 주의 5계만 지키면 됩니다. 보살계본에 나오는 48계를 모두 외울 필요도 없고 실은 몰라도 됩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는 이 다섯 가지 계만 지키면 됩니다.

지계라고 하면 흔히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참고 인내하는 것, 지키면 대단하고 잘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고는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1,600년 이상 내려오다 보니까 개념이 하나의 이미지로 정착되어버려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를 지키는 생활을 요즘 말로 바꾸면 도덕적인 생활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국내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만 좋으면, 음악적으로 잘 하기만 하면 된다는 천재강박증만 남고 도덕성은 없었기 때문에 불교적으로 말하면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다섯 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계율이 살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참 애매모호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밥을 먹는다고 하면 피치 못하게 두 발 짐승, 네 발 짐승, 어류 등을 먹게 됩니다. 채식을 하는 스님들은 풀을 먹습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풀도 생명입니다. 풀을 먹는 것도 살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정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다른 어떤 생명을 죽이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살생은 해야 합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살생, 불자의 양심을 거스르는 살생은 하지 말자는 겁니다. 만일 어쩔 수 없이 불자의 양심에 거스르는 살생을 했다면 참회를 하면 됩니다.

“스님, 풀 뽑는 것도 살생 아닙니까?”

제가 송광사 강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돌아가신 보성 방장스님께서는 학인들만 보면 풀을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겹도록 매일 말입니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제가 강사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방장스님은 우리나라 율사 중 제일 높은 어르신인데 왜 우리더러 살생을 하라고 합니까? 풀 뽑는 것도 살생 아닙니까?”

그러자 강사 스님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살생입니다. 제가 예전에 대만에서 공부할 때, 노스님들이 낮에는 소일삼아 마당의 풀을 뽑고 저녁이 되면 법당에 들어가서 참회를 하셨습니다. ‘대중이 살아가려면 풀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없어야 할 자리가 있어 오늘 불가피하게 살생을 했습니다. 참회합니다’ 하고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방장스님의 뜻을 잘 헤아려서 풀을 뽑고 그 후에는 참회하면 됩니다. 풀 뽑기 싫어서 이런 질문 하지 말고요.”

여러분도 살생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사회적으로 허락되는 선에서, 불자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만에 하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참회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에서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내 것이 아니면 욕심을 안 내면 됩니다. 욕심이 일어났다면 그 마음을 돌이켜보며 참회하면 됩니다. 같은 맥락으로 계를 지킨다는 것을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관점으로 봐서 어렵다 생각하지 말고 그저 도덕적으로 살자고 생각합시다.

보시와 지계, 좋은 업을 짓는 일

금생에 봉사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말하자면 좋은 업을 짓는 것입니다. 봉사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내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 스스로 엄격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남에게는 나를 낮추되 나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살면 금생 내지는 내생에 분명히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선업을 지으면 금생 혹은 내생에 과보로 돌아오고, 꼭 나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업으로 작용합니다.

우리가 백중에 천도재를 지내는 것 역시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이 살아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미 먼저 가신 분들이니까요. 이분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천도재를 지내는 선업을 쌓으면 이 업이 그 영가나 다른 몸을 받은 중생에게 도움이 되는 업으로 작용합니다. 내가 지은 업은 나 혼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은 업은 내게 돌아올 수도 있지만, 남에게 도움을 주는 업일 수도 있고 아예 업을 없애버리는 업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이 순간에 열반을 증득했다고 하면 모든 업이 없어지고 과보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로 가장 강력하게 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나쁜 의미도 있습니다. 오무간업입니다. 부처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나쁜 짓을 말합니다. 첫째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 둘째 아라한을 죽이는 것, 셋째 승가의 화합을 깨는 것, 넷째 아버지를 죽이는 것, 다섯째 어머니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패륜적인 오무간업을 지으면 지옥으로 직행합니다. 악업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금생이 다하면 지옥 내지는 지옥과 같은 곳에서 과보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열심히 봉사하고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선정을 닦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마음을 닦고 계를 지키는 이른바 보시와 지계는 선정으로 가는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이런 기초 과정은 금생과 내생에 좋은 과보를 줄 뿐 아니라 영원한 행복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거듭거듭 이야기하지만 봉사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금생에도 복 받고 내생에도 복 받고 나도 복 받고 가족들도 복 받고 친구도 복 받고 덕분에 지금 앞에서 법문하고 있는 스님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모두들 열심히 봉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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