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초기경전에는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들은 즉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왜 그럴까? 먼저 부처님과 같은 성인은 친견하기만 해도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자비심에 감화된다고 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깨달음의 속성을 생각해봄직하다. 깨달음은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듯 단박에 온다. 자전거를 어느 순간 탈 수 있게 되는 것과도 같다.
우리네 신행도 그러하다. 막연하게 공부하고 이해가 되는 것 같은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자신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마음처럼 되지 않더라도 처음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깨달음, 수행, 의지

술에 취해 사는 노인 이야기

부처님 당시에 매일 술에 취해서 사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한 때, 부처님과 제자들이 이 노인이 사는 마을과 가까운 숲에서 정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있는 마을로 탁발을 나가게 된 부처님의 제자 한 사람이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술만 드시지 말고 기왕에 부처님께서 지근거리에 있으니 한 번 친견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인이 대답합니다. “부처님에게 가면 뭘 해, 술 마시지 말라는 말만 할 텐데!”

다음 날도 평소처럼 술을 왕창 먹고 취한 노인은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가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이 때 노인이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친견하지 않아서 벌을 받나 보다!’ 노인은 가족들에게 부처님을 뵈러 가자고 하고는 부축을 받아 길을 나섭니다.

한편 숲에서 정진 중이던 부처님은 시자인 아난존자에게 말합니다. “곧 밖에서 한 노인이 500마리의 코끼리를 데리고 올 테니 가서 마중을 나가거라.” 아난존자가 숲 밖으로 마중을 나가자 코끼리는 한 마리도 없고 술에 잔뜩 취한 노인이 부축을 받으면서 오고 있었습니다.

아난존자의 안내로 부처님을 친견한 노인에게 부처님이 말씀합니다.

“500대의 수레에 가득 담긴 나무를 모두 불사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레에 불을 싣고 와야 하겠습니까?”

“불씨 하나만 있으면 500대의 수레에 담긴 나무를 모두 태울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물어보기를

“그대는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을 얼마나 오랫동안 빨지 않고 입었습니까?”

노인이 대답하기를

“일 년 동안 빨지 않고 입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묻습니다.

“일 년 동안 빨지 않은 그 옷을 깨끗하게 빨려면 얼마나 많은 잿물이 필요합니까?”

노인이 대답합니다.

“옷 한 벌 빠는 데에 무슨 잿물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설명하시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당신 안에는 코끼리 500마리만큼의 깊고 오래된 업장이 꽉 차 있습니다. 평생도록 매일 취하도록 술을 마셨으니 그 악업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큰 악업도 오늘 오계를 받고 그것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순간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불씨로 500대의 수레를 다 태울 수 있는 것처럼. 약간의 잿물로도 일 년 이상 빨지 않은 옷을 깨끗하게 빨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은 노인인 그 자리에서 오계를 받고 즉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

초기경전 속 아라한과…성인에의 감화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을 친견하고 바로 깨달았다는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러 가지 각도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수행이 깊고 깨달음이 아주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친견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자비심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있던 깊은 번뇌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기운, 아우라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 20세기 중반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인도 아루나찰나에 있던 현인을 친견하고는 자기 안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을 느꼈습니다. 왜 그랬을까 분석을 해보니 그 수행자를 만나고 나서 자기 안에 무의식 깊은 곳에 있던 트라우마, 불교식으로 말하면 크나큰 번뇌가 사라진 겁니다.

정말 수행이 깊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굳이 저처럼 법문을 하지 않아도 그를 친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감화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 자비심에 영향을 받아서 자기 안에 있던 심리적인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몇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대단한 수행자였기 때문에 그저 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 속 아라한과…깨달음의 ‘단박’ 속성

두 번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깨달음의 속성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야기할 때 드는 비유 중에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는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백년 넘게 빛이 든 적 없는 아주 깜깜한 방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불을 켜는 순간, 곧바로 뿌리 깊은 어둠이 물러가고 환하게 밝아집니다.

나가세나 존자라는 성인이 그리스의 왕 밀린다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밀린다왕문경>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밀린다 왕이 “지혜가 생기면 어리석음은 어디로 사라집니까?”라고 묻자 나가세나 존자가 되묻습니다.

“왕이시여,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면 그 어둠은 어디로 사라집니까?”

“존자이시여,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면 방 전체가 환해집니다. 어둠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시여, 그와 같이 지혜가 생기면 어리석음이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예전의 어리석음 그 자체가 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듯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술 취한 노인처럼 지금부터 오계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는 아무리 잘 타려고 해도 자기 뜻대로 안됩니다. 몇날 며칠을 고생하고 연습하고 자빠지고 무릎을 깨먹다 보면 어느 순간 그냥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전거를 어떻게 타냐고 물어보면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냥 타면 돼. 방법 없어.” 정작 본인은 넘어져가면서 반창고를 붙여가면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지 않습니까. 그렇데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움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노력했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성과가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일주일동안 열심히 용맹정진을 하면 그만큼의 깨달음이 오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용맹정진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습니다.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칩니다. 어느 순간 말입니다.

깨달음, 꺼진 불을 켜듯 한순간에 오는 것

<금강경> 제14분에도 이런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須菩提 若菩薩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則無所見
수보리 약보살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약보살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수보리야, 보살이 이 세상 존재하는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존재하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면
환하게 빛이 나는 곳에서 온갖 것들을 또렷하게 보는 것과 같다.

앞 구절과 뒷 구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두운 방에서 불만 켜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불을 켜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만, 어느 순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한 순간에 불이 켜지니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출가수행자가 초발심을 했을 때 반드시 봐야 하는 경전인 <자경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三日修心 千載寶 삼일수심 천재보
百年貪物 一朝塵 백년탐물 일조진

삼 일 동안 수행한 마음은 천개의 수레를 가득 채운 보물과 같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티끌과도 같다.

백 년 천 년 동안 중생심에 빠져서 희로애락에 휘둘려 살아도 그런 것들은 하루아침의 티끌과도 같아서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역시 깨달음의 속성을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만큼 꾸준하게 오는 것이 아니고 한순간에 오는 것입니다. 실생활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전과 후의 생활이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운동을 해야지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안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에 만보를 걷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만보를 채우려고 노력을 합니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숨을 담보로 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바뀌는 것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막연하게 오계를 지켜야 한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냥 부처님 말씀을 연구를 좀 해보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고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다 하는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조금 들어보니까 그럴 듯하고, 공부해보니까 이해가 되는 것 같은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 깨달으면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깜깜한 방에서만 살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그 부모가 바깥 세상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밖에 나가면 태양이라는 게 있고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고 강물은 반짝반짝 빛이 난단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빛에 대해서 밝음에 대해서 상상하겠지만 그것이 과연 진짜 빛이겠습니까?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어둠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빛에 대해서 광명에 대해서 자기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초입니다. 올해는 부처님의 제자답게 잘 살아야지, 올해는 어떤 목표를 이루어야지 생각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더라도 처음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항상 어느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 마치 황소가 뚜벅뚜벅 걸어가듯이 우직하게 밀고나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야기한 깨달음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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