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어디 계신가?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했던 상좌부 불교와는 달리 대승불교는 부처님을 신격화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일반 종교에서의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인 것과는 달리 부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삶을 살다 갔으며, 제자들에게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방일하지 않게 정진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는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를 가졌기 때문이며, 이러한 불성사상을 마음 깊이 믿고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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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스님의 게송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荷方) 아미타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망막(着得心頭切莫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잠시라도 잊지 말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하고 생각 다 해 무념처에 도달하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어느 때나 육문에서 금색 광명 빛나리라

나옹스님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왜 나는 집중이 안 될까요?” 그러자 나옹스님이 위의 게송을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앞의 한자는 칠언절구로 된 시조이고 뒤의 한글은 그에 대한 해석입니다. 백중기도나 제사를 지내면서 장엄염불을 할 때 항상 읊는 게송이므로 불자님들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보리도차제론> 설명하는 부처님

티베트 불교의 개론서인 <보리도차제론>에서는 부처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 번째, 부처님은 윤회의 세계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신 분이다. 윤회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이고, 부처님은 사바세계의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물에 빠졌을 때, 두 사람이 서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윤회의 세계의 고통이라는 바다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이기 때문에 물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해줄 수 있는 분입니다. 

두 번째.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을 남김 없이 제도하는 분입니다. 비유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팔이 없는 어머니가 물에 빠져서 떠내려가는 아들을 구할 수 있는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들어 아들을 구해내고 싶겠지만 팔이 없으므로 아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성문이나 독각을 의미합니다. 보살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분들은 본인은 깨쳤을지라도 남을 구제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분들은 스스로는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 중생들의 어머니이되 팔이 없어 제도해줄 수는 없는 분들입니다. 반면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지요. 부처님이 모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내 안에 가득 차야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생깁니다. 

세 번째.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을 차별 없이 다 보살펴 주시는 분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부처님은 당신의 아들인 라훌라와 반역자였던 데바닷타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했습니다. 

부처님을 신격화 시킨 대승불교

부처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요? 인간이 아니라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신격화시켰습니다. 대웅전 가운데에 금색 옷을 입혀서 신처럼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 교리에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종교라고 합니다. 신이 있어서 믿어야 하는 종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부처님을 신으로상정하게 되는 걸까요? 부처님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고 훌륭한 나머지 우리가 부처님을 신의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이야기하듯 신을 반드시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듯인간적인 모습이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을 신의 모습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도의 3대 신인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신들 역시 여호와와 같은 전지전능하거나 세계를 혼자서 창조한 절대자가 아닙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있었고, 아쇼카 대왕과 같은 위대한 왕들이 수행자들이 불편함 없게 수행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합니다. 이렇게 지원을 받은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교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치중한나머지 일반 재가자들에게는 불교가 너무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여기에서 대승불교가 발생합니다. 너무 스님들만 공부하지 말고 재가자들도 함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죠. 

흔히 소승불교라고 말하는 상좌부 불교는 불법승 삼보 가운데 법을 강조합니다. 부처님의 법이 무엇인지 먼저 정확하게 교학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때문에 아비담마 불교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수행자는 부처님 법대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고 재가자들은 수행자를 잘 시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하는 당사자가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죠. 

믿음과 귀의를 강조하는 대승불교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불법승 삼보 중에서 불(佛), 부처님이 가장 중요합니다. 부처님과 같이 훌륭한 분을 본받기 위해 부처님을 신적인 존재로 모십니다. 여기에서 기도나 예불, 탑돌이 등의 신행이 발생합니다.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처럼 세밀한 것까지 따지는 부분은 부족하지만많은 재가자들이 불교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신적인 존재로 숭상하면서 불교의 문턱이 낮아진 것이지요.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중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임종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어떤분이 돌아가시려고 할 때 스님들이 와서 몸과 마음에 대하여 알아차림 수행을 하는 방법을 낱낱이 일러줍니다. 임종 직전이야말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수행하라고 더욱 독려하는 것입니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단 한 번이라도 지극정성으로 외우면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누구라도 자신이 다스리는 서방정토에 오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입니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공부나 수행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도 그 세계에만 가면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증득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임종의 순간에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합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부처님 법대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대승불교는 오로지 믿음으로써 아미타 부처님에게 귀의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신적인 존재로 모십니다. 이를 부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반 종교에서의 신과 신으로써의 부처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신들이 하는 일은 인간이 비는 소원을 들어주고 나쁜 짓을 하는 놈을 혼내주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절에 오는 많은 분들이 ‘우리 아이 수능 잘 치게 해주세요’, ‘우리 배우자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 기도를 부처님이 들어주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부처님 탓이 아니라 나의 기도의 정성이 모자란 탓을 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면언젠가는 들어주실 거야.’ 엄밀히 말하면 이런 모습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유언으로 당부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부처님에게 의지하거나 빌지 말고 자기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부처님의 이 유언은 곁에서 부처님을 시봉했던 아난존자에게 한 말입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열반을 맞이하면서 슬프면서도 현실적인 고민에 봉착합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 부처님께서 40년 세월이 넘는 동안 이끌어온 이 교단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은 저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자등명법등명]고 답합니다. 뿐만 아니라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으로 “방일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하시지요.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을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켜서 불교를 더 넓게 펼쳐두었는데, 정작 부처님은 부처님을 믿지말고 자신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부터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이되,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어느 정도 깊어진 후에는 자기 스스로 변화해야 합니다.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매미로 탈바꿈하듯, 우리도 어느 단계에 이르면 스스로변화해야 합니다. 불단에 금색 가사를 입고 앉아있는 내 밖의 부처님을 더이상 모시지 않고 내 안에 부처님을 모셔야 합니다. 

불성사상스스로 믿음으로의 전환

그러자면 마음속에 약간의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아니, 부처님처럼 위대한 분을 어떻게 나라는 보잘 것 없는 그릇 속에 담을 수 있나?’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불성(佛性) 사상입니다.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는데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님이 될 씨앗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면 평생 부처님에게 소원만 빌다가 끝나고 맙니다. 내가 바로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이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귀의하는 것입니다. 귀의(歸依)는 부처님에게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말하는 대로 말하고 부처님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부처님에게 돌아가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누구나 부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도 우리와 같은 중생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었어요. 다만 너무나 오랜시간 전생에 전생을 거듭하면서 수행을 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까닭에, 우리들에게는 마치 신처럼 위대한 존재가 되었을 뿐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듯이 우리 그렇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불성사상이 없으면 불교 역시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두 번째는 나 자신이 곧 부처이고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핵심은 지금의 내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중생의 몸이었다가 부처의 몸으로 바꿔 가지는 것이 아니고요. 내가 이미 부처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열어주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몸과 이 마음으로 살되 다만 이 행과이 마음이 부처님의 행과 부처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성사상과 유사하게 느껴지지만 전혀 다른 사상이 있습니다. 인도의 브라만 사상입니다. 힌두교의 브라만 사상은 브라만이라는신이 너무나 전지전능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특정한 형태의 신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다 포괄한다는 개념입니다. 

부처님은 브라만 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신이 전지전능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신과 합일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 스스로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성사상입니다. 

네가 바로 부처다

다시 나옹스님의 게송으로 돌아가봅시다. 

“아미타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잠시라도 잊지 말라. 생각하고 생각 다 해 무념처에 도달하면 어느 때나 육문에서 금색 광명 빛나리라.”

한 수행자가 열심히 나무아미타불 수행을 하는데, 아미타 부처님이 내 밖의 어딘가에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서방정토까지 9만8천 리를 가면 된다는데 정말 그 길을 걸어가면 서방정토가 나올까? 하는 의심이 든 겁니다. 

거기에 나옹스님이 하신 말씀이 “아미타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의심을 마음의 머리에 두고 살라”는 겁니다. 그것을 화두로 삼아의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그 생각이 생각 없는 끝까지 도달하게 되면 육신의 6개의 문을 통해 광명이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육문에서 금색 광명이 빛나는 이는 누구입니까? 부처님입니다. 

즉 나무아미타불을 화두 삼아 의심하면 무념처에 도달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네 스스로가 아미타 부처님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오늘 주제에 대한 답을 나옹스님께서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네 스스로가 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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