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수행

불교에서 기도는 절대자에게 비는 간청이라기보다 부처님이라는 수행자를 닮아가고자 하는 존경의 마음이다. 불자들은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의 내가 되고 싶다는 욕심으로 기도를 한다. 중생이 아니라 부처로 변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모든 기도와 불공은 수행이 되어야 한다. 수행은 마음이 침묵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침묵하는 상태를 기민하게, 예민하게, 신중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기도, 수행, 예불

기도라는 말은 불교보다 이웃 종교에서 더 일상적으로 많이 씁니다. 실제 서점에 가서 보면 ‘기도’와 관련된 책의 70%는 개신교에서 발간했습니다. 나머지 8% 정도는 가톨릭에서 쓴 책이고, 불교에서 기도에 대해 쓴 책은 약 2%에 불과합니다. 불교의 기도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타종교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도, 소통과 간청

기도는 두 마디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소통과 간청입니다. 기도를 하려면 먼저 기도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기도와 함께 해왔고, 기도의 대상은 절대적인 존재인 신이었습니다. 신에게 무언가 소원을 들어 달라고 간청하거나 신과 영적으로 소통하고자 한 것이 인간에게 정착된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어느 역사, 어느 문화, 어느 문명 할 것 없이 절대적이고 신적인 존재와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과 간청하는 마음은 늘 있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도는 인간과 함께 해온 삶의 방식 중 하나입니다.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초라할 수밖에 없는 원시인들에게는 힘든 하루하루를 극복하게 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존재에게 간청한 것이 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자들의 기도 대상인 부처님은 절대자가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매우 훌륭하고 뛰어난 수행자였습니다. 때문에 부처님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간청하기보다 ‘나도 부처님처럼 살아야겠다’, ‘나도 부처님처럼 깨달아서 진정한 행복을 성취해야 되겠다’ 하는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존경하는 대상으로 남겨두는 대신, 많은 보살님들을 간청의 대상으로 의지해왔습니다. 약사여래에게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지장보살에게 극락왕생을 기도하고, 관세음보살에게는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신중기도도 그렇습니다. 진리와 수행자들을 지키는 호법신장들에게 간청하는 것이 신중기도입니다.

중생에서 부처로 변하기 위해 기도를 한다

중요한 것은 왜 기도를 하냐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왜 기도를 합니까? 바로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되고 싶다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의 내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으니까 기도를 합니다. 잘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욕심의 방향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부처님 같은 훌륭한 수행자가 되어 깨닫기 위한 것이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방향을 올바로 잡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도에 임한다면 그 기도야말로 진정으로 본인에게 수행이 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왜 합니까? 내가 변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떻게 변화합니까? 중생이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 중생에서 부처로 변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놓치지 않아야 스스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도와 불공 그리고 예불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부터 진리를 깨친 부처님을 존경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부처님이 계셨던 곳, 부처님이 법을 설한 곳,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을 찾아가 순례를 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기리고 존경하는 행위들이 후대에 이어져 하나의 의식으로 정착한 것이 지금 우리가 행하는 불교의식입니다. 탑을 돌던 것들이 지금 하는 예불로 발전했고, 멀리 성지순례를 가며 부처님을 생각하는 데에서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염불이 나왔습니다. 염불의 시작은 부처님의 상을 머리 속에서 아주 세밀하게 상상하는 불상관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상호를 상상하는 불상관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염불로 바뀐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도의 원래 뜻은 절대적인 존재에게 간청하거나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기도는 깨달으신 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에 있습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과 그런 마음을 담아 정해진 의식대로 행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기도는 수행이지만 동시에 의식입니다. 불교에서는 불교의식을 지칭할 때 “불공을 드린다”는 표현도 자주 씁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같은 불교의식인데 어떤 때는 기도라 하고, 어떤 때는 불공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담아 의식을 행하고 그 공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기도라고 부릅니다. 기도의 본래 의미인 간청과 소통이 불교적으로 재해석된 것입니다. 반면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담아 짜여진 형식과 의식에 맞추어 “공양물을 올리는 것”을 강조한다면, 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린다, 즉 불공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공양 올린다”는 표현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불교의식의 기본 골격이기 때문입니다. 불공에는 사시 불공, 신중불공, 독불공, 생일불공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한편, 불보살님께 예를 표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불교의식은 하나의 예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불은 부처님께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 마음 내킬 때 하는 것은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다 한번 하는 것, 마음 내키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께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듯 매일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불은 불교의식 중에서 “정해진 시간에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시예불”이라고 하면 사시(오전 11시~ 오후 1시)에 하는 예불이라는 의미이며, “사시불공”이라고 하면 사시에 올리는 불공이라는 말입니다. 둘 다 사시에 하는 불교의식이라는 점에서 같은 말입니다. 동시에 사시불공 (사시예불)에는 반드시 축원과 발원이 들어가므로 기도이기도 합니다.

궁전처럼 웅장한 건물을 짖고, 안과 밖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황금으로 도금한 청동조각상을 건물의 중앙에 모시고, 각종 찬탄하는 내용의 의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격식을 갖춘 장소에서 집단이 참여하는 모든 종교적 의식은 강한 결속력을 고취시킵니다. 아무리 그 종교가 주장하는 내용이 숭고하더라도 의식을 통한 결속이 없다면, 그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리기 힘듭니다. 다른 측면으로 인간은 태생적으로 집단생활을 속성으로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이런 집단적 의식은 인간의 집단적 속성에 잘 부합합니다. 종교의식은 종교가 표방하는 바를 인간의 본능적 감성과 연결시키는 효율적인 작업인 셈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집단적 속성에 호소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더라도 여러 분야에서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고 있ㄴ다.

몸과 마음이 계속해서 부처와 보살의 행을 하도록

반면 개인적 측면에서 예불은 서원을 굳건히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서원이란 나도 부처님처럼 기필코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커다란 원입니다. 지금의 헛된 나라는 거짓된 상(相)을 버리고 모든 번뇌를 여의어서 오로지 자비심으로 자신을 가득 채워 모든 중생들을 돌보겠다는 바람입니다.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귀의하고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귀의한다 함은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표시이자 나도 그렇게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뜻합니다. 예를 올림은 불보살전에서 자신의 서원을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

예불을 하다 보면 누구 할 것없이 벅찬 감정이 올라옴을 느끼곤 합니다. 그것은 곧 불보살님께 절을 하고 있는 자신이 곧 부처라는 순간적인 각성과 그에 따른 정서적 감동 같은 것입니다.  평소에 ‘나’라고 상정하고 있는 그 무엇이 기실은 아무런 실체도 없는 신기루 같은 것임을 잠깐이나마 피부로 느끼는 순간입니다.

물론 그런 느낌은 잠깐입니다. 소소한 일에 벌컥 화내고,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기만 하고 정작 실행하지는 않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울적해 하거나 아니면 나를 무시한다고 기분 나빠 하는 그런 평소의 ‘나’가 어느 순간 없어져 버린 말그대로 무아지경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시당초 그런 것이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되면 그것이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나’란 오로지 끊임없이 행하는 ‘行’을 지칭할 뿐입니다. 무엇을 인식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따라 ‘나’의 모습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예불을 하면서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면 실제로 부처가 될 것입니다. 부처 또한 ‘행’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없고 ‘관세음보살’도 없습니다. 행위만이 있을 뿐입니다. 관세음보살의 행을 하면 관세음보살이고, 마구니의 행을 하면 마구니입니다. 이전의 행위가 지금의 행위에 영향을 주고, 지금의 행위가 다음의 행위에 영향을 줄 뿐입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는 생선냄새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는 향 냄새가 난다고 하지요. 이 몸과 이 마음이 관세음보살의 행을 하면 관세음보살입니다. ‘나’가 ‘있다’는 생각에 빠져서, 지금 이 순간 이 행동을 하도록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에 얽매여서 다음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이 곧 중생입니다. 그러니 예불은 불보살에 귀의하는 행이자 궁극적으로 이 마음을 불보살의 그것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입니다. 

모든 기도는 수행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불교의식은 보는 관점에 따라 기도, 불공, 예불이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수행입니다. 기도나 불공이 부처님께 공양물을 올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소원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알 안에 있는 병아리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애써 부리로 껍질을 쪼고, 밖에서도 어미 닭이 같이 껍질을 쪼아야 비로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무언가 바라는 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앉아서 원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신 스스로가 변하기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주변 상황이 같이 변해야만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불공은 결국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 어제보다 더 발전되고 향상된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입니다. 기도와 불공이 예불이 되고 수행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불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바입니다.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고 마음이 침묵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마음은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생각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마음은 항상 무언가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와 대화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입은 침묵하고 있지만 마음은 계속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듣고 있지만 속으로는 같이 떠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침묵하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바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면 상대방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근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딴생각을 하면 그것은 수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기도를 했으니까 나는 참 괜찮은 불자야’라고 스스로 잘난 맛에 빠지면 수행을 잘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침묵하지 않고 나도 모르게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은 내 마음이 침묵하는 상태와 느낌을 항상 간직하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침묵하는 상태를 눈여겨 아주 신중하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몸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나에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과 가족들 다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기도 접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불안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항상 하게 되지요. 이런 마음이 알고 보면 자비심입니다. 이런 걱정하는 마음에서 기도를 올리고 인등을 켭니다. 이런 마음을 잘 간직하되, 다만 내 자식만이 아닌 남의 자식도 챙기고, 남의 자식만이 아닌 모든 중생들은 보듬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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