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법회 기간 동안 일곱 시간에 걸쳐 반야심경을 강의하면서 본문은 지난 시간과 이번 시간에만 다룹니다. 반야심경은 본문의 내용 자체보다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전시간에 배운 개념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설명하고 끝내겠습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이 단락은 공 가운데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색수상행식은 무엇입니까? 오온입니다. 안의비설신의는 육근이라고 생각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육내입처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은 육경이며 더 정확하게는 육외입처입니다. 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18계를 말합니다.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 없으며 늙고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음은 12연기를 말하며 고집멸도는 사성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혜도 얻음도 없습니다.
공 가운데는 오온이 없다.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오온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공이라고 할 때 추상적으로 뭔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공은 연기의 세계이며 진여실상입니다. 실제 이 세계는 연기법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연기법으로 이뤄진 실제 세계가 공입니다.
‘실제 세계에는 오온이 없다.’ 라고 말하면 맞는 말입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실상의 세계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 육근(x) 육내입처(o)
안이비설신의를 흔히 육근이라고 합니다. 불교개론을 쉽게 이야기하다보니 육근과 육내입처를 혼돈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안이비설신의는 육내입처를 의미합니다. 입처란 12입처라 해서 열 두 개의 들어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 중 여섯 개는 내 안에 있다 하여 내입처이고, 나머지 여섯 개는 내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 외입처라 합니다. 안이비설신의는 이 중 육내입처를 말합니다. 육근이라고 말할 때는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등 뿌리 근(根)자를 붙입니다.
우리가 흔히 육근을 감각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눈을 예로 들어볼 때, 눈은 감각기관이지만 ‘눈이 본다.’는 말은 맞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시체에도 눈이라는 감각기관은 있지만 눈 자체로서 무언가를 보지는 못합니다. 살아있을 때만 눈은 무언가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육근은 수명에 의지한다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활동입니다. 보는 활동, 귀로 듣는 활동입니다. 눈이나 귀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죽은 시체에도 눈과 귀 코가 있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냄새 맡지 못합니다. 왜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을 말할 때는 활동을 말합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것은 입처입니다. 입처는 들어와서 머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계를 본다.’고 할 때, 시계를 보는 내가 있고 내 밖에 시계가 있다는 느낌과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안입처입니다. 이것은 시계를 보는 이전 단계입니다. 시계라고 하는 판단은 그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시계라는 판단을 하기 전에, 무언가를 보고 있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안입처입니다.
따라서 공 가운데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 나라는 것은 있지도 않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뿌리 깊은 착각이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법도 마찬가지입니다. 12입처라는 것이 진여 연기실상의 세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반야심경에서 나오는 ‘안’ 눈이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연기실상의 세계엔 개념화된 어떤 것도 없다
18계는 12입처에다가 여섯 개의 식을 붙인 것입니다. 구별이 몹시 어려운데요. 쉽게 이해하려면 비빔밥을 떠올리면 됩니다. 비빔밥을 만들려면 재료들을 구해야 합니다. 당근, 양파, 콩나물, 감자, 김치, 찬밥이 필요하지요. 이때 재료들은 모두 쫑쫑쫑 썰어서 살짝 볶아서 준비해놓아야 합니다. 비빌 수 있게 재료를 따로 준비한 후에 한 그릇에 넣고 비비면 비빔밥이 완성됩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 과정이 필요합니다. 각각의 재료를 준비해야 하고, 각각의 재료를 손질 및 요리해야 하고, 각각의 재료를 섞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에 시계가 있다고 하면, 시계를 인식하기까지 이러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시계를 보고, 내 기억 속에 있는 시계라는 틀을 찾아서 맞춰야 하며, 그런 후에야 시계라고 생각합니다.
비빔밥에서 첫 번째 각각 준비된 재료가 바로 12입처에 해당합니다. 보는 내가 있다는 느낌, 듣는 내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 다음에 18계는 12입처로 들어온 정보를 가공합니다. 대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른 것과 구별이 되는 형상으로 들어오는데 아직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다 섞으면 비빔밥, 시계라고 하는 내 머릿속에 형상화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사실 우리 안에서는 순차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에 일어납니다.
12연기에서 볼 때 시계라고 하는 것은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가운데 육입에 해당합니다. 육입에 의해서 촉이 생깁니다. 촉이라는 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시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18계는 비빔밥을 생각하면 되고, 입처는 대상을 보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정보들이 합쳐져서 ‘시계가 있구나’ 하고 판단합니다. 이런 사고의 진행은 내 머릿속에서 진행됩니다. 현실 연기실상의 세계가 아니라요. 내 머릿속의 정보를 통해서 시계라고, 컵이라고, 무언가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 공 가운데는 12입처도 18계도 없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서는 12연기가 없다고 합니다. 12연기는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입니다. 무명부터 노사까지 진행되면 유정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역순으로 노사에서 무명까지 진행될 때는 환멸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집멸도는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도 실제 세계에 고통이 있고 고통을 멸하는 방법이 있고 고통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식과정에서 만들어낸 머릿속 세계에서 사성제가 작동합니다. 실제 진여실상의 세계에 사성제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공 가운데에는 사성제도 없습니다. 지혜도 얻음도 없습니다. 연기실상의 세계에서는 무언가 늘어나고 줄어들고 무언가를 얻거나 잃는 것도 없습니다.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팔정도이고 육바라밀이고 계정혜 삼학입니다.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불교의 수행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커지면 탐욕이 되고 탐욕이 커지면 애착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내 마음속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만약 내게 욕심이 없다면 이 세계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보고 먹고 싶다는 생각, 다른 열매와 비교해서 더 맛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욕심으로 인해서 내 마음속의 세계에 다양한 것들이 생겨납니다. 즐겁다, 두렵다, 행복하다 하는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 생각하는 착각을 깨다
반야심경에서는 그 반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수행에 보살들은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욕심을 내지 않고 욕심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고 말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애착이 있고 애착이 있으면 번뇌가 생기고 두려움 불안 행복과 같은 감정들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므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납니다.
뒤바뀐 헛된 생각이 바로 무명입니다. 진여실상의 세계에 ‘시계’라는 것은 없는데 우리 마음속에서 시계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뒤바뀐 생각이고 허망한 생각입니다. 뒤바뀐 생각을 멀리 떠나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열반에 들어가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보살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그러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3번)
卽說呪曰
이 주문은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가장 높은 주문입니다.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가장 최상의 주문입니다. 이 주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괴로움을 없애는 데에 있습니다. 이 주문이 바로 ‘아제아제 바라아제…’입니다. 이 주문만 열심히 외우면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갑니다.
진언 그 자체가 가진 에너지를 믿는 것
주문, 진언은 번역하지 않습니다. 한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광명진언을 가지고 전시를 한 전시장에 갔는데 누가 저에게 “이 진언의 뜻이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제가 “진언은 해석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자 그 분이 역정을 내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교가 안 되는 겁니다. 뜻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줘야죠!”
굳이 알려고 하면 인터넷에 찾아보면 나옵니다. 별 것이 없습니다. 진언이 중요한 것은 진언 자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야 진언을 외울 때 딴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열심히 진언만 외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집중되고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진언수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의심을 들고 있으면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언을 할 때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그게 수행이 되겠습니까? 이렇든 진언은 해석하지 않고, 그 자체에 깃든 에너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야심경의 진언은 너무 유명하니까 그 뜻을 한 번 헤아려보면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세 가세. 그런데 가고 있는 중이 아닙니다. 아주 가버린 것입니다. 아주 먼 피안의 세계로 완전히 가버렸습니다. 그러니 감탄이 나옵니다. ‘아, 깨달음이여!’
반야심경 끝에 이런 진언이 나오는 것은 반야심경이 초기불교 경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언수행은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라 힌두교의 문화인데요.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일반 신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진언이라는 수행법을 차용했습니다. 누구나 쉽게 불교수행을 할 수 있도록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통용되었던 만트라를 수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백중기도 기간 동안 반야심경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반야심경은 초기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반야부 경전입니다.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개념과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짧은 경구로 압축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공, 오온, 12처, 18계, 12연기 등 불교의 핵심적인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용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