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 천도재는 죽은 자를 위한 법문이고 천도재에 앞서 봉행하는 법회는 산 자를 위한 법문 시간입니다. 이렇듯 백중은 산 자와 죽은자 모두에게 뜻깊은 날입니다. 백중 회향 법문의 주제는 매년 같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는것입니다.
모든 경작 가운데 가을의 열매가 제일이요
모든 발자국 가운데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이요
모든 생각들 가운데 무상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이로다
이런 생각으로 삼계의 욕망과 무명과 자만을 다 없앨 수 있으리라
<대열반경>
부처님은 우리에게 매 찰나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오늘은 다음의 질문들과 함께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합시다. 부처님 말씀과 달리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죽음을 매순간 생각한다면 어떤 이득이 있는가? 어떻게 해야 매 순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수 있는가? 죽음을 생각하라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가?
불교에서는 ‘찰나’라는 말을 씁니다. 아주 짧은 순간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데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의 생각이 생겼다 사라지는 시간이 바로 찰나입니다. 굳이 시간 단위로 표현하자면 75분의 1초입니다. 이 말은 1초에 75번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매 찰나 죽음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1초에 75번 죽음을 생각하는 꼴이고요. 하루 24시간을 찰나로 나누면 4억8천6백만 찰나, 1년으로치면 1750억 찰나 동안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한다면 하루에도 5억여 번에 달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하루에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도 내가 살고 있구나.’ 오늘도 살고 있고 어제도 살았고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1년만 해도 1750억 찰나인데 평생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순간이지요. 그런데 ‘내가 죽는다’는 생각은 몇 번이나 됩니까? 아마 딱 한 번 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압도적으로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굳이 죽음을 끌어오지 않습니다. 10년 전에 살아 있었던 것이 당연하고 지금도 살아있으니 10년 뒤에도 막연하게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내일이나 1년뒤 10년 뒤에 내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살아가지요.
‘내가 계속 살아갈 것이다’라는 것에서 욕심이 생깁니다. 살아가려면 이런저런 것이 필요하다는 욕심, 기왕이면 좀 더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원하는 만큼 욕심이 채워지지 못하면 화가 나고 좌절하고 우울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깁니다. 이러한 번뇌는 ‘나는 살아있고 언제까지나 살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때문에 매 순간이 번뇌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삶입니다.
왜 중생은 이렇게 힘들게 삽니까? 이렇게 안 살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간단합니다. 전생도 지금처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다람쥐 챗바퀴 돌듯 윤회를 합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다음 생에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잠들면 내일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재물욕, 명예욕 같은 욕심들이 줄어들고, 이런 욕심이 줄어들어야 부정적인 감정이 줄어드는데,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삶이 고달픈 것이고 고달픈 삶이 반복되는 겁니다.
‘지금 죽지 않는다’는 생각과 마주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죽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운다. 이것이 쇠망의 문이다.
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 바로 쇠락해서 망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 반대의 길,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항상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원만의 문입니다. 원만하게 구족한 문이며 법의 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부처님이 항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상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무상이라는 진리가 나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근거 없이 믿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우리는 ‘내가 변함없이 살아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요? 생각건대 태어나서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어봤기 때문에,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근거 삼아 살아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의 부작용?
죽음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다가 주변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죽음을 목전에서 지켜볼 때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50대 초중반의 여성들은 본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잠깁니다. 젊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슬픔보다 오히려 더 큽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면서 어머니의 삶에 공감했기에 누구보다 더 가까운 애착관계가 형성되기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애착과 집착에서 나옵니다.
왜 우리는 애착하게 될까요? 평소에 수행을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죽음을 통찰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전혀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가족, 친구, 지인, 심지어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모두가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애착이 커질 대로 커지고, 그 애착은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라 고통으로 전환됩니다. 죽음으로 인해서 애착하던 것을 잃어버리고 여기에 따른 고통이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잘못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평소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임종에 닥쳤을 때에 맞닥뜨리게 되면 그 공포가 어마어마합니다. 임종에 닥쳤을 때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지금, 그나마 정신이 멀쩡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직면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좋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에서 멈춰버리거나 갇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죽음은 나와 가장 가까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것을 버리는 것이고 이별하는 것입니다. 나하고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내 몸뚱이입니다. 배우자, 자식 친구보다 더 가깝게 나와 24시간 함께 있는 것은 나의 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집착을 버리라고 해서 안 먹고 안 자고 숨도 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기왕이면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기왕이면 더 편한 집에서 살고 싶고 더 좋은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겁니다. 당장 내 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내 몸과의 이별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들입니다. 내 몸과 내 몸이 누리는 기쁨들과 나는 언젠가 헤어진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법
어떻게 하면 언제나 죽음을 마음에 두고 살 수 있을까요? 다음의 세 가지를 염두에 두면 됩니다.
-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 죽음은 부처님도 피해갈 수 없다.
- 언제 죽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반드시 죽는다.
- 죽음에 닥쳤을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 법’ 밖에는 없다.
경전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4~5초가 우리의 삶이라고요. 현대로 치면 어떤 사람이 100층 빌딩 옥상에서 떨어지는 겁니다. 이때 99층에 있던 사람이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당신 지금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고 떨어지면 죽어!”라고 말합니다. 떨어지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많아.”
이 사람이 80층, 60층, 30층을 지나 10층까지 내려왔을 때 10층에 있던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바로 땅에 부딪쳐서 죽을 거예요.” 이때 떨어지는 사람이 말합니다. “괜찮아. 아직은 안 떨어졌어.”
이렇게 경전에서는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져 땅에 닿을 때까지의 그 짧은 순간이 인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뭐 재밌는 일 없나’ 심심해하기도 하고, 하루종일 잠을 자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 몇 시간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 이순간을 우리는 그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경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삼류의 무상은 가을 하늘에 구름과 같고
중생의 생사는 연극을 보는 것과 같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하늘의 번개와 같고
가파른 산에서 내리는 폭포수처럼 빨리도 가네.
생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기는 것과 같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어요. 가을 하늘 구름을 보고 있으면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다시 보면 모양이 변해 있고 또 조금 있다가 보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라는 것도 마치 한 조각 구름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처럼 실체가 없습니다.
허공에 구름이 아무리 많이 생겼다가 없어진대도 허공 자체는 상처가 생기거나 물에 젖지 않습니다. 구름이 무슨 재주를 다 부려도 허공에는 아무런 변화나 흔적이 없어요. 왜냐? 구름의 실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름은 환상이고,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구름에 불과한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나를 때리면 아프고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쁘고 나쁜 일이 생기면 슬퍼합니다.
중생의 생사가 연극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연극은 실제가 아닙니다. 연극이 끝나면 무대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연극을 하는 동안에만 마치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일 뿐입니다. 연극에서 갑돌이와 갑순이가 물레방앗간에서 만나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 실제가 아니듯이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모두 곤두박질 치는 중
중생들이 목숨을 마치는 것은 하늘의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엄청나게 많은 순간순간 내가 살아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은 마치 번개가 꽝 내리는 것처럼 일순간입니다. 숱하게 많은, 몇천억 번의 찰나를 살아왔는데 죽는 순간은 딱 한 번이니 얼마나 허망합니까. 살아있는 우리는 지금 높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언젠가는 땅에 떨어져서 죽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 우리가 떨어져 내리고 있는 중인데, 지금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스스로 모릅니다. 누구나 반드시 죽지만 언제 죽는지는 모른다는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살다 보면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리모델링을 어떻게 하고 어떤 가구를 놓고 살지, 말 그대로 살 준비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잠깐 있다가 다른 데로 갈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으면 어떤 가구를 쓸지 어떻게 리모델링을 할지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짐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겠지요. 살 생각 대신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 것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떠나게 되어 있어요. 항상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으로 짐을 잘챙겨야 해요. 이때 챙겨야 하는 짐이 바로 부처님의 법입니다. 죽음과 맞닥뜨리게 될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법 밖에 없다는 얘기가 바로 이 말입니다.
죽을 때는 평생을 나와 함께 한 몸마저도 버리고 가야 하는데 하물며 재산, 명예, 가족, 친지는 어떻겠습니까. 이것들 모두 가지고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죽을 때 발이 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발을 떼서 가야만 해요. 이때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가지고 가려면 평소에 입력을 잘해둬야 합니다. 죽을 때는 핸드폰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검색해볼 수도 없고 노트북도 인터넷도 안 됩니다. 다른 곳 말고 내 마음속에 입력해을 해놔야만 죽음의 순간에 꺼내어 보고 다음 생을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이 아닌 것들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죽음이 닥쳤을 때 ‘더이상 금생에계속 머물지 않겠다’는 마음이 비로소 일어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소화시켜 두어야만 ‘1년 전에도 살았고 오늘도 살아있으므로 1년뒤에도 살 거야’라는, ‘현생에서 천년만년 살 거야’라는 생각이 버려지고 훌훌 떠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진리를 향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입력만 해두는 것이고, 부처님 법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버리겠다는 마음이 들 때야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내 삶이 굴러가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만 부처님 법대로 살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누구와도 친하지 않은 저승사자는 뜻하지 않게 갑자기 닥치나니 내일이나 모레라는 생각은 말고 정법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리.
저승사자는 누구와도 친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는 거예요. 저승사자가 나타났을 때 이 삶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법 뿐입니다. 오늘 법문이 좀 매몰차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언제든지 저승사자가 오면 갈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죽음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저승사자에게 “방 치우고 가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었습니다.