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이 들 때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나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하면서 분노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은 나’, ‘세상의 중심이 되어라’라는 말을 사회적으로 학습하며 살아간다. 기억속에 있는 서사적인 나와 현재 존재하는 체화된 나가 결합되어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며, 그 착각에 의해 스스로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고통과 분노의 순간에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수렁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매일매일 꾸준히 수행해온 과거의 나이다. 정진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다리이지만 동시에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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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런 일이!” 

살다 보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길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 건강했는데 갑자기 큰 병에 걸렸다던가 아무 잘못 없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던가 하는 경우에 한탄 섞인 마음과 함께 드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정말 그 이유가 궁금하다기 보다는 그 상황이 납득되지 않고 화가 나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템플스테이 참가자나 신도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고민들을 종종 털어놓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온 집안 돈을 끌어다가 사업을 했는데 쫄딱 망해버렸다고 합시다. 그 전까지는 넉넉하게 살았는데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어느 날 갑자기 살림이 옹색하기 되어버리니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렵고 억울하겠습니까? 

아주 수행력이 높은 스님들을 친견하면 스님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의 부정적인 생각과 고통들이 눈 녹듯 사라진다고 하는데요. 제가 그런 높은 도력으로써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면 그러한 마음의 역경을 벗어날 수 있다 하는 것을 알려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서울에서 자취를 할 때의 일입니다.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든 겁니다. 처음에는 도둑 든 줄도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 통장도 없고 몇 가지 사라진 것이 있는 겁니다. 놀랐지만 이렇다 할 큰 피해가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주 뒤에 집에 또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온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뒤지고 나갔더군요. 집을 치우기 전에 일단 밖으로 나가밥을 먹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막연한 분노와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곰곰이 생각해보니 쓰러지던 당시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너무 급박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는 ‘내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억울해’라는 생각, 일종의 분노는 기운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가 있어야그런 생각도 만들 수 있는 거예요. 만일 여러분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놓였는데, 그 순간 즉각적으로 ‘이 상황을 용답할 수 없어’, ‘왜 나에게이런 일이 생긴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의 상태는 건강한 겁니다. 

화를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은 동시에 희망 또한 있는 것입니다. 부정하거나 분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이 상황을 해결해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 착각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은 왜 생길까요? 간단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기계발 장르에서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이 “인생의 조연이 되지 말고 주연이 되어라!”라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것을 조장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받아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과연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인가?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인가? 주인공이라면 모든 것을 마음 대로 할 수 있어야 마땅한데, 세상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지는 해를 지지 못하게 한다거나, 대통령을 바꾼다거나, 나에게 일어날 사고를 일어나지 못하게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점심을 뭘 먹을 것인지, 잠을 몇 시에 잘 것인지, 청소를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것들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런 일들은누군가에게 검사를 받거나 허락을 맡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을 스스로 결정하는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착각 속에 살다 보니 나의 평화롭고 순조로운 일상에 예상치 못한 충격이 들어오면 분노하게 됩니다. 내가 주인공인데 나의 통제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 생기니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중생이라면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서사적인 나와 체화된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고 할 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일상이 나를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봤고,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모두 나입니다. 이렇게 기억 속에 항상 주인공이었던 ‘나’를‘서사적인 나’라고 표현합니다. 

문제는 서사적인 나는 혼자 있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우주에 나 혼자 있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우주에는 빛도 소리도 없는 암흑과 같은 우주 한 공간에 내가 자리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습관적으로 ‘이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 속에서 1년 이상 나 혼자 존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상태에서는 ‘나’라는 개념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은비교에서 나옵니다. 저기에 산이 있고 여기에 물이 있고 옆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 이것이 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을 ‘체화된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억 속의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스토리들, 즉 서사적인 나와 지금 현실 속에 있는 체화된 나를 합쳐서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머릿속에 각인된 내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충격에 의해서 그 생각이 흔들리게 되면 그 상황을 용납할 수없고, 용납할 수 없으니 분노가 솟아나옵니다. 그런데 대책이 없습니다. 막연하게 분노만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있다 착각과 불교의 연기법

결국 근본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있지도 않은 내가 있다는 뿌리 깊은 착각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은 바로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실제는 어떠합니까?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충격적인 일’이나 ‘납득이 안 되는 일’이지만 부처님의 인연법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얽히고설킨 인과 연들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나 역시 그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 속의 한 가닥 실일 뿐이지요. 

연기법을 이야기 할 때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나 단독의 힘이 아니라 인연, 연연, 차제연, 증상연이라는 네 가지 종류의 연이작동합니다. 인연은 원인에서 결과가 나오는 것, 연연은 감각기관과 지각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 차제연은 앞 찰나의 생각이 다음 찰나의 생각에 영향을 주면서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이어지는 것, 증상연은 씨앗 이외에도 흙과 물과 비료 등 씨앗을 제외한 조건들이 작용하여 싹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대학에 합격하거나 사업이 잘 되거나 원하는 바를 이뤘을 때, 오직 나 혼자 잘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나는 하는 일 만다 안돼’라고 할 때도,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나’도 하나의 조건이지만 내가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하는 수많은 조건들이 그물처럼 얽히고 설켜 하나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일상의 중요한 축이기기는 하지만, 내가 알거나 모르는 다양한 변수들이 함께 작용하여 굴러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니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사실 잘못된 것이지요.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요. 인연법을 깊이 고찰하면 ‘왜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금새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하고 수긍할 수 있습니다. 

나를 구하는  오직 정진 

문제는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의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당장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내 생각이 잘 못 되었구나. 인연법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데.’라는 해결법을 따를 생각이 나겠습니까?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수월하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소에 마음을 훈련시켜 두어야 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매일 외운다던가, 천수경을 독송한다던가, 108배를 한다던가, 하다 못해 산책을 하면서 명상하는 시간이라도. 무엇이든 좋습니다. 하기 좋으나 하기 싫으나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을 두고 정진이라 합니다. 이런 정진의 힘으로 수행에 습관을 들여 놓으면 보통이상의 힘든 일이 닥쳤을 때에도 나 혼자 힘으로 수렁에서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이나 감정에 깊이 빠져 있을 때,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정진했던 나밖에 없습니다. 108배를 열심히 하고 금강경을 열심히 외워보았던 과거의 내가 현재 힘들어하는 나에게 분명히 도움을 줍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고 속에서는 분출구 없는 화만 가득 차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평소에 해왔던 나의 수행입니다. 그때 이 답 없는 질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수행은 궁극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힘을 발휘합니다. 인생이 고달플 때 나를 위로해주는 것, 그것은 매일 하는 나의 수행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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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꿀 것인가 나를 바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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