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게송의 진정한 의미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은 주변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 일희일비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라는 말은 육신이라는 그물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삶을 털어내라는 뜻이다.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말은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질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당당하고 온전하게 수행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일상 속에서도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 나의 마음 상태를 면밀히 알아차리고 내 안의 애착과 집착을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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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상담과 무소의 

신도님들과 상담 대부분은 자식에 대한 고민입니다. 내 배 아파서 나은 자식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오죽하면 자식을 낳아본 적도 없고 키워본 적도 없는 나에게 와서 상담을 할까 싶기도 합니다. 

신도님들을 보내고 혼자서 가만히 생각하기를, 바로 이런 게 번뇌구나 싶었습니다. 전해 듣는 나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요. 한편으로 나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자식 키우는 재미도 없고 자식들이 주는 기쁨도 없지만 반대로 자식 때문에 생기는 고통도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전에는 이런 감정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했는데, 문득이 구절이 중생들의 이러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핵심은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무소라고 하는 것은 코뿔소를 의미합니다. 흔히 코뿔소 하면 날카로운 뿔이 2개 달린 아프리카 코뿔소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하는 코뿔소는 뭉툭한 뿔이 하나 달린 인도 코끼리를 의미합니다. 코뿔소는 대체로 얌전하지만 공격을 받으면 그 뿔로 상대방을 물리칩니다. 사자도 꼼짝 못하는 정도라고 하지요. 즉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은 수행의 길을 걸을때 코뿔소의 뿔처럼 홀로 가되 흔들리지 말고 굳건하게 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가도 재가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살기 위해서는 모두 출가해서 혼자 수행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주문한 것인가? 제가 생각할 때 반은 맞고 반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다른 경전에서 하신 말씀을 두루 살펴보면, 본격적인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출가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으라는 이야기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출가를 하자 부처님의 아버지인 카필라국의 정반왕이 “제발 젊은이들이 출가하는 것을 그만하게 하십시오. 이러다 대가 끊기고 나라가 망하겠습니다.”라고 사정을 할 정도였지요.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에게 법문할 때 재가자의 상황에 맞게 지계와 공덕을 쌓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수행하려면 출가를 해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되, 출가하지 못하는 재가자의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라고 하신 것인데요. 이는 현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출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우리 시대에 맞게 재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라는 말이 현대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앞의 세 구절을 보면 됩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두려움 없이

사자는 동물의 왕입니다. 토끼 같은 초식동물은 풀을 뜯다가도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살핍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고양이들도 먹이를 먹을 때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먹습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누군가 나를 해코지하지 않을까 불안에 떠는 겁니다. 

소리에 놀라는 존재들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니 주변에 계속 관심을 두고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는 데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자기 주변에 알 수 없는 요소요소에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포식자들이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변 상황이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동시에 나를 잡아먹을 동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불안하지 않습니다. 

토끼는 자기가 잡아먹힐지 아닐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사자는 자기가 잡아먹히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앎’에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알 수 없는 포식자에게 쫓기고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누군가 뒤에서 나를 툭 쳤다고 합시다. 대부분은 깜짝 놀라서 경계태세로 들어갑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슥 돌아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왜 깜짝 놀라게 됩니까? 내가 인지하지 못한 존재가 나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에 놀랍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이런 것들은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끝없이 내몰고 있습니다. 토끼의 팔자나 인간 중생들의 팔자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떨까요? 비록 상황은 잘 알지 못하더라도 불안과 두려움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이것이 범부중생과 깨달은 자의 차이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물은 무언가를 잡기 위한 물건입니다. 생선이나 짐승을 잡을 때 그물을 쓰지요. 그런데 이 그물로 바람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바람은 육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뚱이가 그물에 걸리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뚱이가 있기에 ‘몸뚱이가 나다’는 생각의 그물에 걸린 채로 살아갑니다. 몸이 아프면 괴로워하고, 몸이 건강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처럼 행동하고, 심지어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몸이 아닌 것은 남이라고 구별합니다. 그 남과 내가 경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나의 몸(외모)과 다른 사람의 몸을 비교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거나 교만심에 젖어드는 일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괴로움이 몸뚱이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육신이라고 하는 그물에 가둬 놓고 있는 것이지요. ‘몸뚱이가 곧 나’라는 생각만 버리면 우리는 바람처럼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어떤 그물이 우리를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여름철 공원에 있는 연잎을 들여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연잎은 완전히 방수가 됩니다. 비가 오면 연잎에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잎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로 모여들었다가 한쪽이 무거워지면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연이라는 식물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흙탕물 속에서 자라나는데, 수면 위에 솟아난 꽃은 아주 맑고 청정합니다. 진흙이나 흙탕물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 같으니 관점을 연꽃으로 옮겨볼까요? 연꽃이 맑고 청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이유는 흙탕물에 대한 집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진흙이나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연이 흙탕물에 애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이 흙탕물을 소유하거나 애착하자고 하는 순간 흙탕물이 내 몸에 묻어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애착하지 않으므로 얼룩지지 않는 거예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살아가는 

여기까지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처음으로 돌아가봅시다. 많은 분들이 출가해서 수행자처럼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미 가정을 이루었고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 상태에서 어떻게 가정을 버리고 출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조건 출가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토끼처럼 살지 말고 사자처럼 살라는 말이고, 그물에 걸리는 짐승이 아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라는 말이고, 진흙을 묻히는 삶이 아니라 연꽃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그것이곧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첫 번째는 내 주변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 번뇌, 맛보고 즐기고 느끼는 환경에 마음에 뺏기기보다 스스로를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몸’이 곧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 번째로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무소유의 정신과 나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늘 사람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하루 중 반드시 어느 정도의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우리 같은 중생들은 내 마음이 마음대로 잘 안 됩니다. 그러니 혼자 있음을 통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 안의 애착과 집착을 드러내는 수행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돌아보아야 남을 위안할  있다  

자식 때문에 가슴 아프고 힘든 신도님 이야기를 이야기의 서두에 했습니다. 본인에게는 자녀 문제가 엄청난 고통이지만 제3자가 볼때, 결국은, 매정한 이야기이지만, 애착에서 나오는 고통일 뿐입니다. 남의 자식이면 그렇게 고통스럽겠습니까? 내가 애착하는 내 자식이니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내 가까운 사람이 고통받을 때 어루만져줄 수가 없습니다. 그냥 같이 아파할 뿐이에요. 자식이 고통스러워할 때 위로하고 치유하고 나아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애착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진정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고통받을 때 내가 가 사람에게 진정으로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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