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없는 사람들
며칠 전에 외부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퇴직한 교수님이나 선생님들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평생 공부만 하고사셨을 텐데 무엇을 또 공부하고 싶어서 나오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노인복지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고 합니다. 정년퇴직한 공직자, 교육자, 사업가 등 왕년에 사회생활에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이 복지관에 와서 치열한 힘겨루기를 한다고 하는데요. 탭탠스 동아리, 배드민턴 모임 회장 같은 자리를 놓고 왕년에 한 가닥 하시던 분들이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시간이 없어서 문제고 나이가 들면 찾아주는 사람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문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도 현재 주지라고 하는 현역에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남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낮 시간은 법문도 하고 강연도 다니는 등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지만 밤이 되면 참 적막합니다. 이 나잇대의 다른 남성들처럼 손주가 있어서 치닥거리 할 것 아니고, 아내가 있어서 종알종알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녁 내내 혼자 있으니까 할 일이 없습니다.
무언가 할 일을 찾는 사람들
특별히 할 일이 없다는 게 남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유튜브 좀 보다가 음악 좀 듣다가 책 좀 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무언가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닌데, 하고 싶은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모순이지요. 뭔가를 하고 싶은데,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언가 그 일을 하면 시간이 쏜살같이 잘 가고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고 남들에게도 인정 받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도대체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뭘 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가 없다면 오히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오늘 아침 문득 들었습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안 하는 것이 수행인데 그동안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깨우침이 왔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진짜 제대로 된 무언가를 하는 것인데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엉뚱한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뜬금없이 반야심경 이야기를 해야 하겠는데요. 반야심경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소승과 대승을 이어주는 반야부 경전의 모든 내용은 짧디짧은 반야심경 안에 다 들어가 있고요. 다시 반야심경의 모든 내용과 핵심은 반야심경의 첫 도입부 한 문장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고통(dukkha), 불만족의 상태
모든 고난과 액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됩니다. 그것은 무엇을 통해서 하는가? 반야바라밀다를행하는 것을 통해서 합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고통이란 무엇일까요? 모기에게 물려서 가렵다는 고통, 돌멩이에 발부리가 걸려서 발이 아프다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은 고통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고통을 산스크리트어 원어로 말하면 두카(dukkha)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수레의 바퀴와 바퀴 축이 뒤틀려서 수레가 불안정하게 돌아가는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뭔가 매끄럽지 못한 상태, 조화롭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해서 괴로운 상황입니다. ‘고’라고 하면 신체적인고통이나 감정적인 괴로움을 먼저 떠올리는데요. 뭔가 조화롭지 못하고 불만족스럽고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 전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상태가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가 이어지는 겁니다. 그 무언가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잠깐 할 일은 있지요. 글을 쓰는 일일 수도 있고 건축 불사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됐든 그것이 나를 영원히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무언가라고 하는 일의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야기한 번뇌입니다. 두카, 고통입니다.
바깥 대상으로는 내 안의 고통을 없앨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나 고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에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해야 할 일이 있기는한데,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일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시간만 죽이고 지나갑니다. 이런상태. 뭔가 불만족스럽고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가 번뇌입니다. 이런 번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앞서 제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것은 내 안의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를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을 내 밖에서 찾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불사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 밖의 무언가를 향한 액션(Action)인데요. 그런 것들은 아무리 해봐야 내 안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런 액션 자체를 하지 말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자는 겁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지켜보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법문을 듣는 여러분들은 법회가 끝나면 대웅전에서 나와 떡을 받아서 도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셔틀버스를 타고 버스종점까지 내려가서 집에 가실 텐데요. 이 과정 동안에 내 걸음걸이가 어떠한지, 손놀림은 어떤지, 도반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반과 이야기를나누는 나의 표정은 어떤지. 이 모든 과정을 돌아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버스 종점까지 가는 과정은 몹시 단순합니다. 별로 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한 게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마어마하게많은 일을 합니다. 걷고 손을 움직이고 말을 하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이런 저런 느낌이 스쳐 지나갑니다. 많은 자극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액션을 취합니다.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 나는 그 과정을 잘 모릅니다. 무의식적으로 합니다. 알고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죠. 자각 없이, 의식 없이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24시간 중 거의 모든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보냅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들을 의식적으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안다는 말입니다. 또렷하게 안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식사를 할 때 어떻습니까? 입으로는 무언가를 씹고 있고 손은 이미 다른 반찬에 가있습니다. 눈은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귀는 윗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귀로 듣는 와중에 머리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또 윗집 아이들이 뛰어다니는구나.’ 하고요. 손은 손대로, 눈은 눈대로, 귀는 귀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따로 놉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의식하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들을 아무 생각 없이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모두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밥을 먹을 때, ‘밥 씹는 것만 하겠다’고 정해 놓고 밥을 먹어 보십시오. 딴생각 하지 말고오로지 입 안에서 밥이 다 없어질 때까지 밥만 씹겠다고 생각하면요. 답답해서 미쳐버립니다. 몸이 기다리질 못합니다. 적당히 씹고 삼켜버립니다. 의식은 관찰하는데 몸은 답답하니까 꿀꺽 삼켜버립니다. 어떻게? 무의식적으로요. 밥 먹는 것 하나도 정말 의식적으로 하기가 힘듭니다. 무의식적으로 먹습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집중과 인지
왜 우리는 이렇게 살까요? 왜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할까요?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의식하면서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밥 먹는 것 하나, 걷는것 하나, 들리는 것 하나. 모든 것에 다 주의를 기울이며 살면 아마 머리가 터져버릴 겁니다. 우리는 집중이라는 것을 합니다. 중요한 것에 의식을기울이는 것이죠. 고양이들이 사냥을 할 때도 집중을 하지 않습니까?
연구진이 고양이를 데리고 실험을 해봤답니다. 고양이가 집중할 때 뇌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는데요. 일상적인 상태의 고양이에게 음악을 들려줍니다. 그러면 고양이의 뇌파는 음악소리에 반응을 하면서 활동합니다. 이때 고양이 앞에 쥐를 한 마리 던져줍니다. 순간 음악에 반응하던 고양이의 뇌파가 정지합니다. 뇌에서 쥐를 노리는 영역만 활성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단됩니다.
고양이를 키우시는 분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계실 겁니다.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벌레라던가 새 같은 것이 나타나면 고양이가 꼼짝하지 않고 집중하지 않습니까. 말을 걸거나 건드려도 무시하고 대상에만 집중합니다.
이렇게 뇌의 작용이라는 것이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부위는 정지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영장류의 뇌의 반응이 이러합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여서 분석하는 데에 뇌의 20% 가량 사용되고, 나머지는 오히려 특정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대상에 대한 인지를 억누르는데에 사용됩니다.
무의식에 끌려 가지 않기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 자체는 자연적인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보고 듣고느끼는 것에 끌려 다니는 겁니다. 끌려 다닌다는 말은 무언가 상황을 결정할 때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끌고 다니는 그것이 결정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길을 가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고 합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화가 확 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화를 내고싶어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의 뒤통수를 때렸다고 하는 자극에 내가 끌려간 겁니다.
만약 내가 화를 내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독립적이다,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하면 1초 뒤에 화가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화가 한 번 나면 가라앉히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은 내가 화에 끌려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많은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수많은 정보들에 반응하기를 아무 생각 없이 반응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정보들에 끌려 다니는 것이 그런 정보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것이고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 의식으로써 바로 보기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봅시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겁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이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관찰하십시오. 정 관찰할 것이 없으면 숨 쉬는 것이라도 관찰하십시오. 그것이 수행입니다.
정작 중요한 수행은 하지 않고, 무언가 우리 안에 결여된 무언가를 막연하게 채우고 싶다는 욕망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수행을 합시다. 내 자신의 감정과 상태에 거리를 두고 바라봅시다. 그것이 알아차림이고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행심반야바라밀다’입니다. 자기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런데 그걸 못합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도인이 안 나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관찰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오늘은 또 뭘 하면서 하루를 보내나?’라는 생각이 들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관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