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와 팔정도 ⑦ – 집성제 3 십이연기 중 과보(果報)

불교에서의 윤회는 당구와 같다. 한 공이 다른 공을 때리면서 한 공에는 정지가 다른 공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처럼 삶을 지속하는 주체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멸할 뿐이다.
당구공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것은 무의식이라 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가운데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생겨난다. 그것이 십이연기를 관통하는 과보의 개념이다.
무명과 행은 과거 생이며, 과거생의 과보로써 현재생에 받는 것이 식, 명색, 육처, 촉, 수이다. 이것이 작동하는 기제는 과보로 이미 결정된 것으로 바꿀 수 없으나, 애와 취는 현재 생에서 수행을 통해 다듬어 갈 수 있는 것으로 그 과보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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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무명(無明) · () · ()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 · () · () · () · () · () · 노사(老死)

오늘은 생과 생을 연결하는 지점인 윤회를 주제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전생은 무명, 행까지입니다. 내생은 생과 노사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이 현생이고요. 전생에서 현생으로 이어지는 지점이 행을 조건으로 식이 생기는 지점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이어달리기와 당구

윤회는 전생이 현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에서의 윤회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듯 무언가 중심이 되는 나 자신이 있어서 계속 몸을 바꿔가며 자신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의 영혼이 따로 있어서 이 영혼이 몸을 바꿔가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어달리기를 할 때 선수가 바뀌되 바톤은 계속해서 트랙을 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인도 전통적 사상에 입각한 윤회를 육화(肉化)라 합니다. 

불교에서의 윤회는 이어달리기가 아니라 당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당구는 A공을 치면 이것이 움직여서 가만히 있는 B공에 맞고, 이 충격에 의해 정지해있던 B공이 굴러가서 C공을 충격하여 움직이게 합니다. C공이 마침내 D공과 만나면 D공이 굴러가서 최종적으로 구멍에쏙 집니다. 당구를 치는 사람은 D공을 구멍에 넣기 위해 D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A공을 칩니다. 

불교의 윤회가 이런 겁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톤 같은 것이 없습니다. 바톤이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 찰나가 다음 찰나의 원인이되어 옮겨갑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윤회를 ‘상속한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찰나찰나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지금 찰나의마음이 다음 찰나의 마음을 일으키는 조건이 됩니다. 

다음 찰나의 마음은 지금 찰나의 마음에 영향을 받아서 생겨나지요. 마치 가만히 놓여 있던 당구공이 굴러온 당구공과 만나서 움직이는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확장되면 우리의 삶 전체가 됩니다. 이번 생이 다음 생으로, 그 다음 생으로 흘러갑니다. 이 생의 죽음의 순간 다음생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마치 당구공과 같습니다. 

이전생의 과보 – 명색 – 육처 –  – 

심층의식.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결코 끊어지지 않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하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마음은 항상 끊어지지 않고 흐른다고 불교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찰나까지도 마음은 흘러가고, 그렇게 흘러간 끝에 다다르는 제일 마지막 마음을 죽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마음이 조건이 되어 다음 생의 첫 마음이 생깁니다. 마치 A공이 B공을 치는 것처럼요. A공은 B공을 치고는 가만히 멈춰서게 되고B공은 새롭게 움직이게 됩니다. A공이 멈추는 것을 보고 우리는 ‘죽었다’고 하고, 그 힘으로 B공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탄생했다’고 합니다. 

이 생의 첫 번째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 하고, 그 직전의 마지막 마음을 죽음의 마음이라 합니다.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 사이에 흐르는 마음도 있습니다. 존재지속심입니다. 이렇게 한 생과 다른 생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생과 생을 연결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찰나에 사라지는 마음을 조건으로 찰나에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윤회(輪廻)는 ‘바퀴 륜’에 ‘돌 회’ 자를 씁니다. 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찰나찰나 상속합니다. 마음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흘러가는 것입니다. 흐름이 다음 생으로, 또 다른 생으로 계속 흘러갑니다. 그 누군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데 새로운 생이 시작하고 하나의 생이 끝나는 것이 불교의 윤회입니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 과거의 원인인 무명과 행으로 인해서 현재의 과보, 즉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납득됩니다. 

이전 생인 무명과 행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식(識)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촉(觸) · 수(受) 입니다. 이것이 이전 생의 과보로 이번 생에받은 결과입니다. 

 – 명색은 동시에 발생한다

식(識)은 무엇일까요? 서두에 하나의 생이 시작하는 찰나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재생연결식이라 했습니다. 그 식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나옵니다. 

명은 정신이고 색은 형색입니다. 흔히 정신과 물질이라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데, 초기불교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오온이라합니다. 즉 오온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색수상행식의 오온 중 색온은 물질적인 부분에 해당하고,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을 합쳐서 정신[명]이라 이름 붙인 것입니다. 

오온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고, 하나의 생이 시작하는 찰나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식온, 즉 재생연결식입니다. 이것을 시간순서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경전에는 식과 명색은 동시에 발생한다고 나오는데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전 생의 죽음의 마음이 조건이 되어서 이번 생의 오온이 발생하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식온이라는것입니다. 이렇게 재생연결식이 생의 첫 번째 찰나의 마음으로 역할합니다. 식을 먼저 두고 명색을 다음에 둔 이유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처는 외부 대상이 신체와 만나는 자리

명색을 조건으로 육처가 생깁니다. 육처(六處) 는 육입(六入)이라고도 합니다.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로 나누어 십이처라 말하기도 합니다. 육입이란 쉽게 말하면 외부의 대상이 우리에게 감각으로써 인지될 수 있도록 신체 일부와 만나는 장소입니다. 감각 장소, 감각 기관이라고할 수 있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빛이 우리 눈의 특정한 부위에 도달한 후에 이 부위에서 빛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뇌로 전달한 결과입니다. 듣는다고 할 때는 소리와 우리의 육체가 만나는 장소로 귓속의 나팔관을 들 수 있겠지요. 우리 몸에는 이러한 감각 장소가 다섯 군데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입니다. 

육입처의 나머지 한 개는 마음의 감각 장소입니다. 빛이나 소리 등 감각 대상이 신체의 감각 장소에 도착했다 한들, 이러한 요소를 전기신호로 바꿔서 뇌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대상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안이비설신의로 들어온 정보들을 모아서 인식하는 것이 마음의 감각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마음은 아는 ’, 앎은 대상과 함께 한다

경전에서 말하는 마음의 정의는 딱 하나입니다. ‘아는 것’. 

그런데 평상시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은 그냥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아주 복잡한 사고를 하기도 하고 걱정을 하고 질투를 하고 우울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모습을 우리는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앞서 열거한 감정들은 단지 마음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오로지 아는 것, 아는 작용 그 자체만이고그 외의 모든 것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과 함께 하는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식과 명색과 육입이 같이 움직인다는 말을 이 관점에서 이해하면됩니다. 순수하게 아는 작용만 작동할 수는 없습니다. 앎의 대상들이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옆서 십이연기의 특징을 설명할 때 앞의 요소가 그 다음 요소의 조건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간적인 차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개의 요소가 같이 발생할 수도 있고 시간의 순서대로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의 요소가 뒤에 오는 요소에 대하여 주도적이고 근본적인, 강력한 작용을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생이 전환되는 부분은 순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찰나의 죽음의 마음과 다음 찰나의 재생연결식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아니라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과 명색과 육입은 시간순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씀을 바로 전에 드린 바 있습니다. 

대상과 감각과 마음이 만나지는 사건

육처의 다음은 촉(觸)입니다. 촉은 감촉입니다. 터치(touch)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본다’는 사건 그 자체를 말합니다. 어딘가에서 빛이라는 대상과 내 마음이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촉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서 빛과 마음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가?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자면 참 막막하지 않습니까. 눈동자를 자세히 관찰해보십시오. 흰자위 가운데 동그란 눈동자가 있고, 동그란 사이에 홍채가 있고, 홍채 안에 망막이 있습니다. 그 망막 안에 나의 모습이 그대로담겨 있습니다. 마치 카메라 렌즈처럼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거기가 바로 빛과 내마음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눈의 감각 장소[안입처]에서 색(色)과 안식(眼識)이 만나는 사건이 바로 촉입니다. 촉은 세 가지의 조건[입처, 색, 식]이 각각 발생해야 일어납니다. 식 – 명색 – 육입 다음에 촉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때야 비로소 무언가 ‘느낌’이 옵니다. 저기에 무언가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뇌과학적으로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보다 좋다 싫다는 느낌이 더 먼저 찾아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DNA에 기록된 생존본능에따른 것입니다. 2만 년 전에 살던 원시인이라면 숲을 가다가 부스럭 소리가 났을 때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감각으로 먼저도망치는 편이 생존 확률이 높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도망한 선조들만 살아남았기에 그런 DNA만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어떤 감각과 만났을 때 좋다 싫다는 느낌이 먼저 작동하는 것은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좋다 싫다는 느낌이 수(受) 입니다.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모두 포함합니다. 의식하지 못한 정도의 일차원적이고 직관적인 느낌[수]이 바탕이 됩니다. 이런 저런 생각과 판단은 이런 수의 작용을 바탕으로 나중에 생기는 것이에요. 

이렇게 식 – 명색 – 육처 – 촉 – 수는 전생의 과보로써 현생에 받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과보의 마음입니다. 전생에지은 업에 따라 과보로 받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이 과보는 태어나는 순간 결정됩니다. 

  과보는 결정된 바꿀  있는 것은 현재  

수를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는 것이 애(愛) – 취(取)입니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집착하고 집착이 심해져 그것이 업이 됩니다. 이것들은 현생에서 내가 지어 나가는 것들입니다. 현생에서 내가 지어 나가는 것이 또 다른 생의 원인이 되므로 이 생의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은 이미 받은 과보의 마음을 소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현재 내가 짓고 있는 잘못된 업, 무명에서 비롯되어 지어 나가고 있는 집착과 애착, 선하지 못한 업을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의 대상은 현재 내가 짓고 있는 업입니다. 현재짓고 있는 업은 갈애에서 비롯되므로 집성제 역시 갈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수행의 대상은 전생에 지은 업의 결과도 아니고 다음 생에 지게 될지도 모르는 그 무언가도 아닙니다. 지금 생에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업을 소멸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수행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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