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도차제론 4

중사도의 목표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회가 주는 고통에 대하여 깊이 명상하여 초발심을 내어야 한다.
인간, 아수라, 천상 등 삼선취의 고통을 알고 고통을 명상하면 깨달음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고통은 탐, 진, 치, 만, 의, 악견 등 근본번뇌와 수번뇌에서 말미암는다. 번뇌는 나의 실재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지혜와 선정으로써 바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경전, 기도, 나는누구인가, 무아, 수행

보리도차제론 제3강은 현장강의만 이뤄지고 동영상 촬영은 이뤄지지 않은 바, 3강을 건너뛰어 4강으로 이어지는 점 양해 바랍니다.

“우리는 주로 이생만을 생각하며 다음 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인간의 몸 받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삼악도의 고통에 대해서도 어떻게 귀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인과에 대해서도 알았으므로 다음 생을 주로 생각하고 이생에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하사의 길을 깨우치게 되고 중사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전 시간에 하사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위 구절은 하사도에서 배운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하사도의 목표는 다음 생에 더 나은 몸을 받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반면 중사도의 목표는 윤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중사도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중사도

중사도의 목표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회가 주는 고통에 대하여 깊이 명상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 아수라, 천상 등 삼선취의 고통을 알아봅니다. 고통을 명상하면 깨달음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왜 윤회하는지를 깊이 생각합니다. 이것이 중사도의 진행 순서입니다.

윤회의 고통에 대한 명상

“동물들이 끈에 묶여 있다가 풀리면 자유로워지듯이 인과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해탈이다. 해탈하기 위해서는 중사의 길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 방법은 바로 사성제와 12연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해탈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과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곧 윤회의 끈에서 풀려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탈하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 교리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는 해탈과 윤회를 동일시합니다. 윤회는 해탈로 설명할 수 있지만 해탈을 윤회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은 윤회 이외에도 멸진정, 번뇌의 종식, 적정 등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인과의 법칙에 의하면 고성제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 고통에 대해서 알게 되면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며 고통을 모르게 되면 고통을 없애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을 없애려는 마음이 생기면 마땅히 그 원인을 알고 그것을 멸하여 닦아나가는 것이 수해의 요체인 것이다. 병든 사람이 건강을 되찾으려면 먼저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하고 건강을 되찾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약을 쓰는 방법을 알아야 하듯이.”

불교에서 사성제(四聖諦)라는 말을 씁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성제는 고집멸도입니다. 고성제는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것,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것, 도성제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 멸성제는 수행을 하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이 집성제이다. 집착에는 인과의 집착과 번뇌의 집착 두 가지가 있다. 집성제를 알고 나서는 집착을 버려야 하며 그 결과가 멸성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멸성제를 얻기 위한 방법이 도성제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듯 해탈을 이루려면 고통의 실상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제일 먼저 일체는 고(苦)는 사실을 알아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면 왜 고통스러울까 궁리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아서 수행하게 되고, 고통이 없는 상태로 나아간다는 단순한 논리입니다.

초기불교에서 사성제의 고는 일체가 변화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무엇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있게끔 하는 내 안의 고정된 생각이 고통이라고 합니다. 실제의 세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과 연에 따라 생하고 멸하는 연기실상의 세계인데,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려면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막 태어난 갓난아이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다고 합니다. 언어를 학습하면서 나와 너의 구분, 이것과 저것의 구분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어의 세계에 들어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실제 연기실상의 세계가 내가 만든 일체라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일체, 즉 보는 놈, 보이는 것, 듣는 놈, 들리는 것, 주체와 객체, 내입처와 외입처는 마음속에 고정된 틀일 뿐입니다. 내 마음의 일체는 고정되어 있지만 연기실상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시간적으로도 구분할 수 없고 공간적으로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내 머릿속의 고정된 세계와 완전히 다릅니다. 이러한 언발란스에서 고통이 생겨납니다.

왜 그것이 고통으로 인식될까요? 집착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착은 ‘내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내 집의 질서와 진열을 어떤 방문객이 와서 흩트려 놓으면 화가 나지요. 이것은 소유욕에 의한 집착입니다. 단지 소유욕에 의해서 모든 세상이 고통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사자가 나왔을 때 ‘사자가 있네’라고 생각하고 도망치면 죽습니다. 사자가 눈에 보이자마자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 신호를 주어 바로 도망가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게 만든 무의식 깊은 곳의 집착은 생존에 의한 집착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체가 고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착이 완전히 없어져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성제입니다.

윤회세계 전체의 고통을 알기 위한 여섯 가지 방법

1. 나에 집착하는 하물

2. 만족하지 못하므로 생기는 허물

3. 몸이 자주 바뀌는 허물

4. 자주 태어나는 허물

5. 지위가 자주 바뀌는 허물

6. 친구가 없는 허물

이렇게 여섯 가지 허물로 인해서 윤회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집착이 윤회를 지속시키는가?”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해 집착의 여러 가지 형태를 보여줍니다. 공통적으로는 나에 집착하는 허물입니다.

“윤회세계의 행복이란 소금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진다. 만족할 줄 모르면 거지와 다르지 않은 것이 인간이다. 이같이 윤회세계의 행복이란 한낱 물거품 같은 것이다.”

만족하지 못하므로 생기는 허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면 거지와 같다는 표현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저의 젊은 시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20대 때 사회운동을 한다고 집에 형사가 찾아올 때에 제 모친의 소원은 ‘그저 감옥에만 가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집에 연락 좀 자주 해라’, ‘번듯한 직장을 가져라’, ‘결혼만 하면 아무 소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이 법문을 듣는 여러분도 제 모친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만족이 없으면 끝이 없습니다. 나 자신 혹은 누군가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할 때 이런 문구를 떠올리면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조금 멈춰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몸이 자주 바뀌고 자주 태어나고 지위가 자주 바뀌는 허물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윤회가 끊임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다면, 고귀하게 태어날 때가 있고 비천하게 태어날 때가 있다면, 우리 주위의 좋고 나쁜 모습들이 나의 전생이라면, 이런 생각들을 깊이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렇게 돌고 도는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 병들어 고통받거나 죽는 순간에도 모든 것을 혼자 겪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친구가 없는 허물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체는 내가 느끼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나에게만 유일한 세계입니다. 나와 당신이 같은 대상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같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친구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연기실상의 세계가 바다라고 한다면 그 바다 위에 점점이 솟아 있는 섬들이 바로 우리 개개인가 가지고 있는 일체입니다.

삼선취의 고통

삼선취는 육도 중 좋은 세 가지,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수라, 인간, 천신들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수라는 싸우기 좋아하는 세계, 인간은 욕망하는 세계이고, 천상은 전생의 선업으로 지복을 누리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삼선취에 있더라도 복이 다 떨어지면 삼악도로 떨어질 수 있으니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지면 아름다운 여자가 많은데 이 여자를 신들이 빼앗아간다. 그래서 아수라는 신을 질투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신을 질투하므로 신과 싸움을 하지만 아수라들은 항상 지기만 할뿐 이길 때가 없다. 이렇게 아수라들은 죽을 때까지 싸우고 질투하는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아수라 세계의 이야기인데 인간세계와 흡사합니다. 무언가 가진 사람들은 더 가지려고 하고 상대방이 많이 가진 것에 대해서 질투하고 힘들어 합니다. 소유한 사람은 소유한 것으로 인해서 괴롭습니다. 무언가 지키려는 노력, 힘을 쓰는 것, 빼앗기면 괴로운 것. 이런 고통을 말합니다.

인간세계의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으로 나뉘며,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으로 정리됩니다.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 죽는 고통입니다.

“모태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는 소위 생가죽을 벗기는 고통과 고양이가 쥐구멍을 통과하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전생의 공부를 다 잊어버리고 지혜도 없어지고 먹고 잠자고 걷는 것들을 다시 배워야 한다.”

살아있는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신생아가 겪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살아있는 고통, 사는 고통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는 태어나는 고통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왜 윤회를 하면 전생의 것을 다 잊어버리느냐, 태어나는 고통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죽음의 고통은 어떻습니까. 죽는 자체가 두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체적 고통을 말합니다. 태어나는 순간이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듯이 죽는 순간도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4고, 8고를 말합니다. 좋아하는 이와 헤어지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등, 나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천상의 고통도 있습니다. 천신들은 죽는 순간 다음 생의 자신을 볼 수 있으므로 ‘좋은 시절이 다 끝났다’는 것을 아는 고통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초발심

“초발심, 보리심, 공성에 의지하지 않고 명상이나 진언만으로 수행하게 되면 깨달음의 바른 길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윤회의 세계는 고통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는 하지 않는다. 고통뿐인 윤회의 세계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다면 태어나는 원인을 없애야 하며 그 길은 깨달음, 즉 해탈을 이루는 것밖에 없다.”

티벳불교에서 초발심이란, 윤회의 세계는 고통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더 이상 윤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티벳이 아닌 우리나라, 혹은 현대인들에게 초발심이란 부처님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겠지요. 불교를 나의 삶의 기준 문화 도덕 윤리로 삼겠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초발심일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보리심이 있어야 하며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정심이 있어야 하며 동정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들을 자기 어머니와 같이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탐욕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생깁니다. 반면 보리심과 자비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해볼까요.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보면 동정심이 생기고 동정심이 생기면 보리심이 생기고 보리심이 있으면 깨달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일체를 만드는 12입처를 들여다보면 내입처와 외입처로 나뉩니다. 보는 놈과 보이는 대상으로 나눠집니다. ‘나’는 보는 주체고 ‘저것’은 보이는 대상입니다. 나는 희로애락을 아는 인간인데, 저것은 내가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대상화시키기가 쉽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동정심의 핵심은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인식활동 내면에 우리가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자비심이 없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깔려있습니다. 대상화 때문입니다. 왜 대상화시킵니까? 소유하고 싶으니까요. 집착하고 싶으니까요. 자비심은 그 대척점에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엄마의 마음이란 모든 존재를 하나의 주체로서, 나와 같은 생명체로 보는 것이며, 이러한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야 깨달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윤회의 세계의 고통들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초발심이 생기고, 다른 이를 위해 명상하게 되면 동정심이 생기고, 이런 마음이 생긴 후에 수행하게 되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초발심, 보리심, 공성을 알아 나가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순서다.”

깨달음의 길

앞 시간에는 윤회는 고통스러우니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그 방법을 알아봅니다. 먼저 번뇌의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탐, 진, 치, 만, 의, 악견 등 여섯 가지로 번뇌를 분류합니다.

“번뇌가 있으면 전에 지은 업이 없더라도 그 번뇌로 새로운 업을 만들게 된다. 다음 생에 몸을 만드는 윤회의 씨앗이 된다. 이 번뇌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번뇌는 새로운 업을 만들고, 업은 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번뇌가 있으면 바로 윤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섯 가지 근본번뇌와 스무 가지 수번뇌

근본번뇌는 앞서 말한 탐, 진, 치, 만, 의, 악견이며, 수번뇌는 근본번뇌에서 따라오는 번뇌입니다. 탐과 진은 모두 치(무명)에서 나옵니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욕심과 화가 옵니다.

우리가 언제 화를 내는가를 잘 생각해보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뜻대로 안 될 때, 두 번째는 내가 공격받을 때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화를 냅니다. 지금과 같이 고도화된 사회에서 실은 화가 별로 필요 없습니다.

화는 원시시대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피가 빨리 돌고 흥분되고 몸이 날래집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거나 나에게 중요한 먹이를 잡는 데에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절집에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 년 동안 공부해도 한 번 화를 내면 그동안 공부한 공덕을 다 까먹는다는 의미입니다. 실천하기란 참 쉽지 않은 말입니다.

만은 자만심입니다. 자만심과 자괴심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내가 잘났다는 것은 내가 못났다는 것과 통합니다. 비교를 안 하면 잘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닙니다.

치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근본무명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은 잘 못 안 것이고, 새끼줄은 그대로 있는데 새끼줄을 모르게 한 원인인 어둠이 근본 무명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는 것, 내가 있다는 뿌리 깊은 생각도 근본 무명에서 나옵니다.

“살가야견은 작은 개미에게도 있다. 예를 들어 개미를 나무로 건드리면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죽은 체 하고 있다가 잠시 후에 도망가게 된다. 이는 살가야견 때문이다.”

개미도 ‘이것이 나’라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부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고등동물이 될수록 뇌가 커집니다. 뇌의 안쪽은 두려움과 같은 본능적인 감각 뇌의 바깥쪽으로 가면 더욱 고차원적인 사고를 합니다. 이 말은 즉 작은 동물들도 우리와 같은 뇌가 있으므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두려움은 이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에서 나온다는 것을 개미의 일화로 확장했습니다.

번뇌는 어떻게 생기는가?

“모든 번뇌는 나의 실재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그릇된 믿음의 뿌리는 살가야견과 무지이다. 나라는 의식에서부터 나의 라고 하는 나와 대상, 나와 너, 주체와 객체의 분별이 생겨난다. 이것 때문에 자기를 좋아하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며 자기를 도와주는 이들을 좋아하고 자기를 해치는 이들을 미워하게 된다. 이러한 분별이 갈등과 번뇌를 낳고 그것에 의해 탐진치가 생기고 그것에 의지하여 업이 생기고 업으로 인해서 윤회하게 된다.”

근본 무명은 우리의 삶 자체에 내재해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식활동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낀 것들을 종합한 인식활동 속에 이미 근본 무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번뇌는 나의 실재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과, 일체와 연기실상의 세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일시하는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모든 고통이 생긴다는 말은 사실 같은 말입니다.

“번뇌의 대상을 멀리하고 마음으로 번뇌의 대상을 만나지 말라.”

근본 무명에서 모든 번뇌가 비롯됨을 알아서 근본 무명을 뿌리 뽑아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끝나지 않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거친 번뇌와 미세한 번뇌에 나 자신을 쉽사리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으면 피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가능하면 수행하기 좋은 조건 속에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온실 속에서 어느 정도 힘을 갖춰야 노지에 나가서도 버틸 수 있듯이 말입니다.

지혜와 선정으로써 바른 깨달음을 성취

“통나무를 쪼개려면 날이 선 도끼와 집중하여 내리칠 수 있는 어깨가 필요하다. 도끼가 없으면 나무를 쪼갤 수 없고 어깨가 없으면 정확하게 내려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무아의 지혜는 도끼의 날과 같고 선정은 강한 어깨와 같다. 선정을 지키려면 계율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계율은 가르침의 뿌리와 같아서 그것을 어기면 바른 수행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혜와 선정이 필요하다는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위빠사나이며 선정은 사마타입니다. 선정은 삼매인데, 마음이 고요하려면 행이 고요해야 합니다. 행을 고요히 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 것은 행을 닦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계율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생활 중에 시간을 내어 지관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의 앞 여섯 가지는 번뇌를 덜 가지고 고통이 생기더라도 빨리 털어낼 수는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번뇌의 뿌리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지관수행이라는 집중 수행을 통해서만이 완전히 번뇌의 뿌리를 뽑는 것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하사도와 중사도까지 공부했습니다. 집에서 시간을 내어 상사도를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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