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식이법 놀이, 어떻게 봐야 하나?

민식이법 개정 이후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민식이법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 달리는 차량에 뛰어들어 운전자를 놀래키는 아이들. 도대체 왜 이런 위험천만한 놀이를 하는 걸까?
그것은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 존재해온 아이들이 법 조항을 방어막으로 삼아 행하는 복수에 다름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 서로 원한을 품은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들은 생을 거듭하며 서로에게 쫓고 쫓기는 삶을 살다가 부처님 앞에 이르러서야 서로에 대한 증오의 불길을 끌 수 있었다.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 악업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가 있다. 계속해서 나쁜 과보를 주고 받으면 그 악순환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원한의 악순환, 악업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꺼이 손해보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다. 욕망의 사바세계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손해 본다. 그러나 누군가는, 어느 선에서는 악업의 연쇄작용을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자로써의 마음가짐이고 불자로써의 수행이다.

#민식이법, 법구경, 복수, 선업, 인과

민식이법 놀이의 유행

‘민식이법’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스쿨존에서 30KM 이상의 속도로 달리면 법 적용을 엄격하게 하는 게 골자입니다. 스쿨존에서의 비극적인 사고 이후에개정된 법입니다. 

민식이법이 생기고 나서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민식이법 놀이’라는 게 유행한다고 합니다. 민식이법 놀이가 무엇이냐? 초등학생들이 학교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차에 뛰어들어서 운전자들을 놀래키는 겁니다. 

실제로 영상을 보니까 한 아이가 길가에 서있는 차 뒤에 숨어있다가 차가 한 대 지나가면 탁 튀어나갑니다. 운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 바짝 붙어 서있던 아이가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 우산을 펼쳐서 오토바이 운전자를 놀래키더군요. 오토바이는차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로 넘어지고요. 

운전하는 사람이 뭔가를 인지를 하고 브레이크를 밟아야겠다 생각하기까지 최소한 0.7초가 걸린다는 실험결과가 있답니다. 이것을 공주거리라고 하는데요. 민식이법 이후로 스쿨존에서 사고가 났는데 블랙박스를 확인해보니까 아이가 튀어나와서 차랑 접촉하기까지 0.6초 걸린 겁니다. 공주거리 이내에 일어난일은 운전자로써는 불가항력인 일이기 때문에 이 사고 운전자에게 무죄를 판결했다고 하는 기사를 봤습니다.

민식이법 놀이라는 게 유행한지가 벌써 몇 달이 됐더군요. 정세균 국무총리 당시에 “아이들의 민식이놀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부모들에게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라.”는 발언이 있었을 정도로 사회적인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저는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법구경> 속 원한을 품은 여인들 이야기

이런 일련의 사태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애들이 도대체 왜 저럴까?’ ‘정말 이해가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운전자 입장에 가깝기 때문에 아이들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참 이해하기 힘들더라구요.

저런 위험한 장난을 도대체 왜 할까? 어제 저녁에 혼자 가만히 생각을 해봐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내일 법문을 준비하기 위해 <법구경>을 펼쳤는데 마침 나오는 이야기가 원한을 품은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원한을 품은 여인들 일화를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결혼할 때가 다 된 총각이 살았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니까 총각의 엄마는 당연히 장가를 보내고 싶어합니다. 마침 마을에 아주 참한 여인을알고 있으니 그 여인과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들에게 제안합니다. 그런데 이 총각은 마음에 둔 여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총각은 부모님께 고집을 세워서 자기가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과 결혼을 했지요. 

결혼을 하고 났는데 이 여인이 아이를 못 낳는 거예요. 애를 못 낳으니까 시어머니가 둘째 부인을 들이자고 하는데 아들은 반대를 못 합니다. 며느리가 가만히 생각해보기를, 만약 시어머니가 데려온 둘째 부인이 아이를 낳게 되면 자기는 평생 하녀 노릇밖에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며느리가 나름대로 수소문을 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둘째 부인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둘째 부인이 임신을 하자 첫째 부인은 불안합니다. 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자기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하녀가 될 것 같습니다. 첫째 부인은 둘째 부인의 몸조리를 해주는 척 하면서 둘째 부인의 우유죽에 아이를 지우는 약을 탔습니다. 그렇게 둘째 부인이 임신한 아이는 유산이 됐습니다. 첫째 부인은 둘째 부인에게 말합니다. “슬퍼하지 말고 다음에 또 임신하게 되면 나한테 꼭 이야기 하라.”고요. 

둘째 부인이 또 임신을 했습니다. 첫째 부인은 처음 임신 때처럼 우유죽으로 아이를 유산시킵니다. 하늘이 무너진 둘째 부인은 마을 아낙네들에게 신세한탄을 했는데요. 마을 사람들이 꾀를 내어줍니다. “첫째 부인이 수를 썼을 수도 있으니 다음에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요. 

마을 사람들의 말처럼 세 번째 임신이 됐을 때는 둘째 부인이 첫째 부인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배가 불러 오고, 더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첫째 부인은 그제야 둘째 부인의 임신을 알게 됩니다. 

첫째 부인은 화를 내며 억지로 아이를 지우는 약을 먹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미 뱃속에서 많이 자란 상태이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약을 먹이니까 아이가 나오다가 자궁 쪽에 걸려서 죽고 산모도 운명을 달리합니다. 둘째 부인은 죽어가면서 첫째 부인에게 원한 맺힌 말을 합니다. “너는 내 첫째 둘째 셋째 아이를 죽이고 나까지 죽이는구나. 다음 생에는 기필코 귀신으로 태어나 너와 너의 아이까지 다 죽이고야 말겠다.”

쫓고 쫓기는 원한의 굴레

첫째 부인은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첫째 부인이 아이들과 둘째 부인까지 잘못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 비슷한 시기에 죽게 된 겁니다. 

이후 둘째 부인은 그 집 고양이로 태어났고요. 첫째 부인은 암탉으로 태어났습니다. 암탉이 알을 놓으면 고양이가 와서 알을 먹어버리고, 또 낳으면 또 먹어버리고, 나중에는 고양이가 암탉까지 사냥해버립니다. 암탉이 죽어가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너는 내 자식들을 차례로 죽이고 나까지 죽이는구나. 내 기필코 다음 생에 너와 너의 자식들을 죽이겠다.”

이렇게 두 번째 생에서는 첫째 부인인 암탉이 원한을 품고 죽습니다. 이렇게 죽은 암탉은 표범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두 번째 생에서 고양이로 태어나 암탉을 죽인 둘째 부인은 전생의 원한을 풀었지요. 그리고 고양이 다음 생에서 사슴으로 태어납니다. 둘 사이에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사슴이 새끼를 낳으면 표범이 와서 잡아먹고, 또 낳으면 또 잡아먹고, 나중에는 사슴까지 잡아먹는 겁니다. 

사슴이 죽으면서 다음 생에 복수를 하겠다며 원한을 품습니다. 그러면서 둘째 부인은 귀신으로 태어납니다. 경전에 보면 여자 야차, 우리나라로 치면 도깨비로 태어나고, 첫째 부인은 여자 사람으로 태어났어요. 여인이 임신을 하니까 여자 도깨비가 첫째 부인의 가까운 친구로 변신을 해가지고 나와서 아이를 잡아 먹어버려요. 둘째를 낳았는데 또 다른 가까운 사람으로 변신해서 축하하는 척 아이를 잡아먹어버립니다. 

여인이 생각하기를 ‘이 마을에서 아이를 낳으면 야차(도깨비)가 잡아먹는구나.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아야겠다.’ 합니다. 그 사이에 도깨비는 물 긷는 일을하고 있었습니다. 네다섯 달은 물 긷는 일을 하느라 다른 일을 못 하는 거예요. 도깨비가 물 긷는 일을 하고 있는 사이에 여인은 친정으로 가서 세 번째 아이를낳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도깨비는 화가 나서 여인과 아이를 찾아 나서지요. 

한 생각 돌려 신이 된 야차

도깨비에 쫓기던 여인은 부처님이 계시던 기원정사로 도망을 칩니다. 법문을 하던 부처님은 아이를 안고 들어오는 여인을 보고 전생의 일들이 꿰뚫어 봅니다. 부처님은 기원정사를 지키는 신장에게 일러 도깨비를 사원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웁니다.  

부처님이 여인에게 말합니다. “너의 아이를 저 도깨비에게 주어라.” 여인이 말합니다. “안 됩니다. 저 도깨비는 제 아이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말씀을 어길 수 있습니까. 결국 여인이 야차에게 아이를 건네는데요. 아이를 안은 야차는 아이를 보듬고 눈물을 흘리고 입을 맞춥니다. 한참을 아이를 안고있다가 여인에게 아이를 돌려주지요. 그러고나서 야차가 부처님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저는 평생을 배를 굶주리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여인에게 말하기를, 야차에게 매일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해주라 합니다.그러니까 여인이 야차와 같이 마을에 돌아와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우유죽을 공양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야차가 집을 너무 불편해 하여 마을 밖에 작은 오두막을 지어서 야차를 머물게하고 우유죽을 대접합니다. 

하루는 남편이 야차에게 우유죽을 가지고 가서 주니까 야차가 하는 말이 “올해는 비가 많이 올거니까 건조한 땅에다가 곡식을 심으세요.” 하는 겁니다. 남편이 반신반의 하면서도 혹시 모르니까 건조한 땅에다 곡식을 심었는데 진짜로 비가 많이 온 거예요.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농사를 망쳐버렸는데 그 집만 농사가 잘되었어요. 그 다음에는 야차가 남편에게 “올해는 비가 크게 안올거니까 물기가 많은 땅에다가 곡식을 심으세요.”라고 말했고, 이번에도 그 집에만 풍년이 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고 신기해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까 여인이 이야기를 해줍니다. “우리는 마을 밖의 야차에게 대접을 하고 있다. 당신들도 농사를 잘짓고싶으면 야차에게 가서 공양물을 올려보라.”고요. 그렇게 야차의 도움으로 마을의 농사가 다 같이 잘 되게 됩니다. 야차는 그 마을의 신이 됐고, 지금도 인도에서는 야차를 섬기는 전통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답니다.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

여인과 야차를 앞에 두고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려고 해서는 절대 갚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원한을 품지 않을 때 그 원한을 갚을수가 있다고요. 증오의 불길은 원한과 같은 증오르는 끌 수가 없다고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비슷한 맥락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증오의 감정과 원한을 품을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행동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혀 접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든 나의 부당함을 알리고 상대방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원한의 굴레에대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한 생각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생각할 거리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악업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가 있다는 겁니다. 선업을 지으면 선과가 오고, 악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맞습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증오를 품고 상대방을 해치는 행동을 했다면, 이 악업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가 있습니다. 이걸 서로 주고 받고 하다보면악업은 계속 나쁜 과보를 만들어냅니다. 그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요. 

우리가 인과 업보의 인연법을 알고,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악업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원한을 품은 여인들처럼 몇 생에 걸친 원한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 겁니다. 이번 생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겠지요. 

만일 내가 지금 저 사람에 대한 증오의 불길이 너무 커서 저 사람에게 나쁜 행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것을 참아야 나에게 나쁜 결과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인연법을 제대로 아는 겁니다.

민식이의 ‘복수’를 하는 아이들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서 민식이법 놀이를 봅시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위험한 장난을 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는데요. <법구경>의 원한을품은 여인들 이야기를 쭉 보니까 초등학생들이 그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우리 때만 해도 지금처럼 차들이 길 옆으로 쌩쌩 다니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 크고 나서 차량, 운송수단의 혜택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이제 막 학교에 간 초등학교 1, 2학년생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바로 옆으로 차들이 지나가는 위험한 환경에서 성장하면서도 자기들 힘으로는 감히 이 환경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인 입장입니다. 

그러다가 민식이 사고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최소한 스쿨존에서 만이라도 조심하자.’고 제약을 주니까 아이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자기들한테 힘이 생긴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말하자면 옛날에 당했던 것을 자기들도 모르게 복수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른들이 애들 생각안하고 쌩쌩 달리는 것들. 차도에서 운전하는 어른들 입장에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차가 옆을 지나는 것 자체로 위험을 느낄수 있습니다. 민식이법 놀이는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서로 원한과 증오를 주고받는 겁니다.

민식이법 놀이 같은 모습을 보고 언론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 이런 겁니다. ‘아이들이 하는 행동들이 너무 위험하다. 사회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말이좋아서 대책이지 저렇게 못하게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어린 애들을 벌을 줄 수 없으니까 그 부모들에 대해서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해당아이의 부모 입장에서는 또 화가 나고 증오가 생깁니다.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한 번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부모한테 벌금을 내라니 말이 되나?’ 사회의 모든문제에 있어서 우리들도 모르게 서로 증오의 불길을 상대방에게 주고 받고 있습니다. 

착한 일 하면 손해본다? 기꺼이 손해 보자

누군가는, 어느 선에서는 이러한 악업의 연쇄고리가 더이상 굴러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 사회에 굴러가는 악의 수레바퀴를 멈춰야 해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런 악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을까요? 다른 거 없습니다. 내가 좀 손해본다는 생각을 해야 그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왜나만 가지고 그래?’ 내지는 ‘착한 일 하면 손해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 사회처럼 되는 거예요. 

착한 일을 하면 손해보는 게 당연합니다. 인간세계는 사바세계고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욕망은 앞에 형용사가 붙습니다. ‘남을 위한’ 욕망이 아닌 ‘나를 위한’ 욕망입니다. 이것을 멈추려면 내가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고, 실제로 손해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때문에 이 중생세계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손해를보는게 당연합니다.

‘착한 일을 하면 손해를 보는데 왜 내가 착한 일을 해?’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살겠다.’는 말을 포장하는 것이고 단지 남 핑계를 대는 겁니다. ‘나는 착한 일 하기 싫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겁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혼자 잘 살고 싶다는 건데요. 착한 일 하지도 않을 거면서 무슨 착한 일 하면 손해본다는 핑계를 댑니까. 비겁하죠.

경전에 나오는 원한을 품은 두 명의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누군가 한 명은 악순환을 끊는 행동을 해야 증오의 악순환이 멈춰집니다. 그러기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손해본다는 마음을 가져야 증오의 불길을 멈출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기적인 욕망이 쌓이고 쌓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세상으로 변하고있습니다. 더구나 코로나19로 2~3년을 보내다 보니 사람들이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손해 본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법문에서 다른 내용은 기억 못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은 뭐냐. 손해보고 살자는 겁니다. 사실 내가 가진 게 얼마나 있다고, 손해보면 얼마나 보겠습니까? 이렇게 불자로써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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