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의 중노릇 하는 법 4

지식을 많이 쌓는 ‘똑똑한 분별’은 수행에는 쓸모가 없는 일이다. 내가 죽는다는,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마음을 깨치기 위한 ‘간절함’이 생긴다.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음심과 탐심, 진심을 멀리해야 하고 재물과 색이라는 재앙중의 재앙을 조심해야 한다.
착한 마음 나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하다 나쁘다 하는 분별 자체를 떠나야 하며, 주변의 상황에 상관 없이 동요가 없고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상태 그대로가 부처의 마음이다.

#경허선사, 경허스님, 나는누구인가, 마음, 수행

세상 일 분별은 쓸데 없는 일 

설사 세상일을 똑똑히 분별하더라도 비유하건대 똥덩이 가지고 음식 만들려는 것과 같고 진흙 가지고 흰 옥 만들려는 것과 같애여 성불하여 마음 닦는데 도시 쓸데없는 것이니 부디 세상일을 잘하려고 말지니라.

세상 일을 똑똑히 분별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세상 일을 똑똑히 분별한다는 것은 지식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A라는 사람은 핸드폰을 두고 전화할 때 쓰는 것이라는 정도밖에 아는 것이 없는데, B라는 사람은 핸드폰을 만드는 박사라고 합시다. B는 핸드폰을 만드는 방법, 재료, 쓰임새 등을 여러가지 측면으로 잘 분별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마음 닦는 데에 아무런 쓸데가 없습니다.

마음을 닦는 것은 올바른 습관을 들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을 쓰는 연습을 하는 것과 같아요.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지식이 있다고 해서 오른손으로 글씨 쓰는 습관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하다가 안 하면 그 습관이 없어져서 다시 왼손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 

세상 일을 똑똑히 분별한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일들에 대해서 지식이 많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깨치는 것은 지식을 많이 아는 것, 똑똑하게 분별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다만 습관을 들이는 것하고 비슷하지요.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다른 사람 죽는 것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여 내몸을 튼튼히 믿지 말고 때때로 깨우쳐 마음 찾기를 놓지 말지라.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여 오고 의심하여 가고 간절히 생각하기를 배고픈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여 잊지 말고 할지니라.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 깨치는 데에 쓸모가 있을까요? 다른 사람 죽는 것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여 내 몸을 튼튼히 믿지 말라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에요.  

물론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을 본인이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그가 죽을 때, 오직 한 번 뿐이죠.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죽고 나면 산 사람이 아닌 거죠. 즉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 다른 중생들의 죽음, 예를 들면 나의 반려동물 혹은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 말고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간접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무엇일까요? 나도 중생이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죽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죽음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는 마음을 깨치는 것과는 아주 멀리에 있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마음을 깨치려면 죽음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어서 뜬금없이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의심을 하되 아주 간절히 의심을 하라고 합니다.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나 그냥 궁금해 하지 말고, 간절하게 하라고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 생각을 하듯, 고양이가 쥐 잡듯,  자식생각을 하듯, 그렇게 간절하게 생각하고 의심해야 마음을 깨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알면 ‘간절함’이 생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마음을 깨쳐야지만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요. 그렇게 하려면 내 마음이 어떻게 생겼나 의심을 하면 된다는 것까지도 알았는데요. 부처님이 ‘간절하게’ 의심하라고 당부한 것과 달리 솔직히 내게는 별 간절함이 없다 이겁니다. 

만약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던가, 죽음을 맞이했다던가 하는 드라마틱한 일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삶에 이런 간절함이 찾아들기는 힘든 일입니다. 간절함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풀어질 텐데, 간절함이라는 단계에서 막히니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과연 지금 나는 수행이 간절한가? 도대체 간절함이라는 게 어느 수준이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런 간절함을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풀어가는 힌트를 부처님의 일대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더이상 물러나지 않는 수행의 길에 들어섰을까요? 

부처님은 사문유관을 통해 물러나지 않는 수행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인간들의 삶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수행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처님은 알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자기 삶을 돌아보고 매 순간 내 삶을 잘 성찰하여 그속에서 부처님과같은 초발심을 내면 됩니다. 

수행의 길로 나서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일상을 천천히 들여다 보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을 천천히 들여다 보면서, 그 속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들이 가지는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깨쳐서 부처가 되어야겠다.’ 하는 발심이 생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체 세상일이 다 허망하다 하시고 중생의 모든 하는 일이 다 나고 죽는 법이라 하시고 오직 제 마음을 꺠달러야 진실한 법이라 하시니라.

부처님이 당신의 삶과 당신의 주변을 관찰해보니 일체 세상이 다 허망하더라는 겁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더라. 영원한것은 없더라. 생명 있는 것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는 이 진실에서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직 내 마음을 깨달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행복을 얻는다는 말은요. 이 세상이 문제가 아니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문제더라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일체가 허망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체가 허망하지 않기를 영원하기를 변하지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깨치면 그게 바로 진실한 법이고 영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실제적인 생활자세가 아래에 이어집니다.

마음을 깨치는 생활자세 

술을 먹으면 정신이 흐리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음행은 정신 갈려 애착이 되니 상관 아니할 것이요. 살생은 마음에 진심을 도우니 아니할 것이요. 고기는 먹으면 정신이 흐리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거짓말은 내 마음에 사심을 기루니 아니할 것이요.

술을 먹으면 정신이 흐릿해지니까 마음 깨치는 데에 도움이 안 됩니다. 음행이라는 것은 요즘 말로는 성욕인데요. 인류의 번식이라는 기본 속성에서 벗어나 너무 과하게 보상만을 바라고 집착하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살생을 할 때는 자비로운 마음과 고요한 마음과 평정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다른 중생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잖아요. 분노와 격노가 일어나서 모든 세포가 긴장하고 공격적으로 변할 때 살생이 일어납니다. 분노는 살생에 동반되는 현상입니다. 화도 자꾸 되면 습관이 되고요, 화를 안 내려고 하면 안 내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살생을 하면 내 마음에서 화내는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도둑질은 내 마음에 탐심을 늘이니 아니할 것이요. 파와 마늘은 내 마음에 음심과 진심을 돋우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머지 일체 것이 내게 해로운 것이니 간섭치 말지니라.

마음에는 음심과 진심이 있습니다. 음심은 애착 집착 욕망 탐욕을 키우는 마음이고 진심은 화내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늘리는 일체의 해로운 것들은 먹지말라고 경허스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걸 먹더라도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담배를 예로 들면, 담배를피우고 싶은 마음과 피우면 안 된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마음이 충돌합니다. 마음이 담배를 보고서 통제를 못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뭘 먹던지간에 수행하는 데에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면 상관이 없지만, 중생 치고 그런 사람은 잘 없습니다. 스스로를 알고 인식하고 가릴 건 가리고 멀리할 건 멀리하는 것이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목우자스님 말씀이 재물과 색이 앙화됨이 독사보다 심하니 몸을 살펴 그른 줄 알아 항상 멀리 여의라 하시니 이런 깊은 말씀을 본받아 행하여야 공부가 순히 되나니라.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갔다고 하면 이것은 자연재해입니다. 그런데 앙화(殃禍)라는 표현을 쓸 때는 재앙의 재앙을 말합니다. 단순히 재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쁜 짓을 해서 과보를 받는 겁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하면 재앙의 재앙이지 않겠습니까. 재물과 색이라는 재앙이 독사보다 심하니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으면 멀리 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착한 마음도 버려야 할 마음

부처님 말씀에 한번 진심 내면 백만 가지나 죄가 생긴다 하시니 제일 골내는 마음을 참을지니라. 예전 스님네 말씀이 골내는 마음으로 호랑이와 배암과 벌과 그런 독한 물건이 되고 가변운 마음으로 나비와 새가 되고 좀스러운 마음으로 개아미와 모기 같은 것이 되고 탐심 내는 마음으로 배고파 우는 귀신이 되고 탐심과 골내는 마음이 많고 크면 지옥으로 가고 일체 마음이 다 여러 가지 것이 되어가니 일체 여러 가지 마음이 없으면 부처가 되나니라.

부정적인 마음은 당연히 없어야 하지만, 착한 마음 도덕적인 마음 등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없어져야 깨칠수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착한 마음도 중생심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고 한순간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착하지 않다는 것에 비교하여 나온 마음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경지에서 보면 착한 것이나 착하지 않은 것이나 같은 수준입니다. 때문에 그런 마음도 궁극적으로는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고, 다만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야 부처가 됩니다. 

혼곤이란 무언가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고 두루뭉실해서 곤란한 상태입니다. 제대로 보이지 않아 곤란한 상태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혼곤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가 보입니다. 맑은 호수가 거울인 것처럼 세상 있는 그대로가 비치듯이, 마음이 깨끗해야 혼곤되지 아니하고 깨칠 수 있습니다. 

청정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깨끗하다는 것은 때가 묻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염되지 않고 순수하합니다. 부정적인 감정들로 오염되면 깨끗한 게 아니지요. 즐거워하는 마음도 종국에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마음들이 마음의 때와 같습니다. 때가 다 없어진 상태가 깨끗한 상태이고요. 우리가 느끼는 괴롭다, 슬프다, 행복하다 하는 마음들은 모두 티끌입니다. 때 없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깨끗해져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고요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동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이 바로 부처의 경지입니다. 마음이 그런 상태가 되어야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로바로 부처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다만 몇 초 동안이라도 내 마음이 아주 깨끗했다고 하면 그 몇 초 동안은 내가 부처인 거예요. 

마음을 보라 

이 법문을 가끔 보고 읽고 남에게 일러주면 팔만대장경 본 공덕과 같고 그대로 공부하면 일생에 성불할 것이니 속이는 말로 알지 말고 진심으로 믿어 하여 갈지니라. 산은 깊고 물은 흐르고 각색 초목은 휘어져 있고 이상한 새소리는 사면에 울고 적적하야 세상 사람은 오지 앟는데 고요히 앉아 내 마음을 궁구하니 내게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인가?

심산유곡에 들어가면 내 마음이 깨끗해지겠구나 하고 중생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제가 심산유곡에 살아보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산 깊은 곳에 있으면 사회 속에서 살 때보다 조금 쉽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지, 단지 인적이 끊어진 곳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지는 건 아닙니다. 수행을 해야 맑은 마음이 됩니다. 

듣기 어려운 좋은 법을 들었으니 신심을 써써 할지니라. 마음을 너무 급히 쓰면 신병이 나고 두통도 나나니 마음을 가라앉혀 편안히 하여 가라. 조심하라. 억지로 생각하려 말고 의심을 내어 할지니라.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선 아무 생각을 하면 안 돼!’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마음이라는 놈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의심만 간절하게 가져가면 됩니다. 의심은 내가 생로병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옵니다. 그리고 생로병사 그 자체가 나에게 고통을 주는게 아니고, 실은 내 마음이 생로병사를 보고 고통스러워 하더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이 마음이 왜 이렇게 고통을 자처하는 것일까? 이렇게 발심을 하고 마음을 내어서 공부를 해야지만이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집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부처가되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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