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반갑습니다. 오늘은 새롭게 법문을 하기보다 백중 49재 기간 동안 해온 법문을 복습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의학에서는 뇌, 심장, 폐 등 세 가지 중요한 기관이 멈추면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 있다기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하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일정한 기준을 정한 겁니다. 의학적으로는 그 기준을 뇌사, 심장사, 폐사가 되면 죽은 것으로 하자고 정의했습니다. 의사가 사망을 판정하는 순간부터 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죽음이 시작됩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사망처리입니다만 나쁘게 이야기하면 사회적으로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의학적 죽임이냐 사회적인 죽음이냐가 아닙니다. 단지 내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데 100% 죽습니다. 서운하게 들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달리는 자전거는 둥근 두 바퀴로 잘 서있지만 멈춘 자전거는 서있지 금방 쓰러져 버립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달리는 자전거를 살아있다고 하고 멈춰 있는 자전거를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으나 똑같은 몸뚱아리인데 굳이 의미부여를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이 바로 산 자가 가진 두려움의 본질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언젠가 내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입니다.
49재, 영가에게 법을 베푸는 시간
49재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하나의 몸을 버리고 다음 몸을 받기까지는 중간세계가 있어서 49일 동안 머무릅니다. 그 49일 동안에는 7일에 한 번씩 재판을 받습니다. 49재를 지내는 것은 영가님이 재판을 받으러 가기 전에 부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전생의 잘못을 참회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영가님이 재판관으로부터 조금 더 좋은 판결을 받게 하고자 함입니다.
한편 49재는 유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까운 이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평소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됩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통해 본인의 삶을 염라대왕 같은 타인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내 삶에 대해 평가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일을 했으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참회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49재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 법을 설하는 시간이자, 유족들도 반성하고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영가는 삶을, 산 자는 영가를 떠나보내는 과정
직접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영가님에게 일러주어 지난 삶에 대한 애착과 육신에 대한 집착을 털어버리도록 권합니다. 그리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더 좋은 몸을 받아 더 좋은 삶을 살길 바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49재는 고인에 대한 애착을 털어내는 과정입니다. 영가님과 관련된 자식, 친지, 주위의 모든 사람이 영가님을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사랑했다면 좋겠지만 우리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마음 속으로 미워하거나, 드러내놓고 갈등하거나, 살아생전에 서로 증오하며 지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당사자가 돌아가시게 되면, 마음속으로 고인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고인을 죽음으로 내몬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나쁜 마음이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쁜 마음입니다. 그럴 때 고인이 돌아가시고 나면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미안한 마음 역시 고인에 대한 또 다른 애착입니다.
고인에 대한 온갖 애착을 털어내기 위해 스스로 마음을 잘 가다듬으면 그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시간을 내어 아까운 돈을 써가면서 절에서 복잡한 의식을 치르는 이유는 바로 공을 들이기 위함입니다. 공을 들이려면 몸과 마음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인을 향한 내 마음속의 온갖 애착을 털어내는 겁니다. 그렇기에 굳이 힘들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불교, 봉사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
여러분. 불교라고 하는 것은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복잡한 교리, 무아, 윤회사상 이런 것은 몰라도 됩니다. 오직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봉사를 잘 합시다. 봉사를 잘 하는 것이 부처님이 말하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자비심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돈이 많다면 돈으로 봉사하고, 내 몸을 부려서 봉사할 수 있다면 체력으로 봉사하고, 돈도 체력도 없다면 오늘처럼 마음으로 돌아가신 모든 영가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됩니다. 봉사라는 게 꼭 어디 봉사 현장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만 아닙니다. 나와 내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전혀 모르는 영가님들의 극락왕생을 위해서 간절히 비는 것이 바로 봉사입니다.
두 번째, 도덕적인 생활을 합시다. 불교에서 도덕적인 생활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오계만 잘 지키면 됩니다. 오계를 지켜야 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마음속으로 ‘오계를 어디까지 지켜야 하나’, ‘살생하지 말라면 어디까지 지켜야하나’, ‘생선요리도 하면 안 되겠네’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재고 따지는 겁니다. 다만 상식적인 선에서, 내 안에서 살생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는 것이 살생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훌륭한 불자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마음으로 봉사하는 날입니다. 내가 아는 모든 영가들과 내가 모르는 모든 영가들과 이 나라를 위해서 젊은 목숨을 바친 영가님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한평생 고통 속에 사시다가 억울하게 가신 영가님들, 모든 한 많은 영가님들을 위해서 마음속으로 열심히 봉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