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수행, 생전예수재

윤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전예수재는 살아생전 공덕을 쌓는 나를 위한 수행이다.
생전예수재는 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생전 내가 스스로 지어놓은 선업 공덕의 힘으로 중음계 시왕들에게 좋은 판결을 받아 더 좋은 다음 생을 받음으로써 깨달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생전예수재에서는 경전과 돈을 올린다. 경전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연기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돈을 올리는 것은 세상 만물에게 빚진 것을 갚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전예수재는 지금 이 순간 미리 열심히 수행하는 의식이다. 수행의 끝과 시작은 육바라밀이다. 모든 수행의 결과는 보시해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스스로 수행하고 선업 공덕을 쌓는 것이 생전예수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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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공덕을 쌓는 생전예수재

오늘은 생전예수재 회향일입니다. 4년 전 생전예수재는 ‘참여하고 공덕 쌓는 생전예수재’를 슬로건으로 봉행했고, 올해는 ‘나를 위한 수행, 생전예수재’를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생전예수재는 매달 혹은 연중 행사로 자주 접하는 행사가 아니라 4년에 한 번씩, 잊을만 하면 돌아오는 행사이기 때문에 그 의미나 형식이 가물가물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어째서 생전예수재가 나를 위한 수행인지, 생전예수재를 왜 하는지 오늘은 이런 의문을 풀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생전예수재는 말 그대로 살아 생전에 미리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행을 재 의식을 통해 합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칠칠재를 지내는데요. 칠칠재, 다른 말로 49재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사후 7일마다 일곱 번 재를 지내는 의식입니다. 

즉 생전예수재는 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 도움에 기대지 않고 생전에 지어 놓은 선업 공덕의 힘으로 중음계에서 심판을 받을 때 더 좋은 다음 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생전예수재는 49재 형식을 띱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49일 동안 행사를 치르면, 두어 달 있다가 또 백중이 돌아옵니다. 그러면 일 년 내내 제사만 지내다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경우 한 달 정도 기간을 두고 행사를 치릅니다. 

일상적이었던 시왕제가 윤달 생전예수재가 된 것은

생전예수재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 생전에 선업을 짓는 칠칠재를 봉행하는 것입니다. 칠칠재는 무엇입니까? 시왕님들을 모시는 겁니다. 동서남북 사방 위, 아래를 합쳐서 10방이라고 합니다. 이 각 방위마다 담당하는 대왕들이 있어서 이들을 시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왕 중 한 분이 염라대왕이고요. 지장전에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도열한 열 분의 관복을 입은 분들이 시왕입니다. 이들은 중생들이 죽어서 중음계에 가면 살아생전 잘못과 선업 등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대략 8, 900년 전에 등장하는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시왕제를 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4~15세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국가가 되자 ‘시왕제를 없애라’고 하는 상소문이 올라오게 되고요. 16세기 중반부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생전예수재란 명칭을 쓰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과거 생전예수재와 지금 생전예수재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생전예수재를 매달초하루와 보름날, 한 달에 두 번을 봉행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진행한 의식이었지요.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은 윤달에 들었을 때만 봉행하게 되었는가? 

칠칠재는 원래 돌아가신 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 아닙니까. 그런데 살아있는 나를 위해서 49재를 지내려고 하니 시왕이 알면 안 되는 겁니다. 윤달은 송장을 거꾸로 매달아도 아무 탈이 없는 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윤달이 돌아오면 이장도 하고 이사도 하고, 온갖 길흉화복을 부르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좋은 일도 윤달에 하면 더 좋은 거죠. 

경전과 돈을 올리는 의미 

생전예수재를 봉행할 때는 영가전에 경전을 올리고 돈을 올립니다. 금강경 독송을 하는 것은 살아생전에 이만큼 열심히 부처님 말씀을 익히고 독송했다는 것을 시왕님들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돈을 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돈을 올릴 때는 마치 선업을 돈으로 사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말하자면 우리가 빚을 졌다 이 겁니다. 무슨 빚을 누구에게 졌는가? 잘 생각해봅시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고 바람이 불어야 땅에 곡식이 자랍니다. 곡식은 해에게 빚지고 비에게, 바람에 빚을 졌어요. 이렇게 빚을 지지 않으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라난 곡식을 먹습니다. 이런 것들에 의지를 하고 살아요. 인간은 이런 곡물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밥만 먹고 삽니까? 옷은요. 집은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만들어준 것들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영위하는 모든 것들은 실은 빚을 져서 나에게 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실은 우주 만물과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연기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생전예수재에서 빚을 갚는다는 말은 즉,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주 만물과 모든 사람들과 내가 얽히고설켜서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자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명부 세계에서 통용되는 돈인 명부전을 시왕 전에 올리고 시왕재를 지내는 것입니다. 

도교, 유교, 불교가 섞인 의식 

의미를 이렇게 정리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49재, 칠칠재라는 것이 참 복잡합니다.불교 의식들이 좀 복잡한 것들이 있어요. 이렇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불교, 도교, 유교가 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49재를 지내는 것은 중생이 윤회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윤회는 힌두교에서 파생했지만 불교적으로 재해석된 개념입니다. 또한, 시왕이라는 존재는 인도에 없습니다. 중국의 도교에서 시왕이 죽은 이를 심판하는 개념이 있지요. 그래서 시왕들의 복장을 보면 모두 판관이나 관리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시왕이라고 아무나 나에 대한 판결을 하는가? 아닙니다. 띠마다 달라요. 이런 것들은 도교식 문화입니다. 또한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사후에 칠칠재를 지낸다는 부분은 유교의 효사상과 결합해 있지요. 이렇게 49재안에는 도교 불교 유교가 같이 있습니다.

감재사자와 직부사자

여담이지만은 우리는 제사를 당연히 집에서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이 500년 동안 유교로 나라를 지배하면서 효 사상이 강조되어 그렇습니다. 제사는 부모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정성을 다해서, 부모님이 살아생전에 계시던 집에서 제를 지내는게 당연한 겁니다. 고려나 삼국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의식들은 절에서 해야 하는 겁니다. 기자세도 절에 가서 지내고요..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의 예시 

중간 정리를 하자면 생전예수재의 핵심 내용은 첫 번째, 명부전을 올림으로써 부처님의 인연법을 사무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시왕님께 보여주고, 두 번째, 경전을 올림으로써 살아생전 부처님 말씀을 열심히 독송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디에 나와있는가?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이라는 경전에 나옵니다. 청신사 청신녀가 생전에 예수칠재를 닦으면 선업 동자가 그 이름을 저승 명부에 기록해둔다 하는 내용입니다. 

인도의 빔비사라 왕이 생전에 보시를 엄청나게 많이 하고 부처님 말씀을 퍼뜨리는 엄청난 포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보니까 지옥에 떨어져 있는 겁니다. 본인은 분명 극락에 갈 거라고 확신을 했는데 말입니다. 너무 억울해서 “왜 나를 지옥으로 보냈느냐?” 하니까 “너는 살아생전 저승에 있는 중간 관리들에게 공양을 한 번도 안 했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극락에 가려고 하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빔비사라 왕이 대답하기를,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공양을 올리란 말이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관리자가 “명단을 주고 다시 살려 보내줄 테니 한 번 공양을 잘 해보아라.”라고 합니다. 살아 돌아온 빔비사라 왕이 시왕들과 그 밑에 있는 관리들에 대한 공양을 지극정성으로 했다는 데에서 생전예수재가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생전예수재는 시왕을 모시는 재라는 겁니다. 내가 극락에 가고, 내가 죽어서 잘 되는 것은 그 공덕의 결과입니다. 시왕님들을 잘 모셔서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 더 좋은 몸을 받아 다음 세상에서는 깨달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지요. 

자력 갱생,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다 

한편, 49재나 천도재와 생전예수재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 있습니다. 49재는 내가 이미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선업을 닦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나 나를 아는 사람, 나와 인연 있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천도재를 지내주어야 하니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타력으로 하는 거죠. 생전예수재는 살아있는 지금, 살아생전에 스스로 열심히 선업을 쌓으라는 겁니다. 이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죽고 난 뒤에, 다음 생에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생에서 공덕을 쌓으라는 말이에요. 

두 번째.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특정이 있습니다. 생전예수재 안에는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는 마음가짐이 담겨있습니다. 죽은 후에 중음계에서 어떤 심판을 받을지 모르니 미리 선업을 쌓아놓겠다 하는 것은, 죽은 후의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주체적인 삶의 의지가 있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수행은 시작과 끝은 육바라밀

결국 생전예수재는 지금 이 순간 미리 열심히 수행을 하자라는 취지의 행사입니다. 수행을 하는데 어떻게 수행을 합니까? 여러분, 외워두십시오. 수행은 육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참선만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기도만 열심히 해도 안 되고, 경전만 열심히 보는 것도 아니고, 다만 육바라밀입니다. 기도든 참선이든 좁은 의미의 수행이고요. 선정에 들어가는 정진을 하고, 지혜를 밝히는 노력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수행의 결과로써 보시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수행하고 스스로 선업 공덕을 쌓는 것. 이것이 생전예수재의 핵심이다라는 것을 명심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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