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 3
6.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느니라.
삶에서 가까운 이들과 정을 주고받는 행위는 아주 중요합니다. 보왕삼매론에서는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데 내가 이롭고자 하지 않음은 이타심을 말합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보왕삼매론의 공식에 따르면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 장애가 이타심이라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앞서 장애의 공함을 통찰하면 장애가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과 다를 바 없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를 사귀는 데 이타심이 왜 장애로 비춰지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타심이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자연은 이타(利他)다
자연에서 나무가 자라나면 짐승들이 그 열매를 먹고 다른 곳에 가서 배설을 하면 그 자리에 또 다른 나무가 자라납니다. 꽃이 피어 나비들이 꽃가루를 취하고 다른 꽃에 가서 앉으면 수정이 되어 열매가 맺히지요. 그러다가 동물들이 때가 되어 죽으면 거름이 되어 토양에 자양분이 되고 나무를 무럭무럭 자라게 해줍니다.
여기에서 나무와 동물의 관계는 서로가 각자 이롭고자 다투는 관계가 아닙니다. 나무는 동물에게 이타적으로 관계를 맺고, 동물 역시 나무에게 이롭게 작용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교류 관계입니다. 모든 자연 현상은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표현입니다만, 자연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서로를 위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자연적인 현상 역시, 친구를 위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는 것이 원래 중생들의 마음이자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겉으로는 위하는 체 해도 사람은 다 이기적인 존재야.’ 그렇지 않습니다. 친구(親舊)란 한자를 파자해보면, 친(親)은 나무에 새순이 돋아났을 때 그것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구(舊)는 오랫동안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이고요.
친구, 원하는 바 없이 가까이 있는 이
친구라는 것은 원하는 바가 없는 관계입니다. 그냥 서로 가까이 오랫동안 있어온 이가 친구입니다. 실제로 사회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친구의 세 가지 조건은 이렇습니다. 1. 접근성 2. 지속성 3. 계획되지 않은 교류입니다.
접근성은 무엇입니까? 항상 같이 있어야 합니다. 어릴 적을 생각하면 동네 친구들, 학교 친구들은 보기 싫어도 일 년 내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직장은 맘에 안 들면 그만두거나 이직하면 그만인데 학교나 동네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지속성이란 하루이틀, 한두 달 지낸 사이가 아니라 1년, 5년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같이 있는 성질을 말합니다. 이런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사이가 학창시절 친구 말고는 거의 없지요.
계획적이지 않은 교류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친구와 이번 달에는 몇 번을 만날지 정해놓고 그 횟수를 채우며 만나지 않습니다. 집에 찾아가서 같이 TV를 보고, 라면 끓여 먹고, 뒹굴거리면서 잡담을 나누다가 집에 돌아가지 않습니까. 인맥을 넓히기 위해서 알고 있는 지인들과 이렇게 계획되지 않은 교류를 할 수는 없지요.
‘이타’라는 자연을 피하는 것이 마음의 장애
그런데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친구는 실상 학창시절 친구밖에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기 전에는 친구를 사귐에 있어 바라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지요. 대인관계를 맺을 때 나도 모르게 나에게 득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해가 되는 사람은 멀리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본디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친구를 사귀되 이롭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타적이기를 피하는 것입니다. 이타적이라는 장애를 피하여 나에게 이롭고자 하면 마음에 장애가 생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귈 때 내가 이롭고자하면 어떤 장애가 생기나요? 의리를 상하게 됩니다. 여섯 번째 경구의 전문을 살펴봅시다.
정(情)을 나누되 나에게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나의 이익을 바라며 정을 나누면 도의를 잃게 되고,
도의를 잃게 되면 반드시 그릇됨을 드러내게 되느니라.
정의 근본을 잘 살펴볼지니 정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정은 인연을 의지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힘든 교제로써 깨달음의 밑천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해관계를 따져 의도적으로 친구를 사귀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히려 정의 근본을 살펴, 정은 인연을 의지할 뿐이라고 합니다. 인연을 의지한다는 말을 불교적으로 풀이하면 연기법에 따른다는 말입니다. 친구관계의 공함, 정의 공함을 간파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친구관계를 포함한 나의 삶이 연기법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통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장애가 장애가 아닌 자연적인 현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힘든 교제로써 깨달음의 밑천으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왜 힘든 교제라고 표현했을까요? 우리가 이타심이라는 장애를 피하면 나에게 이롭고자하는 마음으로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내가 편한 것입니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친구는 쉽게 만들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잘 안 맞고, 내 뜻에 반하고,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을 한 친구도 있습니다. 힘든 교제이지요.
중생의 마음으로 서로 좋은 친구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싫은 것도 좀 참고, 인내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남이 내게 순종하면 교만이 자란다
7.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곱 번째 경구의 핵심은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는 것은 장애를 피하는 것입니다. 남이 순종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장애를 피하는 것이라면 장애는 무엇입니까? 타인의 순종의 반대, 내가 상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왕정시대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의 순종을 받습니다. 그렇게 자라온 왕은 교만해지기 싫어도 자연스럽게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과 관계를 가질 때 장애는 존중과 배려심입니다. 존중과 배려심을 피하려고 하면, 다시 말해 남이 내 뜻대로 해주기를 바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성인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순종해주지 않는 사람, 내가 존중하고 배려해야할 사람들로 원림을 삼으라는 것이지요. 원림(園林)이란 과거 양반들이 유흥을 즐기기 위해 연못과 정자를 만들어놓은 정원입니다. 내가 노니는 주변에 내가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사람들을 두라는 뜻입니다.
일곱 번째 경구의 전문을 봅시다.
다른 사람이 순종하고 거스르지 않기를 바라지 말라.
사람들이 순종하여 거스르지 않으면 내심으로 자신을 뽐내며,
내심으로 자신을 뽐내게 되면 반드시 내가 옳다고 고집하느니라.
깨달은 이의 처세는 사람들의 허망한 행위를 관(觀)하며 그냥 무심하게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거역하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에서는 거역한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 순종하는 사람들만 있으면 반드시 내가 옳다고 고집한다는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은 이런 문제들이 인생에 큰 장애로 다가오고는 합니다. 다 알고 있지만 실천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내게 순종하지 않을 때 화가 일어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저의 경우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항상 화가 많았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지 하고 출근을 해도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속에서 짜증이 올라옵니다. 왜 그렇게 화가 많았을까 생각해보니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었습니다. 일이 좀 술술 풀려야 하는데 답답한 일들이 많았지요.
요즘은 출가하겠다고 들어오면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봐 바로 머리를 깎인다고 하는데요. 제가 출가할 때만 해도 일주일 동안 면벽을 하고 묵언을 하면서 대기해야 했습니다. 별다른 이름도 없이 ‘불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있으면 삼천배를 시키고요, 삼천배를 다 하면 그날 저녁에 머리를 깎고 행자가 되었지요.
처음 절에 들어가서 불자 생활을 하는데 너무 마음이 편했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때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벽만 보고 있고 말도 못하는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요. 일도 안 시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서있어야 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닐 때 마음이 쉰다
걸어갈 때도 시선은 전방 1미터를 주시해야 하지 고개를 돌려 이 사람 저 사람 봐서는 안 됐던 시절입니다. 뭐라도 눈으로 봐야 좋다 나쁘다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텐데, 볼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요. 세상 편하더라고요.
아무 것도 안 하니까 아무 것도 생각할 것이 없었습니다. 내 생각이 있어야 화도 나고 부딪치고 할 텐데,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마음이 너무 편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행자가 된지 두달 정도가 지나자 앞 기수 행자들이 계를 받으러 가고, 제가 행자 중에 소위 말하는 짬밥이 좀 높아지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옛날 버릇이 나오지요. 밑 기수 행자들 행동거지가 눈에 들어오고 내 생각이 생기고 내 마음에 차지 않으니 화가 나고 말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지금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자 생활 일주일, 행자 생활 한두 달 정도까지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요.
내가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 자연
보왕삼매론으로 돌아와서, 다른 사람이 순종하고 거스르지 않기를 바라지 말라 했습니다. 남이 내 뜻대로 해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내 뜻대로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 장애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인이 나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장애인 것이지요.
출가 전의 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내가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피하면서 남이 내 뜻대로 해주기를 바라다보니 화가 쌓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출가 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것만 하라고 하니, 일종의 무심(無心)인 상태가 된 것이지요.
어떤 마음이 없습니까? 중생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심은 구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가리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데’ ‘내가 그래도 어른인데’ ‘내가 더 많이 배웠는데’ ‘내 말이 옳은데’ 하는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지요. ‘저 하천이 깨끗해야지 더럽네’ ‘저 사람 말을 참 거칠게 하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중생심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무심을 일상에 구현하려면…
보왕삼매론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것은 자연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무심합니다. 특별히 누군가에게만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고요. 나무 열매가 내 한 몸 희생하여 토끼의 배를 불려주겠다 하여 먹이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고요. 그냥 그렇게 하는 겁니다.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열매가 되고 열매를 먹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연기법에 의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요? 무심하지를 못합니다.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장애가 되는데 자연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자연에서 무심을 관찰하고 자연에서 무심을 배워야 합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균형을 잡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무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바로잡으려면 오른쪽으로 치우쳐야 합니다. 평소 우리에게 남이 순종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뿌리 깊으므로 더욱 남에게 순종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춰가야 합니다.
법정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절을 지켜라.”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남이 나에게 순종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을 나이 60, 70에 바로잡으려고 하면 잘 안 됩니다. 부모, 자식, 친구,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절을 깍듯하게 지켜서 억지로라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내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경구를 요약하자면 ‘무심’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