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에 집성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갈애이니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이른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욕망에 대한 갈애의 세 가지 종류를 언급합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갈애입니다. 존재에 대한 갈는 있는 것을계속 있게 하게 싶은 마음을 말합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텅빈 ‘공’에 집착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갈애가 윤회를 만든다
갈애(渴愛)는 단순히 애정하고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듯이 갈구하는 정도로 애정하는 것을 갈애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쓰이는 탐욕이나 욕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애는 세 가지 역할을 합니다.
다시 태어남을 가져온다는 말은 윤회를 일으킨다는 말과 같습니다. 갈애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게 만듭니다. 윤회를 일으키는 범인이 바로 갈애입니다.
두 번째 역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욕망과 탐욕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갈애할 때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과 탐욕하는 마음이 동반합니다. 좋으니까 계속 찾는 거예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요. 이러한 즐거움과 탐욕이 사라지면 곧이어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세 번째, 여기저기서 즐긴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갈애는 중생세계에만 있지 않습니다. 천상세계의 천신들도 자기 생의 다함, 즉 존재하는 것에 애착합니다. 육도윤회하는 중생들의 다양한 세계 속에서 갈애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가 윤회하게 만들고 갈애가 없으면 윤회하지 않습니다.
십이연기는 괴로움(나)의 발생 원인
집성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고성제의 원인이 갈애라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를 풀면 십이연기입니다.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하면 소멸할 수 있는가를 밝힌 것입니다. 즉 집성제는 십이연기를 말합니다.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따라서 오늘의 주제는 십이연기입니다. 그런데 십이연기는 연기법과 혼동하기 쉽습니다. “십이연기는 인과관계이고,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다는 이야기야.”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아닙니다. 십이연기과 연기법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십이연기는 괴로움의 원인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입니다. 이 요소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각각의 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생기고…” 라는 대목에서 무명이 무엇인지 감도 안 오는데 행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 됩니다. 이렇게 각각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를 파고들다 보면 원래 ‘십이연기’가 설명하고자 했던 바를 망각하기 쉽습니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로써괴로움이 왜 발생하는지를 밝혔습니다. 부처님의 의도에 입각하여 십이연기를 바라보는 것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연기법과 십이연기는 다르다
십이연기는 앞으로도 외우고 뒤로도 외워야 합니다. 알든 모르든 이 구성요소의 순서를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외워야만 앞으로 전개되는설명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이연기의 마지막은 노사입니다. 경전에는 ‘노사를 비롯한 우, 비, 고, 뇌 등 이런 일체의 괴로움 등등이 생겨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늙고 죽는 것만이 노사가 아니라 슬프고 우울하고 괴로운 것 등이 모두 노사에 해당합니다. 노사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체의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중생들은 존재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이러한 느낌 자체가 괴로움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느낌은 어디에서 옵니까? 감각기관에서 옵니다. 안이비설신 등 느낌을 감각하는 기관이 있는 한 느낌을 느끼는 존재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십이연기는 ‘나라고 하는 괴로움의 덩어리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느낌 자체가 괴로움이고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므로 나라는 것 자체가 괴로움인 가운데, 십이연기는 어떻게 하면 나라고 하는 잘못된 허상을 없앨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합니다.
십이연기를 역관하여 들어가기
이렇게 연기법과 십이연기를 명확하게 구분해두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십이연기의 구성요소의 첫 번째인 무명이 등장하는 순간 이문제의식이 희미해져 버립니다. 무명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몹시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십이연기의 구성요소를 뒤에서부터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거꾸로 보는 방식을 역관이라 합니다.
부처님도 십이연기를 깨달을 때 뒤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갔습니다. ‘괴로움은 무엇을 조건으로 생길까? 태어남이 있으므로 나라는 놈이있구나. 그럼 태어나는 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생길까? 이것은 존재하는 그 자체에 있구나. 존재하는 것은 무엇에 의지해서 생길까?’ 이러한문답 끝에 십이연기가 완성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픈데 밥을 먹어서 기분이 좋다면, 배가 고프다는 괴로움의 원인은 밥을 못 먹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마음에 슬픔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 때문에 슬픔이 일어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각각의 괴로움에는 각각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괴로움은 무엇으로 인해서 생기는가?’라는 질문은 수백 수천 가지 답이 존재할 것입니다.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만드는 ‘근본 원인’ 찾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괴로움에 공통되는 원인을 찾는 일입니다. 자세히 봅시다. 배가 고파서 괴로울 때는 누가 괴롭습니까? 내가 괴롭습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얻는 이별의 고통은 누구의 고통입니까? 나의 고통입니다. 집이 가난해서,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괴로운 것은 누가 괴로운 것입니까? 내가 괴롭습니다. 주변 사람이 잘 되어서 질투가 나고 배가 아픕니다. 누구의 괴로움입니까? 나의 괴로움입니다.
중생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은 나라는 놈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열거할 수 있는 괴로움을 쭉 열거했을 때 공통점은 그 모든 괴로움에 ‘나’라는 것이 있더라는 겁니다. ‘괴로움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가?’ 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십이연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는,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십이연기의 마지막은 노사입니다. 노사는 일체 모든 괴로움과 번뇌, 즉 ‘나’를 말합니다. 나는 무엇을 조건으로해서 생기는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고 부처님이 생각하신 겁니다. 내가 없으면 괴로움도 없는데 어떤 이유로 내가 태어나서 괴로움과 일생을 함께 한다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지요. 십이연기에서 각각의 관계는 이런 원리로 연결됩니다.
연기법은 하나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다. 서양과학에서는 변수를 무시하고 하나의 원인을 계속 찾아 들어갑니다. ‘이 세상을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나머지 조건과 변수를 소거해가면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렇게 가면 신(神)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미국에 있는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중국에서 태풍이 분다는 뜻인데요. 아주 사소한 변수가 변화하면 현실 세계에 주는 영향 또한 변한다는 것이 연기법의 세계입니다.
십이연기에 임하는 키포인트
오늘은 십이연기를 이해하기 전에 명심해야 할 핵심 내용을 짚어보았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십이연기는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입니다. 십이연기는 연기법 그 자체가 아니라 연기법의 일부입니다.
둘째, 괴로움이 왜 생기는가를 밝히는 것이 십이연기의 목적이므로 십이연기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노사’부터 역으로 짚어 올라가는 것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셋째, 각각의 관계에서 앞의 내용은 뒤의 내용의 근본 원인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다음 것이 생길 수 없는 근본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넷째, 집성제는 갈애가 그 원인이 되어 윤회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내가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노사에이르기까지를 반복합니다. 생을 만들어내는 잘못된 업을 끊어내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고 해탈로 나아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